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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다카시

일본 메이지대학교 교수. 1960년에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출생했다. 도쿄대학교 법학부 및 동 대학원 교육학연구과 박사 과정을 거쳤고 교육학, 신체론, 커뮤니케이션론을 전공했다. 2001년 출간된 『신체감각을 되찾다』로 ‘신초 학예상’을 수상했고, 『소리 내어 읽고 싶은 일본어』는 250만 부 이상 판매되면서 마이니치 ‘출판문화상 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는 지식과 실용을 결합한 새로운 스타일의 글을 선보이면서 일본과 한국의 300만 독자를 사로잡았다. 또한 TV와 강연을 통해 대중과 끊임없이 소통하는 일본 최고의 교육전문가이자 CEO들의 멘토다.

사이토 다카시는 『혼자 있는 시간의 힘』에서 그의 인생을 완벽하게 바꾼 시간에 대해 말한다. 그는 대입에 실패한 열여덟 살부터 첫 직장을 얻은 서른두 살까지 철저히 혼자였다. 친구도, 직업도 없었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 동안 스스로를 냉정하게 들여다보고, 목표한 것을 현실로 이루기 위해 공부에 몰입했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지만 묵묵하게 쌓아온 내공이 지금의 그를 만든 것이다.

그는 꿈을 이루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누구에게나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혼자 있는 시간 동안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그 방법을 알려준다.

저서로는 『잡담이 능력이다』 『독서는 절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내가 공부하는 이유』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질문의 힘』 『고전 시작』 등 다수가 있다.


 

 

KODOKU NO CHIKARA by Takashi Saito

 

Copyright © Takashi Saito 2005

All rights reserved.

Original Japanese edition published by PARCO Publishing Co., Ltd. In 2005

Republished by SHINCHOSHA Publishing Co., Ltd. In 2010

Korean translation rights arranged with SHINCHOSHA Publishing Co., Ltd. Tokyo

through Japan UNI Agency, Inc., Tokyo and Korea Copyright Center Inc., Seoul

 

이 책은 ㈜한국저작권센터(KCC)를 통한 저작권자와의 독점계약으로 위즈덤하우스에서 출간되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 프롤로그 |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10년의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프롤로그

 

지금의 나를 만든 것은

10년의 혼자 있는 시간이었다

 

 

 

요즘 사람들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곁에 아는 사람이 없으면 불안해하는 ‘불안 증후군’이라는 증상이 생길 정도다.

친구가 없다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성격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한다. 그래서 친구 없이 지내는 게 두려워 굳이 사귀지 않아도 될 사람들과 계속 사귀는 일도 많다. 그게 편하다면 그 역시 삶의 한 방식이다. 하지만 마음은 계속 불편한데 ‘혼자’ 있는 것의 긍정적인 의미를 알지 못해서 원치 않는 사람들과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수많은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릴 적에 배운 ‘1학년이 되면’이라는 노래에는 “친구 100명이 생길까?”라는 가사가 나온다. 하지만 정말 친구가 100명이나 되면 어떨까. 오히려 견디기 힘들지 않을까. 그런데도 왜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할까.

아마 외로워질까 봐 그럴 것이다. 한겨울의 스산한 바람처럼 누구나 외로움을 싫어한다. 그래서 누군가와 자꾸 함께하려 한다.

공부가 힘든 이유 중 하나는 고독 속에서 혼자 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제집을 푸는 시간도, 책을 읽는 시간도 혼자서 견뎌야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잠깐의 시간도 견디지 못해서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좋아하는 음악을 틀어놓는다. 하지만 집중하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다.

특히 TV 방송 프로그램은 화면에 나오는 사람들이 친구처럼 느껴지도록 방송하기 때문에, 그것을 본 우리들은 “○○가 지난번에 이런 말을 했잖아” “△△△ 대단하지 않아?”라고 그들과 정말로 친한 것 같이 말하곤 한다. 그런 화제를 가까운 친구끼리 주고받다 보면 마치 그들과 한 무리가 된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켜 그 순간에는 외로움을 느끼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는 내면의 깊이가 생기지 않는다.

요즘의 무시무시한 명품에 대한 인기도 모두 모방 풍조가 강해져서 생긴 결과다. 남들이 갖고 싶어 하니까 나도 갖고 싶다는, 기업이 만들어낸 집단적 욕망인 ‘브랜드 전략’에 모두가 놀아나고 있다.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을 나만 안 가지고 있다는 소외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사고 보는 것이다. 점점 눈앞의 일에 급급해 ‘나는 누구인가’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물음과 마주하는 것에서 멀어지고 있다. 혼자 명품 가방을 보며 자기 성찰을 한다면 말리지는 않겠지만, 솔직히 내 눈에는 남들이 다 사는 물건을 사면서 마음의 허전함을 채우고 있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브랜드 제품을 매개로 다른 사람들과 연결돼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친한 친구와의 수다도 시간 낭비일 때가 많다. 물론 마음 맞는 친구와의 수다는 즐겁고,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 자체가 인생의 행복일 수 있다. 그 시간이 중요하다는 데에는 나도 이견이 없다. 하지만 수다를 떠는 동안 어떠한 성장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혼자 음악을 들으며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을 잘 활용하는 것이 아니다. 음악을 들을 때는 선율에 몸을 맡기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수동적인 행위다. 현대 뇌과학 연구에 따르면 음악을 듣고 있을 때 뇌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편안하게 보내자’ ‘자신을 치유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 혹은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키우는 시간을 좀 더 갖자고 말하고 싶다. 뇌를 뜨겁게 달아오르게 하는 지적인 생활이야말로 누구나 경험해야만 하는 ‘혼자 있는 시간’의 본질이다.

