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문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

남성 네 명이 중년 남성 한 명을 접착테이프를 이용해 나무판에 꽁꽁 싸맨다. 그중 한 명이 두꺼운 사인펜을 꺼내더니 남자의 이마에 0을 두 개 그린다. 두 번째 남자는 자기 성기를 남자의 얼굴에 들이대고, 세 번째 남자는 바지를 내린 다음 남자 위에 걸터앉는다. 남은 한 남성이 이 광경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모두들 엄청 즐거워 보인다. 이들은 이 장면을 찍은 비디오테이프를 한 부 더 복사해 피해자에게 ‘집에서 보라고’ 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왈롱에 있는 한 마을의 지극히 평범한 회사이다. 카메라를 손에 든 남자는 노조 대표이다. 많은 동료들이 가세했지만 말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은 벌써 몇 년 동안 그런 짓거리를 해왔다. 텔레비전 뉴스에서 해당 영상이 방송된 직후 비슷한 일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신고가 줄을이었다. 1주일 후에는 플랑드르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밝혀졌다. 강철 가공 회사에서 현장감독과 기술자가 크레인 기사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혔던 것이다. 이들은 크레인 기사의 바지를 벗기고 엉덩이에다 저속한 욕설을 적은 다음 그를 지프차에 매달고 차를 몰고 회사 안을 돌아다녔다. 심지어 그 영상을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그 후 한 달 동안 언론은 연일 이 문제로 시끄러웠다. 이곳저곳에서 쏟아져 나온 피해 사례가 놀랄 정도로 많았다. 근로자의 10~15퍼센트가 그런 식으로 왕따를 당한다고 하니 말이다. 시급히 원인 분석을 해야 할 사건이었고, 실제로 이유를 밝히려는 노력들이 적지 않았다.

첫 번째 설명은 보수 진영에서 나왔다. 왕따는 다른 많은 사회문제들이 그렇듯 우리 사회에서 규범과 가치가 실종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버스나 전철 기사들이 폭행을 당하고, 아동학대 건수가 치솟으며, 교사들이 어린 제자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이민 신청자들이 온갖 범죄를 저지르는 등의 사회문제들은 모두 가치와 규범이 실종된 탓이다. 예전이 훨씬 좋았다.

두 번째 설명은 정신의학 분야에서 제시했다. 범죄자는 ‘장애인’이다. 병이 아니라면 어떻게 엄마가 제 자식을 학대할 수 있겠는가?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그래서 법원 감정인들은 ‘반사회적 성격장애를 들먹이고, 피의자가 어린 시절에 앓았던 ‘적대적 반항장애’를 지적한다. 둘 다 지난 몇십 년 동안 계속 증가 추세에 있는 진단인데, 그렇다고 안심이 될 리는 없다.

세 번째 설명은 앞서 내놓은 의학적 설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인간의 본성, 우리 안에 숨은 짐승에게서 원인을 찾는 것이다. 나치당원들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사회심리학 연구 결과를 보면 모든 인간은 특정 상황에서 사디스트가 될 수 있다. 호모 호미니 루푸스 에스트(Homo homini lupus est), 즉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다.1

이와 대립하는, 인간을 천성적으로 선한 존재로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인간은 본래 착하지만 포스트모던 사회가 우리를 나쁜 사람들로 만든다는 얘기다. 그래서 폭력을 조장하는 컴퓨터게임을 모조리 금지하면 세상이 훨씬 더 평화로워질 거라고 주장한다.

어쨌든 악은 인간에게 낯설지 않다. 이런 사실을 가장 인상 깊게 전달한 문장은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의 펜 끝에서 나왔다. 나치 친위대 고위 장교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의 재판을 지켜보고는 “악의 평범함”이라는 말로 자신의 심경을 요약했다. 인간의 내면에 악이 숨어 있다는 관념은 기독교의 원죄설과도 연결되며, 현대적 해석에 따르면 “이기적 유전자”이다.

이런 설명들은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이 우리 안에 숨어서 빛을 볼 날만 기다리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한다. 이런 인상은 적어도 정체성 및 ‘올바른’ 규범과 가치에 대한 논란이 서구 사회 전역에서 불붙고 있는 지금의 현실에서는 묘한 기분을 자아낸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심리학자에서 두뇌 연구가에 이르기까지 온갖 전문가들과 (우리가 정말로 누구인지를 설명해줄) 예언가들에게로 달려간다.

 

이 책은 이와는 다른 생각에서 출발한다. 타고난 정체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존재가 될지는 대부분 환경에 달려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낙오하는 이 현실은 근본적으로 변화한 환경에 대해 무언가를 이야기해주고 있다. 물론 이 환경과 더불어 우리도 변했다. 날로 분명해지는 사실은 이런 변화가 어쨌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가 왜 이런 주제의 책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까? 임상 활동을 통해 평소 늘 이런 생각들을 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겪고 있는 문제(나는 의도적으로 ‘장애’라는 말을 피한다.)는 과거보다 숫자가 늘어났을뿐더러 양상도 전혀 다르다.

