일러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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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두 번째 별자리의 정기로 태어나는 꽃

나무마다 한 송이씩 스스로 우는 꽃

내 캄캄한 피 속에서 피어날 불꽃

내 너를 고이 따 깊은 동이 속에 쓸개즙과 함께 버무리리라

그로테스크한 꽃이여

 

2015년 상강에

강기원


1부


나는 불안한 샐러드다

투명한 볼 속에 희고 검고 파랗고 노란, 붉디붉은 것들이 봄날의 꽃밭처럼 담겨 있다. 겉도는, 섞이지 않는, 차디찬 것들. 뿌리 뽑힌, 잘게 썰어진, 뜯겨진 후에도 기죽지 않는 서슬 퍼런 날것들. 정체불명의 소스 아래 뒤범벅되어도 각각 제맛인, 제멋인, 화해를 모르는 화사한 것들. 불온했던, 불안했던, 그러나 산뜻했던 내 청춘 같은 샐러드. 샐러드라는 이름의 매혹적인 불화 한 그릇 입 속으로, 밑 빠진 검은 위장의 그릇 속으로, 생생히 밀려들어 온다. 나, 언제나 소화불량이다. 그 체증의 힘으로, 산다, 나는. 여전히, 내내, 붉으락푸르락 샐러드. 나는 불안한 샐러드다.


무화과를 먹는 밤

죄에 물들고 싶은 밤

무화과를 먹는다

 

심장 같은 무화과

자궁 같은 무화과

 

발정 난 들고양이 집요하게 울어 대는 여름밤

달빛, 흰 허벅지

 

죄에 물들고 싶은 밤

물컹거리는

무화과를 먹는다

 

농익은 무화과의

찐득한 살

피 흘리는 살


백색의 진혼곡

밤의 서재에선

담즙 냄새가 난다

묘지 속 관들의 쾨쾨한 입냄새

일렬종대로 꽂혀 있는 册들의 뼈

시간의 풍장에 바쳐진

뼈들의 전집

뼈들의 파이프오르간

밤의 건반과 페달을 눌러

잠든 나를 깨우는 유령 저자들

돋을새김처럼 또렷해지는

시침과 분침의 타악

빙벽처럼 버티고 선 冊, 冊들 바라보며

다만 펜을 들고

영혼의 처녀막이듯

막막한 설원의 백지 위에

단 한 글자도 적지 못하는 밤

백색의 웅장한 진혼곡을 듣는다

크레바스처럼 두개골이 열리는

진혼곡


해골

내 해골을 보았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의

낯가죽 뒤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해골

그는 언제나

저리 웃고 있었던 걸까

거죽의 내가

울고 있을 때에도

질투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 할 때에도

내 뒤에서 말갛게

수치심을 모르는

말 배우기 이전의

흰 그림자처럼

뒤틀린 두개골 속에서

눈동자도 혀도 없이

그로테스크한

천진난만의

함박웃음

나 아닌 듯

참 나인 듯

소리도 없는

하 하 하


— 飛禽島

날고 싶은 섬 한 마리가 있다

 

지느러미 없이 헤엄쳐 가고 싶은 섬 한 마리가 있다

 

덫에 걸린 매처럼 때때로 푸드덕거리는 섬

 

연자 맷돌 메고 비상하려는 섬

 

일몰의 두근거리는 선홍빛 명사십리

 

바다도 어쩌지 못하는

 

섬 한 마리

 

내 안에

 

있다


구부러진 십자가

오랫동안

그의 밑에 깔려 있었다

아니,

그를 뒤에서 안고 있었다

수저가 포개지듯

아니,

그가 나를 업고 있는 것 같았다

내려놓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뿐인데

서로 돌아본 적도 없이

그뿐이었는데

내 가슴이 파이는 만큼

그의 등이 구부러지고

점점 꿇어 가는 그 무릎의 각도와

내 뻣뻣한 무릎의 각도가

같아졌다

그가 떠나간 후에도 그랬다

무릎을 펼 수 없었다

가슴을 펼 수 없는 것처럼


지중해의 피

너무나 큰 젖먹이 짐승

배고픈 아이를 앞에 둔

부끄럼 없는 어미처럼

수백 개의 젖무덤 당당히 풀어헤친

지중해

이목구비 없이 젖가슴뿐인 바다

대륙붕의 넓은 띠로도

탱탱히 불은 가슴 동여맬 수는 없다

리아스식 해안의 만을 감싸는

부연 젖물의 새벽 안개

바다의 검은 유두를 물고

솟아오르는 흰죽지갈매기 떼!