이러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혼자서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힘들고 어려울 때도 있다. 물론 혼자서 편안하고 밝게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다. 하지만 혼자 있는 시간은 그보다 좀 더 의미있게 보내야 한다.

나는 가능하면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시기에 자기를 위한 시간을 보내면서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을 받아들이고 경험해보았으면 한다. 친구와 떠들고 술집에서 신나게 젊음을 발산하는 것만으로는 성장할 수 없다.

이 책에서는 혼자 있는 시간에 관해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사실 이 시간을 잘 활용하면 더없는 창조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다.

혼자 있는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거기에서 인생의 갈림길이 나뉜다.


1 기회는 혼자 있는 순간에 온다


내 인생이 10년 만에 뒤바뀐 이유

내 인생이

10년 만에 뒤바뀐

이유

 

 

 

나는 지난 1년 동안 30권 이상의 책을 냈다. 그 외에도 강연과 수업, 방송 출연과 감수 등 나조차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많은 일을 하고 있다. 일이 많은 것이 매우 고맙기는 하지만 동시에 내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왜 10년 전에는 지금처럼 일이 많지 않았을까?’

지금 내가 주장하고 있는 낭독법이나 호흡법, 초등학생 대상의 학원 ‘사이토 메소드’에서 하고 있는 것들은 모두 10년 전에 완성되었다. 즉, 10년 전에도 나는 지금과 똑같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아니, 지금보다 더 에너지가 넘치고 머리 회전도 빨랐다. 그러나 그때 나를 찾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의 한이 지금의 나를 이렇게 빡빡하게 일하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을 할 수 없었던 시절에 대해서는 솔직히 떠올리고 싶지 않다. 지독하게 고독했다. 하지만 만일 그때의 이야기가 지금 고독에 몸부림치는 사람, 집단에서 뛰쳐나가고 싶지만 외로워질까 봐 주저하는 사람에게 격려가 된다면 나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대입에 실패한 열여덟 살부터 메이지대학에 직장을 얻은 서른두 살까지 10여 년간은 나에게 고독의 늪이었다. 나는 그 시기를 암흑의 10년이라고 부른다.

제1고독기는 재수 시절부터 대학 1, 2학년 때까지다. 젊을 때 혼자 사는 것을 동경하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북적대는 집안에서 자라서인지 도쿄에서 혼자 사는 게 전혀 즐겁지 않았다. 누워서 하숙집 천장을 바라보고 있으면 ‘우주 한구석에 나만 남겨진 듯한’ 을씨년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뿐 아니라 ‘재수 생활’이라는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인생을 내 마음대로 살 수도 없었고 공부만 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인생에 족쇄가 채워진 기분이었다.

재수생에게 대입 시험이란 올림픽이나 국제대회에 가깝다. 시험은 1년에 한 번, 단 하루에 1년 동안 쏟아부었던 노력이 평가된다. 현역 수험생이라면 몇 년 동안 쏟아온 힘을 그대로 발휘하면 되지만 재수생은 상대적으로 더 절박하다. 중요한 날이니 ‘컨디션이 좋지 않다’는 말로 합리화할 수도 없다.

서른을 넘기면 인생에서 1년 정도는 늦어도 상관없다고 대범하게 말할 수 있다. 지금의 나라면 ‘1년 늦은 것 정도야’ 하겠지만 10대 때 1년은 한없이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사실 고등학교 시절, 운동에 빠져 입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해서 재수를 했지만 그렇더라도 다시 1년을, 대입을 위해 허비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스스로 용납되지 않았다.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상황도 나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제2고독기인 직업을 찾던 시기에도 이때와 비슷한 고뇌를 맛보았다. 예를 들어 ‘○○대학의 학생이다’ ‘△△사의 사원이다’라고 하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얻는다. 하지만 대입에 실패한 나는 어디에도 발붙일 곳이 없었다. 학원생이었지만 아침잠이 많아 학원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제대로 소속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때는 뒤처진 시간이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증명하겠다는 집념이 무엇보다 강했던 것 같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현역으로 들어온 한 살 아래 학생들에게 반말을 듣고, 원래대로라면 동급생일 선배들에게 함부로 불리는 게 기분 나빠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에게는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엄청난 정신적 수행을 쌓았다는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다.

대학생의 필수 활동인 ‘서클’ 활동은 거의 증오했다. 서클은 원래 ‘원’이라는 의미이지만, 모두가 어깨를 감싸고 노래라도 불러야 할 것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너무 불편했다.