예전에 출간된 『심리치료의 종말(Ende der Psychotherapie)』에서 나는 이미 심리장애와 사회변화의 연관성을 다룬 바 있다. 하지만 그사이 이런 사회변화의 결과가 훨씬 더 멀리까지 미치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 사회의 신자유주의 조직은 자신의 몸은 물론 파트너, 동료, 자식 등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모든 이들과의 관계를 결정한다. 그런데 이 관계가 근본적으로 장애를 겪고 있다. 이 지점에서 나의 주장은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의 이론과 함께 논문 「문명 속의 불만」과 연계된다. 나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윤리적 입장을 분명히 표명할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정체성이 있는가

최근 들어 유럽 전역에서 정체성 논란이 불붙었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네덜란드 왕비가 된 막시마는 왕세자비였던 2007년에 ‘네덜란드 사람’의 정체성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가 격렬한 비판을 받았다. 핀란드에선 ‘진정한핀란드인당’이 의회에 입성했고, 벨기에는 플랑드르 민족주의의 지칠 줄 모르는 압력에 의해 분열의 길로 들어섰으며 유럽 다른 곳에서도 민족주의 집단들이 득세하고 있다. 이유는 너무나 분명하다. 이민자나 망명자 들이 늘어나면서 다른 정체성, 규범 및 가치관을 가진 이들의 상호 충돌이 잦아진 것이다. 우리는 불안에 떨고 있다. ‘정체성’이란 자고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뜻한다. 다른 정체성과 공존하면서도 점점 더 거리를 두려는 우리의 정체성 말이다. 과거에는 주로 지리적인 스테레오타입들을 이용해 ‘정체성’을 정의했다(벨기에 사람 대 네덜란드 사람, 영국 사람 대 스코틀랜드 사람 등). 하지만 요즘엔 세계화와 사회경제적 요인의 영향력 탓에 자국인 대 외국인, 우리 기독교 문화 대 ‘후진’ 이슬람 문화, 뼈 빠지게 일하는 중산층 대 놀고먹는 하층민 같은 식의 구분법이 더 많이 쓰인다.

이런 다양한 스테레오타입에는 공통되는 특징이 있다. 우리를 더 멋지게 내보이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더 교양 있으며 지적이고 더 열심히 일한다. 20세기 초 독일인들은 유대인을 ‘열등 인류(Untermenschen)’라고 불렀고 일본인은 중국인과 한국인을 경멸했으며 프랑스인은 마그레브(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옮긴이) 사람들을 멸시했다. 당시의 이런 등급화는 거의 예외 없이 피부색이나 신체 구조, 의복 등 외적인 특징을 기준으로 삼았다. 물론 요즘도 이런 외적 특징을 강조하는 수준 낮은 정체성 논란이 수시로 일어난다. 하지만 외적인 차이가 없어도 별 문제는 없다. 다윗의 별, 빡빡 민 머리, 인종 증명서 따위를 이용해 인위적으로 외적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말이다. 우리가 이런 외적인 특성에 부여하는 의미는 동시에 우리네 불안의 정도를 말해주는 측정기에 해당한다. 외적인 것을 제거하면 갑자기 차이가 사라져버릴 테니까 말이다. 정체성은 분명 내적인 특성이다.

정체성 연구가 힘든 것도 어느 정도는 이런 이유 탓이다. 우리는 이런 차이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 한다. 그래서 유전학과 뇌과학으로 인간을 속속들이 설명하려드는 요즘 같은 시대에는 이를 통해 정체성의 본질 역시 발견할 수 있다고들 생각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잊고 있지만 놀랍게도 우리는 이미 이런 과오를 범한 바 있다. 20세기의 두개골 측정법은 두개골의 부피와 내용물을 측정하여 인종과 정체성을 확연히 구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물론 요즘엔 그런 말만 들어도 질겁하여 도망치기 바쁘다. 그것이 파시즘의 역사와 관련이 깊고 실제로 나치 학자들이 이런 개념을 근거로 인종을 구분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어찌 되었건 정체성이 우리의 내면 어딘가에 있다는 확신은 여전하다.

내 생각은 전혀 다르다. 정체성이 무엇으로 이뤄졌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다른 입구를 찾아야 한다. 유전자나 뇌세포의 영원한 심연에서 헤맬 것이 아니라, 이런 정체성의 거울로 이용되는 외부 세계의 다양한 스크린으로 주의를 돌려야 한다. 그러므로 일단은 이렇게 묻는 것이 좋을 듯하다. ‘시간을 초월한 정체성이 있는가?’

정체성은 동일시와 분리라는
양극단의 긴장지대에서 만들어진다

그노티 세아우톤(Gnothi seauton), “너 자신을 알라!” 신탁을 전하는 여사제 피티아가 사는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에는 이런 글귀가 쓰여 있다. 그 이래로 우리는 쉬지 않고 자신의 자아를 찾고 있다. 물론 옛날의 여사제와 예언가는 이제 심리학자에게, 최근 들어서는 뇌과학자들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하지만 이들 학자의 대답 역시 전혀 만족스럽지 않다. 우리의 정체성 탐색은 이상한 역설이다.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아’가 항상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라고 확신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자아 뒤편에 ‘실제로’ 누가 숨어 있는지 알아내려고 다른 사람들, 주로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구하고 있으니 말이다.