바다 곁에서

목마른 나여

먹어도 먹어도 허기지는

아귀 같은 나여

허기의 지도 따라

바닥짐 버리고 여기까지 온

나여

최초의 비린 맛인 저

미노아의 젖멍울에

갈라 터진 입술을 대리

맨발의 푸른 자맥질로

내 피 전부를

지중해의 피로 바꾸리

천둥벌거숭이

크레타의

파랑(波浪), 파랑, 파랑이 되어


내 영혼의 개와 늑대의 시간

순종이 야성에게 악수를 청하는 어스름

 

창밖에서 창 안을 바라보며 공모자가 되는

파계 직전의 은수자 같은 자작나무들

 

가슴 속 날개만 있는 독수리들이

영혼의 산맥을 향해 설레는 날개를 들어 올리면

 

태어나기 이전의 달과 태양이 그 조도를 회복하고

 

죽은 조상과 태어나지 않은 후손들의 울부짖음이 후두 깊은 곳을 타고 올라온다

 

그 소리에 맞춰 영혼의 고관절이 풀리는 알몸의 춤사위 속에서

 

나는 나를 잊고

 

내 두개골은 들짐승의 바람으로 넘실거리기 시작한다

 

그러나 대지의 음경 같은 둔중한 추가 내 안에 있어

버짐처럼 번진 사막으로 머리채 끌고 가 내동댕이치는 깊은 밤

 

파르스름한 초승달의 칼 같은 눈초리 아래서

 

붉은 피가 검은 잉크로 변해 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엎드려 끈적끈적한 뱃속의 잉크로

 

누군가의 목소리임이 분명한 침묵

그 야생의 우렁우렁함을

영원한 처녀인 모래 위에 베껴 쓴다


대성당

욱신거리는 관자놀이 속의 지구

 

지구의 거대한 두개골 속에 담긴 푸른 뇌수

 

뇌수 속 발효하는 구름

 

구름 속 잘린 목처럼 내걸린 태양

 

태양의 대동맥이 흘리는 노을

 

노을의 잔 들이켠 황도대 짐승들의 취기

 

취기를 뿜어내는 성좌

 

성좌의 부스러기들이 쏟아져 나오는 금간 눈알

 

눈알을 비비며

태고의 공복감으로 쓰린

배를 쓸며

다시 태어나기 위해

내 안의 대성당

그 녹슨 빗장을 여는 캄캄한 새벽


낙타가 되는 법

태산을 삼킨 자

 

태양에 맞서 고개를 들 것

뒤돌아서지 않을 것

 

스스로 그늘을 만들어

최대한 차가워질 것

 

친구를 포기할 것

 

누명에 익숙해질 것

 

펭귄의 시절을 기억할 것

모래 폭풍의 지도 속에서 대양의 지도를 읽을 것

 

하루치 양식으로 새벽노을 마신 후

 

살구 씨 몸 깊이 박고

없는 길을 떠날 것

그리고

·

·

·

울지 않을 것

다만 묵묵할 것


나의 창세기

임사 체험 피정의 날

 

입 벌린 무덤 속

무한대의 자세로 누워 점점 냉철해지고 있다

생시보다 신선한 나

그러나 곧 내가 나를 먹어 대기 시작한다

뇌수 섞인 진물이 흐른다

느슨해진 몸뚱이가 허물을 벗으려 한다

탈피

오랜 명상 후에도 이를 수 없던

누에의 시간을 누린다

물렁물렁한 반죽

무엇으로든 새로 빚어질 듯하다

어찌된 일인가

바람도 없이 시원하다

점점 시원하다

더할 수 없는 앙상함으로

나는 남는다

 

육신의 비좁은 거처를 벗어나

이제야 나는

수평에서 수직으로

선다

 

밤의 이마에 선명히 찍힌

외눈의 유령 같은 북극성

그 빛 아래서

 

감기지 않을 맹금의 눈을 가진

어린 선지자가 되어

나의 묵시록과 창세기의 첫 줄을 쓴다


문둥병자

이곳에 나를 부려 놓았다

오래전 문둥이들의 집성촌

세상이 문둥이에게서 물러서듯

세상으로부터 물러서기 위해

 

이목구비 뭉개진, 환하디환한 태양 아래서

중개인은 말했지

‘명당이에요. 슬픔은 그들이 다 가져갔거든요.’

 

그래?

툭툭 떨어진 발가락 같은 돌멩이들

진물처럼 조용히 흘러내리는 실개천

나균인 듯 들러붙는 납거미 거미줄

돌마다 물마다 스민 얼

나는 손목 없는 그들에게 악수를 청한다

병이 깊어질수록 본능은 더 승해졌다지

 

그래선가?

이 곳의 바람은 쓸개를 훑으며 분다

의뭉스런 새벽안개

화농의 상처 덧나는 석양의 때

발정 난 들고양이 집요한 울음소리

 

이곳에 와 나는 살아간다

죽어 간다

영혼의 문둥병자가 되어

잊고, 잊혀진 채

뭉텅뭉텅 문드러지는 살점

내 몸 냄새를 맡는다

먼 훗날, 누군가 이 곳에 들러 같은 말을 들으리라

‘명당이에요. 슬픔은 그들이 다 가져갔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