나는 위험 인물이었다.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고, 제대로 사귈 수 없다면 차라리 아무도 사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았고, 유일하게 친하게 지내는 친구 역시 나와 비슷한 부적응자였다.

책도 유행하는 베스트셀러는 절대 읽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대학에 들어간 무렵을 전후해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가 유행했지만 나는 그 작품을 읽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는 주인공을 통해 모두가 동경할 만한 고독이 표현되고 있지만, 그것은 내면의 큰 고민 없이 겉보기에만 그렇게 보이는 외적인 고독일 뿐 내가 경험한 내면적인 고독과는 느낌이 달랐다. 서른이 넘어 고독을 극복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할 생각으로 그 책을 읽었을 때는, 작품에 대한 공감과는 별개로 추억이 깊이 사무쳤다. 대학 시절, 지독했던 고독의 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젊은 혈기였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때의 고독은 지금의 나라면 틀림없이 경멸했을, 시답잖은 자존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식으로 나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 같은 고독 속을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모든 것에 한을 품었다. 되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에게도, 상황에도 적개심을 품었다.

‘이대로 끝나지 않아. 열 배, 스무 배로 복수해주겠어.’

그 시절을 지나면서 나는 혼자 있는 시간에 느끼는 고독감을 엄청난 에너지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혼자만의 시간이

항상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고독의 시간을 보내던 나는 평소에 거의 사람들과 말을 섞지 않았다. 아니, 말을 거는 사람이 없었다. 서점이나 목욕탕에서 가볍게 목례를 하고 식당에서 주문을 한다. “고맙습니다”라는 판에 박힌 인사말을 들으며 하루를 마감한다. 그런 외로움 속에서 나는 저절로 사람들과 멀어져 갔다.

돌이켜보면 그 무렵 읽었던 책이 지금도 내 인생의 책이다. 그 책들을 모아 보니 어둠 그 자체다. 유서 같은 것을 읽기 좋아했으니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어느 메이지인의 기억』이라는 아이즈 번사(藩士, 일본 무사의 한 종류)의 유언이나 『베토벤의 생애』『고흐의 편지』 외에도 밀레나 괴테와 같은 인물에 감정을 이입하여 탐독했다.

베토벤 교향곡 제5번 ‘운명’을 한껏 크게 틀어놓고 귀가 들리지 않게 된 베토벤과 나를 동일시하고, 고흐의 화집에 실려 있는 그의 자화상을 보며 고갱과 사이가 틀어져 귀까지 자른 그의 비통함에 빠져들었다.

어릴 적부터 신동으로 추앙받던 모차르트도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모차르트가 가진 재능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의 나는 넘치는 재능을 지닌 고독한 위인의 인생관이나 심리 세계에 심취했다. ‘아, 이 사람과는 통하는 데가 있구나’라고 하면서 정신적인 친구를 꽤 늘리고 있었다. 또 특출한 사람이 안고 있는 고독감이나 누구도 이해해주지 않아 생기는 외로움과 초조함을 아주 친근하게 느꼈다. 괴테 아저씨나 고흐 아저씨의 존재는 나의 유일한 등불이었다.

돌이켜보면 그때 내가 공감할 수 있었던 가장 현대적인 인물은 기껏해야 고바야시 히데오(일본의 평론가)였다. 당시의 나는 시대의 변화를 전혀 따라가지 못했고, 과거의 인물들에게만 몰두했다. 그러나 그런 행동은 나에게 사자(死者)와 교신하는 듯한, 마치 다른 사람과는 다른 시공을 살아가는 것 같은 신비로운 쾌감을 안겨주었다. 나는 고독의 암흑 속에서 한 줄기 빛을 향해 떠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또 한 사람, 사카구치 안고에 빠져들었다. 그는 『추락론』을 비롯한 활기차고 거침없는 에세이로 인기였지만, 나는 『돌의 생각』이나 『마의 퇴굴』 같이 깊은 고독에 대해 엮은 작품이 좋았다. 그는 불교에 심취하여 산스크리트어를 배우고 공부에 지나치게 빠져든 나머지 신경쇠약에 걸린다. 그렇게까지 극단적으로 고독을 추구했던 사람들에게 나는 동질감을 느꼈다.

어학에도 깊이 빠져들었다. 나는 수험 과목 중 영어에 자신이 있었지만, 시험 준비보다는 버트런드 러셀(영국의 논리학자, 철학자, 수학자)의 작품을 읽는 게 훨씬 좋았다. 시험 준비 측면에서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러셀의 작품을 영어로 읽을 때마다 ‘인생의 깊은 진리를 이렇게 매끄럽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니, 영어는 정말 아름다운 언어구나!’ 하고 희열을 느꼈다.

나는 당시 “오, 예스” “오브코스” 같은 의미가 옅은 공허한 영어 대화에는 반감을 가졌지만, 러셀의 아름다운 영문을 접하고 있으면 깊이 있는 인생이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아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영어 시험에 러셀의 글이 나오면 출처를 볼 것도 없이 ‘이 글은 러셀의 것’임을 바로 알아챘다. 또한 나만 알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한껏 기분이 고조되어 답안지를 앞에 두고 나도 모르게 쾌재를 불렀다.