변치 않는 자아가 있다는 가정은 극도로 의문스럽다. 그렇기에 자아를 찾는 우리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당연히 납득이 된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안 깊숙이 숨어 있는 불변의 골수가 아니다. 정체성은 외부 세계가 우리의 몸에 새겨 넣은 관념의 집합이다. 정체성은 하나의 구조이며, 이런 사실은 과학 실험과 상당히 유사한 방법으로 입증할 수 있다. 그 방법은 바로 입양이다.1) 인도 라자스탄에서 태어난 여아를 제네바나 암스테르담으로 데려가 키우면 이 아이는 제네바 사람이나 암스테르담 사람의 정체성을 갖게 된다. 같은 아기를 파리에 사는 프랑스 부모가 데려가 키우면 파리 사람으로 자랄 것이다. 훗날 그녀가 성인이 되어 소위 자신의 뿌리를 찾아 고향으로 간다면 엄청난 실망을 맛볼 것이다. 애당초 뿌리란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향에서 다른 제네바나 암스테르담 여성들보다 더 이방인의 느낌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외모(피부색이나 머리색)가 인도 사람들과 비슷하므로 내면도 유사하리라 예상하지만 그렇지 않기 때문에 더욱 이방인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이렇듯 심리적 정체성의 특징은 외부 세계의 영향을 받는다. ‘내’가 다른 문화권의 부모 밑에서 성장할 경우 전혀 다른 ‘나’를 갖게 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존재보다 성장과 더 밀접한 관련이 있고, 성장은 탄생하는 순간부터 시작된다. 탄생과 더불어 주목할 만한 과정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런 과정은 전 세계적으로 관찰되며, 유전적인 근거를 갖는다. 예전에는 이를 두고 ‘동일시(identification)’라고 불렀지만, 거울 뉴런이 발견된 이후엔 ‘미러링(mirroring)’, 즉 거울반응2)이라 부른다. 이 과정의 초기 단계는 누구나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아기가 (기저귀가 젖어서) 울면 마법처럼 엄마가 아기의 시야로 들어와 아기를 달래면서 여러 번 아주 또렷하게 “기저귀가 축축해?”라고 말한다. 이때 엄마의 말은 그에 어울리는 표정 연기를 동반한다.3) 이 단순하지만 몇백 가지 버전으로 반복되는 상호작용의 의미는 엄청나다. 우리가 무엇을 느끼는지, 넓은 의미에서 우리가 누구인지를 배울 수 있는 것은 타인이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우리는 타인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해줄 거라는 나름의 관념을 키워나간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무엇보다 이런 관념과 작별을 고한다는 뜻이다. 물론 어른이 된 후에도 통증을 느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엄마를 부른다. 가장 오래된 공포가 분리의 공포, 타인이 궁지에 빠진 우리를 모른 척하고 내버려둘지도 모른다는 공포이며, 가장 오래된 형벌이 추방, 집단에서 배척당하고 외면당하여 구석에 처박히는 것(추방의 교육학적 선례)인데 이 역시 우연이 아니다.

부모와 아이가 주고받는 메시지의 내용은 이내 단순히 배가 고프다, 기저귀가 젖었다 등의 수준을 넘어선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는 쉬지 않고 우리가 무얼 느끼는지, 왜 그렇게 느끼는지, 그 느낌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듣게 된다. 늘 착하다, 못됐다, 예쁘다, 못생겼다, 할머니 닮아서 머리가 나쁘다, 아빠 닮아서 똑똑하다 같은 소리를 듣는다. 또 우리의 몸과 타인의 몸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가만히 있어라, 밖에 나가서 놀아라, 동생 괴롭히지 마라, 피어싱은 안 된다, 아직 어려서 섹스는 안 된다.)를 가르쳐주는 말도 들려온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이고, 우리여야 하고, 우리여서는 안 되는 인간의 정의를 낳는다. 이때의 출발점은 항상 몸이다. 타인(예를 들어 부모와 사회)이 다양한 의미의 층위들로 장식하는 우리의 몸이다.

하지만 정체성 발달이 이 과정에 국한된다면, 우리는 환경이 결정해주는 대로만 성장할 것이며 환경에 대해서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하는 존재가 된다. 당연히 이는 사실이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항상 타인과의 일치와 구분이라는 양극단의 균형 지점에서 형성된다. 처음부터 그렇다. 동일시 및 거울반응과 나란히 또 하나의 과정이 진행된다. 바로 자율성, 타인과 구분하기, 분리를 향한 노력의 과정이다.

전자의 경우 우리는 타인의 메시지를 넘겨받는다. 긍정적인 메시지(넌 참을성이 참 많아!)건 부정적인 메시지(넌 너무 느려!)건 그대로 넘겨받아 우리 정체성의 일부로 삼는다. 다시 말해 타인의 메시지와 하나가 된다. 정체성(identity)과 동일시(identification)는 어원이 같다. 둘 다 ‘동일하다’라는 뜻의 라틴어 이뎀(idem)에서 나왔다.

후자의 경우 이런 메시지를 완벽하게 거부하고 싶은 욕망 혹은 분리되어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욕망과 관련이 있으며 종종 격한 저항을 동반한다. 이 과정의 다른 특징은 전형적인 공포에서 나타난다. 타인이 우리에게 너무 가까이 다가온 듯한 공포, 타인이 거의 우리 피부 아래로 들어와 내 자리를 대신할 듯한 공포이다. 이 공포를 우리는 (‘뚫고 들어온다’는 의미의) 침입(intrusion)의 공포라고 부른다. 동시에 이는 우리가 최대한 타인과 가까워지고자 했던 원래의 분리불안이 전도된 것이다.

분리 및 이와 결합된 자율성에 대한 추구는 동일시 못지않게 우리의 정체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런 거리두기를 통해 우리가 ‘혼동할 수 없는 독자적인’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는 아주 어릴 때부터 시작된다.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소위 ‘반항기’를 다 겪어보았을 것이다. “아니야! 난 싫어!”라는 반항의 외침에서 ‘나’와 ‘아니’라는 두 단어가 동시에 발견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춘기가 되면 넘치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다시 한번 반항기가 찾아오고, 청소년기의 반항은 독립의 망상(내가 결정할 거야!)을 동반하지만 결국 자아를 형성하는 대안적인 내용, 즉 다른 동일시를 선택하는 쪽으로 흘러갈 뿐이다. 정체성은 항상 일치와 분리의 상호작용이 낳은 일시적인 결과물이다.

주변 세상이 우리에게 들이미는 거울은 우리가 누가 될 것인지를 결정한다. 물론 이 역시 저절로 일어나는 과정은 아니다. 이 관계는 타인이 우리를 보고 싶어 할 때만 제 기능을 발휘한다. 철학자 프리드리히 헤겔 (Friedrich Hegel)은 자의식의 기초가 타인의 시선에 있다고 말했는데 이 역시 우연은 아닌 것이다. 통제의 시선이건 사랑의 시선이건 타인의 시선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한다. “아무도 날 존중해주지 않아.”라는 말은 곧 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이런 맥락에서 ‘존중’은 매우 중요하다. ‘존중하다(respect)’라는 단어는 어원으로 볼 때 ‘거듭 새롭게 보고, 보여진다’는 의미의 리스피케레(re-spicere)에서 왔다. 사랑의 시선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발을 딛고 설 땅이 없다. 자신을 쌓아갈 수 있는 토대가 없는 것이다. 반대로 사랑의 시선을 받고 자란 아이는 안정된 개인으로 자라날 수 있다.

우리가 말과 이미지를 받아들일 때는 아무 이유 없이 그러지 않는다. 결국엔 사랑과 증오가 혼합되어 있는 특정 관계를 통해 우리는 말과 이미지를 넘겨받는다. 프로이트는 사랑과 증오가 얼마나 긴밀히 얽혀 있는지를 지적한 바 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과 하나가 되고 싶어 하지만(널 깨물어주고 싶어!) 동시에 상대에게 싫증을 낼 때도 많다. 그럴 때면 상대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할 뿐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아예 거부한다.(네가 역겨워!)

이 지점에서 나는 기본 방향을 다시 확인한다. 아마도 모든 생명체의 특징일 것이다. 우리는 전체에 소속되려 하면서 동시에 독립적이고자 한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 철학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는 끝없는 합일과 분리의 원인이 되는 두 가지 자연력을 거론한 바 있다. 바로 필리아(philia, 사랑)와 네이코스(neikos, 다툼)이다. 프로이트는 이를 두 가지 원초적 충동으로 보았다. 사랑으로 하나가 되려는 에로스(Eros)와 공격적으로 분리되고자 하는 타나토스(Thanatos), 즉 동일성과 차이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뇌가 아니다

후자의 성향, 즉 자율성은 특히 오늘날 모든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서 확인하려는, 아니 반드시 확인해야만 하는 특징이다. 종속은 유약함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는 자기 자리를 주장해야 하고 자기 목소리를 높여야 하며 자기 뜻을 관철해야 한다. 강연을 하다가 ‘정체성과 거울반응’이라는 대목에 이르면 즉각 비판이 날아든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나이지 않습니까? 똑같은 교육을 받고 자랐어도 나는 내 동생과 다릅니다. 같은 문화권에서 성장한 동료와도 완전히 다릅니다. 왜 그럴까요? 유전은, 유전자는 어떻게 된 겁니까? 왜 그에 대해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나요? 우리가 누구인지는 우리의 뇌가 결정하지 않나요?

이 두 가지 논리(‘나는 유일한 존재이며 스스로 결정을 내린다.’와 ‘내가 누구인지는 뇌와 유전자가 결정한다.’)가 서로 모순된다는 사실은 잠시 접어두자. 요즘 사람들은 유전자와 뇌가 거의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우리 자신의 특성까지 결정한다고 확신한다. 인간의 뇌가 호모사피엔스의 본질을 구성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 뇌의 가장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소위 신경 가소성(plasticity)이다. 즉 우리에겐 특정 요인의 영향을 받으면 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이 특징이야말로 인간 종의 성공을 설명하는 근거가 된다. 어떤 사람을 아무 장소에나 갖다 두어보라. 어디든 상관없다. 아마 뛰어난 적응력을 발휘하여 잘 헤쳐나갈 것이다. 뇌 연구의 결과에 따르면 태어나는 순간 인간의 뇌는 아직 신경학적인 관점에서 완벽하지 않다. 따라서 차후 전반적인 발달 과정을 거쳐야만 하며 이 과정에서 주변 환경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를 심리적 정체성에 적용해보면, 정체성(소프트웨어) 형성 과정을 결정하는 특정 조직(하드웨어)을 우리 뇌가 갖고 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거울 뉴런이 없다면 정체성도 없다. 하지만 무엇이 거울에 비칠 것인가는 환경이 결정한다. 출생 이후 뇌의 물질적 발전에도 환경은 큰 영향을 미친다. 이렇듯 우리의 정체성 형성에는 회색세포가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그 내용은 외부 세계가 채워나간다.

그러니 유일하게 정확한 학문적 결론은 이것이다. 우리는 뇌(조금 더 넓게 보아 유전자, 신경, 호르몬의 기초)와 우리 환경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이 낳은 결과이다. 탄생 직후에는 소위 본성(nuture)과 양육(nurture)을 구분할 수 없다. 하지만 외부 세계 요인의 영향은 심지어 뇌구조까지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뇌다.’라는 주장은 더 이상 그리 설득력 있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신체와 주변 환경의 상호작용이 낳은 결과’인 것이다.

예전 책에서 나는 ‘모든 것’을 오로지 물리적 요인의 탓으로, 1차적으로 뇌와 유전자의 탓으로 돌리는 작금의 경향에 대해 이야기한 바 있다. 이런 주장은 그릇된 길로 접어든 사람이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일탈 행동의 면죄부로 들이밀면서 뱉어대는 값싼 변명에 불과하다. 물론 그런 변명이 문제를 단순화하기는 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새로이 떠오르는 의문을 막지는 못한다. 왜 오늘날 우리는 예전보다 더 간절히 면죄부를 바라는 걸까? 왜 우리는 뭐가 잘못되면 곧바로 피고석에 앉은 기분이 들까?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자.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인간이라는 신화, 이 현대적인 신화와 여기에서 기인하는 막중한 책임을 다루면서 함께 살펴볼 테니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뇌다.’라는 문장은 절대로 외부 영향력을 배제하지 않는다. 그럼 유전자는 어떻게 되나? 환경은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설사 미친다 해도 최소한 몇백 년이 걸리는 진화의 시간 차원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이와 관련된 과학적 관념 역시 일반인들의 생각보다는 훨씬 다채롭다. 외부 요인은 유전자에 영향을 미칠(유전자를 ‘발현’할) 수도 있다. 더구나 유전자와 행동의 관계는 극도로 복잡하다. 신문에서 유전자 연구에 관한 열광적인 뉴스(“자폐증의 유전적 원인을 마침내 발견하다!”)를 읽을 때면 사람들은 직선적 관계를 떠올린다. 하나의 유전자가 갈색 눈을 만들고 그다음 유전자가 금발을 만들고 세 번째 유전자가 조현병을 일으킨다는 식으로 말이다. 뭐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특히 눈동자 색깔처럼 복잡한 현상에서 많건 적건 직선적 인과성을 찾는 것은 그야말로 헛수고다.