재수 시절로부터 25년이 지났지만 신기하게도 그 무렵의 초조함이나 불안감에 대한 기억은 전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기는커녕 아직도 생생하다. 하지만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의욕을 뒷받침하고 있는 게 있다면 그것은 분명 그때 느꼈던 고독에 대한 기억이 아닐까.

지금은 정신적으로나 시간적으로 그렇게까지 나 자신을 고독으로 몰아넣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더욱 그 무렵 혼자였던 시간이 정말로 귀중한 시간이었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누구도 꿈을 대신 이뤄주지 않는다

누구도

꿈을 대신 이뤄주지

않는다

 

 

 

대학 3, 4학년부터 조금씩 인간관계가 풀리기 시작했지만 대학원에 들어가자 또다시 혼자가 되었다. 안타깝게도 대학원이 나와 전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일본의 교육을 바꾸고 싶다는 큰 뜻을 품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나와 너무도 달랐다. 나는 항상 날을 세우고 다녔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서 그것이 느껴졌다. 교수와도 잘 지내지 못했고, 매사에 의욕이 나지 않아 매일 뮤지컬 영화를 보러 다녔다. 왜 뮤지컬 영화였는지는 지금 생각해도 잘 모르겠다. 아마 조금이라도 기분이 좋아지고 싶어서가 아니었을까. 석사 논문도 2년 동안 거의 쓰지 못해 결국 논문을 전혀 쓰지 않는 대학원생이 되었다.

나는 대학원이라는 곳을 근본적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나에게 필요한 것은 일이었다. 그런데 일과 가장 먼 곳에 오게 된 것이었다. 항상 초조했고, 강의실에서 수업을 들어도 실력이 늘지 않아 더 초조해졌다.

그래서 어떻게 했을까.

틀어박혔다.

당시 도쿄대 교육학부에서는 아이들을 불러 수업할 수 있도록 강의실에 다다미를 깔았다. 그 다다미방은 가끔 세미나를 할 때 사용되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비어 있었다. 원래 대학원생에게는 개인 연구실이 주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다다미방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그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거의 불법 점거에 가까웠을 것이다. 아무리 대학원생이라고 해도 그토록 긴 시간을 그곳에서 머물기는 불가능했다. 아마 내가 다른 사람에게 나쁜 기운을 풍겼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다. 지금 생각하면 미안할 뿐이다. 나는 박사 과정에 들어가서도 매일 밤 11시까지 학교에 있었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면 정문이 이미 잠겨 담을 넘어 다녔다.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한곳에 있었는지 모르겠다. 담을 넘어 돌아가던 날들, 그동안 나는 쭉 다다미방에서 공부했다. 선잠이 드는 날은 셀 수 없이 많았고 일상의 대부분을 그곳에 해결했다. 그리고 그 이상 열심히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할 만큼 필사적으로 공부에 매달렸다.

그런 나를 이해해주는 사람은 없었다. 나를 이해해주지 않는 사람들과는 만나고 싶지 않았다. 사소한 대화는 물론 중요한 일이나 나만의 아이디어 같은 것도 절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아이디어를 도둑맞을지도 모른다는 속 좁은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야기를 하면 상대에게 에너지를 빼앗기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에는 진심이었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뭐든 말해버려서 큰일일 정도다.

그렇게 생각을 머릿속에 쌓는 것으로 정말 생산성이 올랐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박사 과정에 올라가고 나서는 논문을 눈에 띄게 많이 쓰기 시작했다. 물론 논문은 전혀 돈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외에는 할 일이 없었고 무모하게도 나는 이미 결혼한 몸이었다. 남자는 혼자일 때 대부분 성실하지 않지만 결혼을 하면 갑자기 운명을 짊어진 것 같은 각오가 생긴다.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나에게는 논문밖에 없었고, 논문을 하나의 직업처럼 차례차례 정리해갔다. 이것이 제2고독기의 추억이다.

제3고독기는 대학원생이라는 신분도 잃고 무직에 아이까지 있던 시절이다. 그 몇 년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참했다. 그 무렵 나와 술을 마셨던 사람들에게 상당한 폐를 끼쳤기 때문에 이 자리를 빌려 사과하고 싶다.

암흑의 10년은 유소년 시절부터 기분 내키는 대로 자유롭게 자랐던 내가 뜻하지 않게 빠져든 함정이었다. 이전에는 혼자 있으면서 고독을 경험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균형을 잃고 위태로웠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고독을 극복하면서 단독자임을 자각할 수 있었고, 오로지 혼자서만 도달할 수 있는 지점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등산하는 팀에서는 함께 있어도 모두가 단독자다. 누구도 산에 올려주지 않을 뿐 아니라 대신 올라가주지도 않는다.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 않지만, 정신적 등산에는 자신이 있다. 만약 거기에 다른 사람이 있어준다면 그 나름대로 좋겠지만, 어디까지나 단독자끼리 가끔 함께 올라가는 방식으로 오르고 싶다.


2 적극적으로 혼자가 돼야 하는 이유


함께 있다고 다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함께 있다고

다 좋은 영향을

주고받는 것은 아니다

 

 

 

무리 지어 다니면서 성공한 사람은 없다.

뭔가를 배우거나 공부할 때는 먼저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 머리의 좋고 나쁨이나, 독서의 양보다는 단독자(單獨者, 현대인은 자신의 자유와 주체성을 버리고 집단 속에 묻혀 자기를 잃어간다. 그 전체, 즉 집단의 반대편에 서는 존재를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다)의 자질이 필요하다.

나의 수업은 수강생이 이삼백 명 정도라 큰 강의실에서 이뤄지는데, 사실 그들의 대부분은 친구와 함께 온 학생들이다. 혼자 온 학생은 손에 꼽을 정도다. 그중에는 가끔 수업을 함께 들을 친구가 없어 혼자 왔다는 학생도 있으니, 자발적으로 혼자 수업에 온 학생은 더 적을 것이다.

학생들은 그런 식의 함께 있는 관계가 서로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관계임을 깨닫지 못하고 “친구도 같은 수업을 들어서 함께 온 건데 그게 왜 나쁜 건가요? 수업 중에 잡담을 하는 것도 아닌데……”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는 옆에 친구가 있으면 학습에 몰입하기 힘들다. 그래서 제대로 배우려면 친구와 함께 있지 말고 떨어지라는 말을 항상 한다.

하지만 그렇게 설명해도 학생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실제로 친구와 떨어져 각자 자기 자신과 마주하면 함께 있을 때는 알 수 없던 것들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자신과 마주하는 일대일 대화가 중요하다.

책을 읽을 때는 저자와, 수업 중에는 담당 교수와 서로 진지하게 소통할 때 열매를 맺을 수 있다. 반대로 많은 사람 속에 섞여 있다는 생각이나 태도로 임하면 딱 그만큼만 얻을 수 있다. 배움의 힘도 떨어진다.

물론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게 좋다. 하지만 원래 학습에 대한 최고의 마음가짐은 스스로 단독자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종종 함께 수업받는 관계를 없애려고 학생 전원의 자리를 바꾸도록 한다.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끼리 2인 1조로 짝만 지워도 태도가 달라진다. 그 모습은 꽤 흥미롭다.

이런 수업을 나는 그루핑 게임이라고 하며, 초등학생 대상의 학원에서도 실시하고 있다. 그루핑 게임이란 백 명 정도의 아이들을 각자 자유롭게 걷게 하다가 “남녀 합해 5명” “이번엔 3명” 등 인원수에 맞춰 그룹을 만들게 하는 놀이다. 이 게임에서는 되도록 짧은 시간에 그룹을 만들어야 하는데, 얼핏 보면 그룹 만들기 게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단독자 게임이다. 예를 들어 5명의 그룹을 만들어야 하는데 6명이 되었다면 누군가 한 사람은 빠져야 한다. 즉, 단독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영원히 그 그룹은 5명이 될 수 없다. 이 게임을 여러 번 반복하면 아이들의 움직임이 달라진다. ‘사이토 메소드’에서는 초등학교 1~3학년 정도면 그룹을 만드는 데 20초 정도가 걸리지만, 이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은 아이들은 게임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 정도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게임은 친구와 떨어지거나 일부러 자신이 빠져주는 것 그리고 마지막에 혼자 남아도 괜찮다고 생각하는 것이 학습의 기본이라는 것을 익히기 위한 게임이기 때문에 의미가 깊다. 현대인들에게는 꼭 필요한 게임이다.

지금은 친구와 함께하는 것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기 위한 하나의 생활의 지혜가 된 것 같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기 시작하면 학급에서 어떤 그룹에든 속하기 위해 발버둥 치게 된다. 따돌림 당할까 봐 혼자 있는 게 두려워지기도 한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면 혼자 있을 때 마음이 불안정해져서 점점 혼자 있는 상황을 피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는 누구와도 그룹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단독자로서의 자질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는 4인 그룹을 만들어 서로 발표하고 우수한 사람을 뽑아 한 명씩 제외시켜가는 수업도 한다. 이때 서로 아는 관계라면 공정하게 제외될 사람을 지목할 수 없고, 아는 사람이 여럿이라면 한 명만 제외시키는 것에 부담을 느낀다. 하지만 모두가 단독자라면 어설픈 배려는 필요 없다. 화가 오카모토 다로도 『내 안에 독을 품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아무튼 모두 자신을 너무 소중히 여긴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진짜 자신의 모습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스스로도 그것을 느낄 터이고, 상대 또한 그것을 알기에 깊이 사귀려 하지 않는다.

어째서 모든 친구에게 유쾌한 사람이 되어야 할까. 이런 성격의 사람이라면 자동적으로 모두를 배려하겠지만, 그것은 타인을 위해서라기보다 결국 자신의 마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더 엄격하게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어떨까.