지금 우리의 지식 수준에 따르면, 정신질환 중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조현병의 경우 하나의 유전 요인이 존재하지만, 이 요인은 최소 열 개의 유전자가 결합하여 만들어진다. 이 유전자들이 결합할 경우 중증 정신질환에 걸릴 위험이 15~20퍼센트 높아지는 것이다. 하지만 나머지는 환경의 영향이며 가장 중요한 환경 요인 중 하나는 대도시에서 태어나 자라는 것이다.

이를 정체성에 적용해보면, 유전자는 소프트웨어의 가능성을(소프트웨어의 특수한 내용과는 상관없이) 조절하고 제한하는 우리의 하드웨어라고 볼 수 있다. 정체성과 관련된 유전자 하드웨어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분명 인간의 특징인 언어 능력일 것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 확실히 언어 능력을 타고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과 주고받는 상호 행동이 없으면 아기는 언어 능력을 발달시킬 수 없다. 어떤 언어를 배우는가도 환경에 달려 있다. 나아가 이 언어를 전달하는 가족의 영향력도 크다. 이 모든 것이 우리의 사고에는 물론 자아상에도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유럽어가 아닌 언어 중에는 ‘개인’이나 ‘인격’이라는 말이 아예 없는 경우가 많다. 아마 그런 언어권에서 성장하며 정체성을 구축한 사람은 그런 언어가 있는 언어권에서 자란 사람과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일 것이다.

이렇듯 두뇌와 유전자는 하드웨어를 제공하며 소프트웨어 프로그래밍의 한계선을 설정한다. 특정 지점에서 하드웨어에 영향을 미치고 이를 변화시키는 데 성공한 소프트웨어라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고유한 것은 없는가? 아기는 정말로 아무것도 쓰이지 않은 백지(tabula rasa)일까? 환경이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흰 종이인 걸까? 그렇지 않다. 아이를 키워본 부모라면 다 느껴보았을 것이다. 신생아를 자주 접해본 사람이라면 모든 아기에겐 처음부터 ‘무언가’ 유일무이한, 쉽게 파악할 수 없는 것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잘 알 것이다. 초롱초롱한 눈빛, 잠깐 불타오르는 관심, 상호작용에 대한 명확한 요구…… 앞서 두뇌와 유전자의 관계를 설명할 때 이미 말했듯 이 ‘무언가’는 내용보다는 특정한 방향(밖으로 혹은 안으로), 특정한 형식적 절차(빠르게 혹은 느리게, 끈질기게 혹은 느긋하게)와 더 관련이 깊다. 그에 대한 부모의 반응(“너는 왜 그렇게 고집 불통이냐. 제 고집대로만 하려고 해. 가만히 좀 있어!” 혹은 “할머니 닮아서 화끈하구나. 넌 꼭 성공할 거야!”)은 부모의 입에서 자주 튀어나오는 옛날이야기(“우리 딸은 태어나자마자 우리를 한 번 보더니 온 방 안을 살피는 거야. 세상을 다 구경하려는 것처럼 말이야. 하긴 요즘도 그렇지만.”)와 함께 아이의 발전 방향을 계속 고무한다. 아이가 갖고 태어나는 이런 독자적인 요소들은 파악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존재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또 그에 반응하는 주변 환경의 방식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로써 우리는 정체성의 개인적인 측면에 도달했다. 실제로 우리는 유일무이한 존재다. 우리는 부모와 환경이 우리에게 전달한 요소들의 유례없는 결합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한 부모에게 여러 명의 자식이 있어도 자식에 따라 각기 다른 반응을 보인다. 거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아이가 첫째냐 막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부모가 직업이 있느냐에 따라서도 아이에게 보내는 관심의 정도가 달라진다. 부모의 금실 역시 큰 영향을 미친다. 또 같은 가정에서 자란다고 해서 모든 아이가 똑같은 ‘거울반응’을 경험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뼈아픈 소리지만 부모는 모든 자식을 똑같이 사랑하지 않고 아이들은 예민한 감각으로 이를 알아차린다. 이 역시 아이의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친다. 마지막으로 아이 자체의 유일함도 한몫한다. 앞에서 말한 대로 파악할 수 없는 핵심 특성 이외에도 모든 아이는 동일시와 분리의 상호작용 속에서 스스로 내린 결정의 영향을 받는다. 이 결정이 다른 결정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다시 다른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식으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유일무이하다. 다양한 거울반응을 경험했고 이에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모두 동일하다. 특정 집단과 특정 문화 내의 거울반응은 늘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가족 서사와 민족 서사

면접이나 평가 면담에서 자신의 장점과 약점을 말해보라는 질문을 받으면(“자신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를 말해보세요.”) 누구나 면접관이나 상사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대답이 무엇인지 고민할 것이다.(“저는 무슨 일에든 열정적이며 마음이 넓고 협조를 잘 하며 유연하고 자기평가에 객관적입니다.”) 그러나 모든 대답에는 심리적 특성과 사회적 요인(가족, 고향, 국가, 직업, 운동, 정치적 견해 등)이 결합되어 있을 것이다. 심리적 특성은 근본적으로 항상 신체, 정서, 충동과 연관된다. 그리스에서 태어난 로마 시대 의사 클라우디오스 갈레노스(Claudios Galenos)는 인간의 기질을 네 가지 체액으로 설명했다. 그의 사상은 지금도 우리의 사고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갈레노스에 따르면 황담즙이 너무 많아 담즙질이면 자제력이 없어 화를 잘 내며, 피가 너무 많아 다혈질이면 성격이 불같고 에너지가 넘치며, 점액이 너무 많아 점액질이면 느리고 감정이 없으며 흑담즙이 너무 많아 우울질이면 염세적이고 침울하다. 당연히 이런 개인적 특성은 타인과 맺는 관계에도 영향을 미쳐서, 고집이 세거나 얌전하거나 반항적이거나 인정머리 없는 행동과 태도를 낳는다.