친구에게 호감을 살 생각은 접고 친구로부터 고립되어도 좋다고 마음먹고 자신을 관철해가면 진정한 의미에서 모두를 기쁘게 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_오카모토 다로, 『내 안에 독을 품고』 중에서

 

나에게는 중학교 때부터 대학원 시절까지 쭉 함께한 친구가 있다. 이런 말을 하면 “뭐야, 혼자가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한 친구가 있었다는 거잖아”라고 하겠지만 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사귄 친구 중에 그와 내가 중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왜냐하면 우리는 대부분 함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같은 과제를 할 때도 그와 나는 전혀 다른 곳에서 했다. 그래야 좋은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친구와 자주 만나지 못하지만 아직까지도 그와의 우정은 확실히 든든한 힘이 된다.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지 마라

모두와 잘 지내기 위해

노력하지 마라

 

 

 

내 강의에는 ‘다른 집단에 속할 수 없었다’는 학생들이 종종 모여든다. 집단에 완벽히 속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계속 있기도, 빠지기도 애매했다는 학생들도 내 강의에서는 갑자기 생생해지는 일이 많다.

잘 살펴보면 그런 학생들이, 집단에 잘 섞여 있는 학생들에 비해 에너지가 확실히 높은 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신에 대한 기대치도 지나치게 높아서 수준이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스스로에게 기대하는 힘, 나는 이것을 ‘자기력(自期力)’이라고 부른다. 젊을수록 ‘나는 이대로 끝날 사람이 아니야’ ‘나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라’라는 생각이 강하다. 나도 그 시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과 친구들 같은 또래들에게는 거슬리는 존재였을 것이다.

사실 그때의 나는 남을 미워하거나 혐오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들 가운데서 묻히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거만함으로 분출되고 있었다. 칭찬받을 일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 기분을 잘 이해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자기력 에너지가 높은 사람끼리는 서로 위화감을 느끼지 않는다. 이런 집단은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집단과 확연히 분위기가 다르다. 적당히 어우러져 있는 집단은 말하자면 일종의 담합 상태다. ‘이 정도의 나에게 만족한다’는 안도감이 생겨 서로에게 ‘좋아’ ‘괜찮아’라고 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입찰 가격을 낮게 책정한 채 마음을 놓는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기대가 높은 단독자는 담합으로 자신의 입찰 가격을 낮게 책정하지 않는다. 아주 높게 책정한다. 그래서 높은 기대치에 대한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는 동시에 그 기대치를 충족시키기 위해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사노 아쓰코의 소설 『배터리』에 나오는 하라다 다쿠미는 자기력에 의해 성장해가는 소년이다. 다쿠미는 투수로서의 자기 재능에 절대적인 자신감을 갖고 있다. 홀로 연습에 몰두하고, 그런 노력을 통해 스스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다진다.

그는 좋은 습관을 갖고 있지만, 강속구를 던지는 자신을 스스로 에이스라 말하는 건방진 캐릭터이기도 하다. 심지어 친구에게조차 “함부로 손대지 마”라고 말한다.

다쿠미는 스스로도 자신을 다루기 어렵다고 생각하지만 사춘기 때는 누구에게나 어느 정도 다루기 어려운 면이 있게 마련이다. “가까이 오지 마, 손대지 마”라고 말하는 오만한 당당함도 인생에서 누구나 한 번은 갖는 빛남일 것이다.

이 시기에는 가족 안에 있어도 단독자가 되려고 한다. 그러나 나이를 먹으면서 대부분 그런 생각은 사라진다.

자기력은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까. 나는 자기력을 계속 유지하게 하는 힘은젊음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경우, 서른다섯 살이 될 때까지도 자기력을 유지했다. 아무도 상대해주지 않았지만 그 나이가 돼서도 ‘내 실력은 이 정도가 아니다’라는 자부심이 남보다 월등하게 높았다.

그 기저에는 어제의 나, 1년 전의 나, 10년 전의 나…… 즉, 어느 구획마다 과거의 나와 단절하고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성장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가족이나 주위 사람들에게는 똑같아 보여도 삼단 발사 로켓처럼 과거의 나를 분리하면서, 아득히 높은 곳을 향해 가고 싶었다. 그만큼 나 자신에 대한 기대와 자부심이 컸다.


남의 인정이 독이 될 수도 있다

남의 인정이

독이 될 수도 있다

 

 

 

높은 에너지를 능숙하게 표출하지 못하면 위험해진다. 넘치는 에너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 결과적으로 자신을 상처 내거나 세상에 대한 적대심만 갖게 된다.

이때 중요한 것이 자기 객관화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 세상에서 바라보는 나는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주관적인 평가는 달콤할 수 있다. 스스로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면서 ‘지금의 나는 진짜 내가 아니야’라고 속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자신을 객관적으로 볼 수 없다. 자신을 성장시키는 톱니바퀴가 멈추게 되어 겨우 생긴 에너지가 세상과 맞물리지 못하고 공회전만 할 뿐이다.

지금 당장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이도 저도 아닌 자신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럴 때 내가 스스로에게 걸었던 주문은 “성과를 내라”는 한마디였다.

나는 이 다섯 글자를 써서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두었다.

성과를 내려면 다양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젊은 시기에는 목표가 있어도 추상적인 신념에 사로잡혀 고민만 하기 쉽다. 그러다 보면 뭔가 큰일을 해야만 한다는 압박에 사로잡혀 결국 자신을 성장시키는 구체적인 행동까지는 하지 못하는 비극이 일어난다.

나는 그렇게 되지 않으려고 ‘현실을 직시하라’ ‘성과를 내라’고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말해왔다. 큰사람이 되기 위해 스스로에게 미션을 주었던 것이다.

나도 모르게 ‘좋은 상사를 만났더라면’ ‘그 대학에 합격했더라면’ 하는 ‘~라면’ ‘~했더라면’ 같은 말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런 변명은 승부의 세계에서 절대 통하지 않는다. 결과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항상 승부 의식을 가지면 어떤 일에든 진지하게 임할 수 있다.

남아돌 거라 생각했던 에너지도 시간이 갈수록 점점 줄어든다. 특히 30대 이후를 살아가려면 젊은 시절에 에너지를 기술로 전환해둘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자전거는, 넘어지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시기에 타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나중에는 배우기가 힘들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도전하려면 에너지가 필요하다. 물론 나이가 들어서도 새로운 일에 도전할 수 있지만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에 습관처럼 도전을 해온 사람들이다.

에너지가 넘치는 젊은 시기에 기술을 익혀두면 얼마간의 공백이 있어도 바로 다시 다양한 활동에 응용할 수 있다. 그 기술로 사회에서 인정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기본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스스로를 단련하는 시간이나 에너지를 기술로 전환하는 시간으로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실제로 고독한 시기에 자신을 단련한 경험이 있는 사람은 필요하면 언제든 그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어른이 되면, 사춘기 때처럼 자신을 몰아붙이는 듯한 고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사람은 고독할 때 힘을 키울 수 있다. 사춘기 때만큼 집중할 필요는 없지만 가끔 한밤에 고독한 영혼을 끌어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다.

주변 사람들과 잘 사귀면서도 혼자일 때 나 자신에게 충실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어른이 가질 수 있는 이상적인 고독의 상태가 아닐까.


상대적으로 평가하지 말고 절대적으로 평가하라

상대적으로 평가하지 말고

절대적으로 평가하라

 

 

 

어떤 일이든 혼자 단련하고 차근차근 실력을 늘려 완성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공수도와 테니스에 열중했을 때 종종 하던 생각이다. 시합 형식으로 연습하는 것이 재미있어서 승부에 일희일비하다 보면 시간은 금방 가지만, 혼자 실력을 기르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선수로서의 미래는 짧다.

프로야구 선수는 프리 배팅이라 하여 실제로 볼을 치는 연습도 하지만, 뛰어난 선수일수록 혼자서 스윙 연습도 열심히 한다. 스윙은 주위에 사람이 있든 없든 자기 자신과 치열하게 싸워나가는 연습법이다. 메이저리그의 마쓰이 히데키 선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 시절에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과 함께 자주 스윙 연습을 했다고 한다. 캠프나 원정 훈련을 가서도 마쓰이가 나가시마 감독 방에서 스윙 동작을 취하면 배트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감독이 ‘좋다’ ‘아니다’라고 눈으로 반응하는, 무언의 대화를 나누었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당시 나가시마 감독은 스윙 마니아로, 현역 시절에는 한밤중에 벌떡 일어나 스윙 연습을 자주 했다. 한밤중에도 타격 폼이 걱정돼서 연습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고 하니 역시 대단한 선수는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보통 선수들이라면 연습 후에 술 한잔 하고 푹 잠들지 않았을까.

흥미롭게도 재능이 많은 사람일수록 혼자일 때 자신이 이루어야 할 세계에 대해 생각한다. 즉, 혼자만의 시간에 깊이 생각한다는 것은 재능의 증거이기도 하다.

나는 더 많은 사람들이 혼자 있는 시간에 대해 긍정적이고 창조적인 이미지를 가졌으면 한다. 그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 이 사람은 속이 깊구나!’ ‘빛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갖게 한다는 것은 틀림없이 기쁜 일이기 때문이다.


끝까지 나를 믿어줄 사람은 나뿐이다

끝까지

나를 믿어줄 사람은

나뿐이다

 

 

 

예술가 중에는 고독을 잘 극복한, 강한 정신력의 소유자가 많다. 헨리 밀러나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은 하루도 여자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은 이미지이지만 사실은 고독과 가까운 사람들이었다.

나는 요시다 겐코의 『도연초』를 좋아한다. 『도연초』를 읽으면 겐코 역시 혼자만의 시간을 무척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도연초』에는 “한가해서 쓸쓸한 것을 고민한다는 것은 대체 어떤 기분일까. 다른 어떤 일에도 관여하지 않고 혼자 있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련만”이라는 구절이 나온다. ‘혼자여도 괜찮다’는 마음이 있으면 조금씩 고독을 두려워하지 않는 강인함이 생긴다.