더 자세히 관찰해보면 우리는 자신의 신체와 타인의 신체 사이를 이리저리 오간다. 우리의 신체는 자극들을, 기분 좋은 자극과 고통스러운 자극을 발송하고, 타인은 우리가 이 자극들에 어떻게 대처할지 알려준다. 이 많은 자극 중 다수(섹스나 공격성 등)가 타인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는 아기 단계에서부터 시작된다. 엄마 혹은 부모는 말을 하고 잘못을 바로잡아주는 최초의 거울이다. 신생아의 정체성은 태어나기 전부터 쉬지 않고 온갖 메시지들을 발송하는 엄마의 환상과 공포를 발판으로 커간다. 태동을 자주 느끼는 임신 7개월의 여성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일 수 있다. “이거 힘이 장난이 아닌데. 대단한 축구 선수가 태어나려나!” 이렇게 말할 수도 있지만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일 수도 있다. “정말 별난 녀석인가 보네. 한시도 가만히 안 있겠어. 엄마를 얼마나 힘들게 하려고 이래.” 아이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엄마는 아이의 다른 행동들에도 같은 반응을 보일 테고, 이를 통해 아이의 정체성과 자아상에 큰 영향을 미칠 것이다.

물론 그런 식의 메시지들 역시 진공 상태에서 나오는 것은 아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쏟아붓는 기대는 다시금 지극히 특정한 거울, 즉 그들의 가족이나 문화와 관련이 깊다. 첫째로 신화적 형태를 띠는 가족의 역사와 관련된다. 프로이트는 이런 맥락에서 ‘가족 로맨스’(보잘것없는 부모를 둔 어린아이들이 신분이 높은 인물들이 친부모이기를 꿈꾸는 신경증적 현상으로 현실의 부모를 상상의 부모로 대체함으로써 부모에게 복수하고 동시에 자신의 지위까지 향상시키려는 심리이다.—옮긴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할머니, 증조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란다. 가족의 비밀이기에 아무에게나 발설하지 않는 그들의 성공담과 실패담을 들으면서 자란다.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될 뿐 아니라 앞으로 어떤 기대에 부응하고 어떤 과제를 해결해나가야 하는지도 알게 된다. 나아가 훗날 자식들에게 그 이야기를 전해줄 조상의 대열에서 한 자리를 배정받는다. 아이들은 이런 이야기에 매우 집착한다. 아주 어릴 때부터 가족과 세대를 이해하려고 애를 쓴다. “그래, 외할머니는 엄마의 엄마야. 나도 엄마가 있어. 알지? 그리고 이모는 엄마의 여동생이야. 너도 여동생이 있잖아.” 아이들은 이런 관계를 정확하게 알고 싶어 한다. 부모나 조부모가 가족 앨범을 꺼내서 이야기를 시작하면 모든 아이가 귀를 쫑긋 세운다. 아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조상 연구는 어른들도 좋아하는 인기 과목이다. 우리는 이를 ‘정체성 연구’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가족사는 더 광범위한 문화와 역사의 일부이다. 우리 정체성의 내용과 형식을 더 상세히 결정하는 문화의 일부인 것이다. 형식적인 측면은 신체와 관련이 있다. 3세대 전만 해도 남자가(여자는 드물었다.) 맥주를 손에 들고 입에 담배를 문 채 자전거 경주나 축구 경기를 보는 것을 스포티하다고 생각했다. 요즘은 모두가 헬스클럽으로 달려간다. 남자들은 영원한 젊음을 위해, 여자들은 가슴은 크지만 거식증 환자처럼 보이기 위해. 안정된 일자리가 드물던 옛날에는 공무원이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러다 호경기를 누리던 몇십 년 전에는 모두가 따분한 공무원보다 다이내믹한 대기업을 선호했지만, 사회가 불안정해지면서 다시 공무원이 상한가를 치고 있다. 이렇듯 우리의 외면, 내적 경험, 태도 등은 우리가 수신하는 메시지들에 의해 결정된다.

우리 가족의 역사와 관념, 우리가 속한 사회계층, 우리 가정의 문화, 이 모든 것이 합쳐져 상징 질서를 형성한다. 더 큰 집단이 공유하는 서사적 전체의 상위개념으로서 거대서사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서사에서 어느 정도 공통된 정체성이 탄생한다. 어느 정도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집단의 크기 차이(가족, 고향, 지역, 국가 등) 역시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출발점은 항상 ‘진짜’ 사건이다. 그것이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모호해지고 점차 신화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네덜란드의 정체성은 로마에 저항한 바타비아 사람들에게로 거슬러 올라가며, 플랑드르인의 정체성은 1302년 프랑스 귀족들을 무찌른 도시 길드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두 사건은 역사적으로 입증된 바 없는 낭만적 상상의 결과물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야말로 우리의 정체성에 광채를 더하는 이야기다.

이것들이 커다란 의미가 있는 이유는 서로 공유하는 서사가 우리에게 실존적 문제의 해답을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남자, ‘진정한’ 여자란 무엇인가? 완벽한 남녀 관계는 어떤 모습일까? 출세란 무엇이고, 부모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이때 남녀는 얼마나 다른가? 권위자에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신체, 섹스와 질병, 죽음을 대하는 자세는 어떠해야 하나? 모든 질문이 실존적이지만 확정된 대답은 없다. 이 대답에 접근하기 위해 우리는 이른바 ‘상징 질서’, ‘서사적 전체’에 의지한다. 때로는 서로 모순되는 나름의 대답을 내놓는 종교와 예술, 학문 역시 이에 포함된다.