시인이자 작가인 메이 사튼도 스스로 단독자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실의의 밑바닥에서 치고 올라왔다. 사튼은 자신이 동성애자라는 것을 밝히면서 대학교수직을 잃고 작가로서의 입지도 위태로워졌다. 거기에 실연, 아버지의 죽음 등의 불행도 겹쳤다. 사튼은 전혀 연고가 없는 곳으로 홀로 떠나 살면서 스스로의 고독을 바라보며 새로운 출발을 다짐한다.

사튼은 『혼자 산다는 것』에서 “고독은 도전이며 그 속에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썼다. 그래도 삶의 깊이를 맛보려면 어쨌든 고독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몇 주 만인가. 겨우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진짜 생활’이 또 시작된다. 기묘할지도 모르겠지만 내게 있어서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나 이미 일어난 일의 의미를 찾고 발견하는 혼자만의 시간을 갖지 않는 한, 친구뿐만이 아니라 정열을 걸고 사랑하는 애인조차도 진짜 생활이 아니다.

_메이 사튼, 『혼자 산다는 것』 중에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온전한 내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게 되어 자신의 개성과 성격을 전부 드러내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상대방에 맞추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튼은 ‘자신의 중심을 되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사튼은 ‘고독’ 속에서 창조의 풍요로운 시공을 보고 있었다.

예술가들이 정신적으로 강한 것은 고독의 힘을 스스로 만들기 때문이다. 즉, 인간의 강인함은 단독자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다.

누구나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는 이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절망감에 빠진다. 그럴 때 직면한 상황의 의미를 찾고, 자신만큼은 항상 자기편이라고 생각하는 훈련이 되어 있으면 상황은 달라진다. 고독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다면 어떠한 시련에도 쉽게 꺾이지 않는다.


중요한 순간에는 관계도 끊어라

중요한 순간에는

관계도 끊어라

 

 

 

사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다. ‘혼자’라는 것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격으로 자랐다. 나는 삼 남매의 막내로, 부모님과 누나, 형에게도 귀여움을 받고 자랐다. 또 아버지가 회사를 경영하셨기 때문에 항상 집은 북적였다. 그렇기 때문에 상경 후의 학창 시절은 외로움이라는 시련을 극복하는 시기였다. 처음에는 하숙집에 혼자 있기 싫어 툭하면 친구 집을 찾아가곤 했다. 하지만 점점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게 됐다. 고독하지 않으면 자신을 깊고 풍요롭게 만드는 농밀한 시간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비란 헤어진 지 사흘이 지나 다시 만날 때 눈을 비비고 다시 볼 정도로 달라져 있어야 한다”는 오래된 속담이 있다.

이 속담처럼 사흘 동안 서로가 엄청난 성장을 이뤘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이상적으로 보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신뢰하는 친구와는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하지 않아도 좋다. 만나지 않는 동안 서로가 고독 속에서 절차탁마(切磋琢磨, 옥이나 돌 따위를 갈고 닦아서 빛을 낸다는 뜻)해간다고 마음먹으면 의지가 생긴다. 마음속에 의지할 만한 사람이 있으니 정신적으로도 외롭지 않다.

요즘 20대에게는 애초에 적극적으로 혼자 있는 시간을 갖는다는 생각 자체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청년기 특히 10대, 20대 때 진짜 힘을 키우지 않으면 인생은 보잘것없이 끝나버린다. 원하는 일을 하고, 인생을 풍요롭게 살고 싶다면 인생의 어느 시기에 스스로 교제를 끊을 필요도 있다.

중학교 친구 중에 사법시험을 준비하던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대학을 졸업할 무렵, 공부할 시간이 없다며 내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나는 그때 한창 고독에 빠져 24시간이 온전히 나만의 시간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하루 종일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공부할 시간이 없다는 말은 변명이다. 일의 우선순위를 완전히 착각하고 있다”며 거침없이 퍼부었다.

인생에는 승부를 걸어야 할 때가 있다. 실패하지 않으려면 교제를 완벽하게 끊고 하고 있는 일도 철저히 정리하여 생활 전체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하면 거의 모든 시간을 온전하게 활용할 수 있다. 물론 수입이 없어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감수 한다면 24시간을 손에 넣기란 의외로 간단하다.

친구는 내 말에 엄청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조금 시간이 지나 만나 보니 “역시 교제를 줄이니 놀랄 만큼 많은 시간이 생겼다”며 나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치열하게 공부하여 간절히 바라던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물론 평생을 철저한 고독 속에서 살 순 없다. 혼자 살 수도 없다. 하지만 중요한 시험이나 일의 마감처럼 특별히 집중을 필요로 하는 기간에는 이 방법이 효과적이다.

원치 않던 고독에 빠지면 외롭고 쓸쓸한 기분이 든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고독을 직면하면 강해진다.

모두가 부러워할 만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혼자 있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모든 사람들과 잘 지내 보여도 젊은 시절에 몇 년 정도는 고독의 시간을 경험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