여러 가지 대답, 때로 매우 다양한 대답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동시에 정체성도 다양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진짜 함부르크 사람이나 진짜 뮌헨 사람은 뭄바이나 도쿄 사람과 완전히 다르다. 하지만 같은 곳에서 자라는 청소년이라 해도 어떤 환경, 어떤 사회계층에서 성장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대답을 들을 테고 다른 정체성을 키울 것이다. 물론 이 말은, 특정한 시점까지는 자기 정체성을 (다른 대답을 들려주는 다른 이야기에 기초한) 다른 내용들로 채울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 문화가 풍성할수록 선택할 수 있는 대답도 더 풍성하고 당연히 정체성도 더 다양할 것이다.

자존감과 자기혐오

정체성을 획득하는 방식(타인과 동일시하거나 구분하기)을 통해 이상해 보이는 몇 가지 경험을 이해할 수 있다. 그중 첫 번째 경험은 가끔씩 찾아드는 이런 기분이다. 이것이 정말로 ‘나’일까? 나는 ‘진짜’인가? 나는 ‘나’와 일치하는가? 자기 소외를 느끼는 경우 실제로 외부 요인이 나의 자아를 결정한다는 인식이 신호를 보낸다. 시인 아르튀르 랭보(Arthur Rimbaud)는 이렇게 표현했다. “나는 타자다.(Je est un autre.)” 내면이 갈가리 찢긴 느낌에 빠지고 자신을 모순덩어리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생각했다가 저렇게도 생각하고, 그러다가 또 전혀 다른 짓을 한다. 정체성을 형성하는 메시지들이 여러 곳에서 올 경우 어쩔 수 없이 조각들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 퍼즐이 만들어질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자기 자신’과 멋진 대화도 나눌 수 있다. 나에게 화가 날 수도 있고 나에게 만족할 수도 있으며, 나로 인해 슬플 수도 있다. 이때 ‘나’를 평가하는 나는 내가 평가하는 ‘나’와는 다른 정체성에서 생긴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한 긍정적 혹은 부정적 평가가 오래 지속될 수도 있다. 자기 증오나 자기애, 낮은 자존감이나 높은 자존감 등이 찾아올 수 있는 것이다. ‘자기’ 혹은 ‘자아’와 결합된 모든 단어는 우리 ‘자신’의 본질적인, 그러니까 타고난 특성이 중요하다는 분위기를 풍긴다. “그 남자는 자존감이 높아서 꿋꿋하게 잘 살아.” “하지만 그의 아내는 자존감이 너무 낮아. 어쩔 수가 없어. 늘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 역시 다른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고 우리의 행동을 해석하는 방식으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타인이 결정한다. 자신감, 자존감 같은 특징의 발전을 되짚어보면 원래는 그것이 ‘타인의 신뢰’, ‘타인의 존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어린 시절 타인에게서 받았던 신뢰와 존중의 정도는 성인이 된 우리의 자신감, 자존감에 반영된다. 또 타인을 대하는 나의 행동도 결정한다. 정체성이 형성되는 동안 내가 배웠던 꼭 그만큼만 나는 자신감이 있고 타인을 신뢰할 테고,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면 불안하고 당황스럽고, 남들이 나한테 화가 나 있다고, 나한테서는 건질 게 하나도 없다고 확신한 나머지 있지도 않은 위험으로부터 미리 도망을 칠 것이다. 전문 용어로 그런 태도를 사회공포증이라 부른다.

인간관계에서 우리는 이성이나 권위자 같은 특정인에게 더 큰 의미를 부여한다. 이성은 자신의 성 정체성(gender identity)의 내용을 정의하려면 반드시 필요한 반대의 성이다. 나의 남성성은 여성성을 어떻게 인식했느냐에 달려 있다. 여자는 나를 유혹하려 드는 악의 원천이라고 생각한다면, 여자를 오직 욕망과 맞서 싸우는 도구로 생각하는 불안하고 엄격한 남자가 될 것이다. 여자가 부드럽고 보살펴주지만 나를 지배하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늘 독립을 갈망하는 마마보이가 될 것이다. 이런 사실은 남자와 여자의 본성을 정의하려는 모든 노력이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입증한다. 대부분 그런 노력은 특정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기에, 그저 선입견에 불과하다. 여자는 멍청하고 약하며 남자는 똑똑하고 강하다. 그러니 여자는 대학에 갈 필요가 없고 지도자 자리에 오를 수 없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남녀의 정의가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판단은 내가 지속적인 관계를 맺는 두 번째로 중요한 타인, 즉 권위자로서의 타인과 관련이 있다. 우리가 권위자에게 취하는 태도는 우리 정체성의 중요한 구성 요인이다. 권위자에게 비판적이고 반항적인가? 순종적이고 협조적인가? 불안을 느끼는가? 아니면 공격적이고 경쟁적인가? 이 역시 최초의 권위자인 부모와 맺는 관계를 통해 습득한 것들이다. 전통적으로 권위자라고 하면 아버지를 떠올리지만 현실에서는 어머니가 발언권을 가지는 경우가 더 흔하다. 인간은 신이 이끌어주신다고 생각한다. 혹은 더 산문적으로 표현해 여성의 의지가 신의 뜻이다.(Ce que femme vent, Dieu le veut.) 이런 이중적 해석은 전형적인 사회체제, 즉 가부장제와 부합한다. 가부장제에서는 남자가 신과 왕의 대리인으로서 자기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을 인정받는다. 하지만 악영향도 없지 않다. 위압적인 아버지의 자식들은 평생 권위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자식을 학대하는 아버지는 어떤 형태의 권위도 의심스럽게 만드는 법이다.

이성 및 권위자와 맺는 관계는 서로 밀접한 관련이 있는 우리 정체성의 두 가지 중요한 차원을 형성한다. 권위자인 타인은 내가 나의 몸과 이성의 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쾌락에 이르는 어떤 행위는 허락되며 어떤 행위는 허락되지 않는지를 나에게 말해준다. 발리우드(Bollywood: 봄베이(현재의 뭄바이)와 할리우드의 합성어로 대개 인도의 영화산업을 이르는 말이다.—옮긴이) 영화에선 키스가 금지돼 있다. 유럽에서 여성이 여러 명의 애인과 동시에 사귀면 욕을 먹지만 남자가 여러 명의 여자 친구를 거느리면 능력자 취급을 받는다. 이런 사실은 규범과 가치에 대한 논쟁으로 우리를 이끄는 동시에 이에 대한 우리의 확신이 정체성의 고정 메뉴라는 사실을 가르쳐준다. 프로이트의 용어를 빌리면 자아 및 초자아(즉 양심)인 것이다.

우리가 습득하거나 습득하지 않은 규범들

정체성은 타인들이 우리의 몸에 새겨 넣은 특성들의 집합으로, 대개 우리의 출신과 운명에 관한 견해들의 총체이다. 이는 동시에 우리가 우리 몸, 이성의 몸, 그리고 권위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도 정해준다. 몸은 외적인 것, 음식과 섹스, 고통과 질병, 죽음을 대변한다. 식사는 식탁에서 사람들과 함께 하는가? 아니면 혼자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보면서 하는가? 식사 시간을 잘 지키나? 아니면 하루 종일 시도 때도 없이 먹어대는가? 섹스는? 누구랑 하나? 혼자서? 다른 사람하고? 다른 사람 누구? 몇 살 때부터? 열 살짜리,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섹스를 강요하는 것이 정상인가? 병이 났을 때는 어떻게 하나? 통증을 느낄 때는? 이를 악물고 참나? 곧바로 약부터 입에 털어 넣나? 얼마나 아파야 노동 능력이 없다는 판정을 내릴 수 있을까? 의료보험공단은 비용을 얼마나 부담해야 하나? 우리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나?

이런 질문에 어떤 대답을 내놓든 즉각 ‘너답다’, ‘전형적이다’라는 반응이 돌아올 것이다. 다시 말해 누군가의 대답은 그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고정 메뉴인 것이다. 졸장부인가? 무모한 도전자인가? 이상성욕증 환자인가? 쫀쫀한 소시민인가? 인생을 즐기는 한량인가? 금욕주의자인가? 그런 특성을 신중함, 정의감, 자제력, 지구력, 이웃 사랑과 같은 덕목이나 오만, 탐욕, 육욕, 질투, 욕망, 분노, 게으름 등의 죄악으로 평가하게 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이런 비교에서 끌어낸 결론은 놀랍다. 우리의 정체성은 개인의 특성들을 모아놓은 중립적인 단일체가 아니다.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가 습득하거나 습득하지 않은 규범 및 가치와 더 관련이 깊다. 규범과 가치관을 둘러싼 오늘날의 사회적 논란은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모든 정체성은 서로 연관된 이데올로기에서 발원한다. 나는 여기서 이 개념을 매우 넓게 사용할 것이다. 즉 인간관계 및 이를 규제하는 최고의 방법에 대한 각종 견해들의 전체로 볼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다른 이데올로기에 대한 반응이다. 그 결과 나름의 규범과 가치를 갖춘 “우리는 다른 서사에 반대한다.”가 탄생하고, 이는 ‘전형적인’ 사회주의자, ‘전형적인’ 가톨릭교도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그러므로 이데올로기 및 각자의 정체성이 다른 이유는 신체 및 타인을 대하는 ‘정상적’ 태도, ‘옳은’ 태도가 무엇이냐에 대한 견해가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질병과 죽음을 대하는 무신론자의 자세가 종교인의 자세와 다를 가능성은 매우 크다. 여기서는 일단 내용상의 차이는 제쳐두고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살펴보자.

신체를 대하는 태도는 항상 향락을 대하는 태도와 관련이 있다. 각 이데올로기는 향락의 규제와 관련된 규범과 가치는 물론이고, 관련 규칙의 준수 여부를 감시하는 엄격함에서도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유럽의 경우 음식에 대한 터부가 거의 없기 때문에 유대인들처럼 음식에 대한 규제가 심한 문화를 멸시한다. 하지만 바로 그런 도덕적 우월감 탓에 거의 모든 유럽 여성들이 평생 다이어트를 하고 그러다가 섭식장애를 겪는다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다. 또 우리는 담배와 벌인 전쟁에선 승리를 거두었지만 마약 전쟁에선 패배했다. 섹스 문제에선 보호 연령을 정하고 상호 합의를 원칙으로 삼는다. 하지만 동양의 어떤 나라에선 어린아이들에게도 결혼을 시키고 여성 할례가 지금도 은연중에 행해지고 있다. 우리는 여자와 남자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만 최대 인구를 자랑하고 경제 대국을 꿈꾸는 두 나라, 중국과 인도에서는 여전히 여성을 멸시하는 풍토가 만연해 있다.

물론 방식은 매우 다양하지만, 모든 이데올로기는 향락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규제한다. 나아가 모든 이데올로기엔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모두가 자신의 규정을 가장 바람직하다고 생각하고, 다른 이데올로기는 원시적이고 낡았고 타락했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공격성과 공포, 동일성과 차이의 균형

타인과 맺는 관계는 성별, 사회적 지위, 피부색, 옷차림 등 다양한 기준에 좌우된다. 이런 가시적인 차이는 다른 정체성, 다른 가치관, 다른 사회적 상황의 표현이다. 양복을 입은 30대 남자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같은 연령의 남성과는 다른 기대를 불러일으킨다. 이상하게도 동일성과 차이는 똑같이 공격적 태도를 부를 수 있다. 누군가 우리와 너무 닮았으면 우리는 거리를 두고 싶고 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