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두기

1. 본 도서는 ‘1024×768’ 세로 화면에 최적화 되었습니다.

2. 본 작품의 전자책 편집상의 오류나 기기 오류 등을 발견하실 경우, http://goldenf.net의 도서 제안을 통해 제보 부탁드립니다. 독자님의 소중한 제보는 검토 후 바로 수정 업데이트가 됩니다. 또한 제보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추첨을 통해 도서를 발송해 드리고 있습니다.

3. 이 책은 2003년에 개정 출판된 『Dark Tower Ⅲ: The Waste Lands』를 저본으로 삼아 우리글로 옮겼습니다.

4. 제3부 『황무지』는 제2부 『세 개의 문』과 마찬가지로 현실 세계의 미국 뉴욕 시와 환상 세계를 오가며 펼쳐집니다. 뉴욕 시의 남북으로 뻗은 길은 ‘○번 대로’로, 동서로 뻗은 길은 ‘○번가’로 옮겼습니다.

5. 본문 중 스티븐 킹이 의도한 행 바뀜 혹은 어긋난 표기법이 있습니다.

6. 원서에서 강조된 문구는 고딕 등으로 표기되었습니다.

7. 본문에 나오는 수수께끼에 관한 설명은 각 권 마지막 장에 부록으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이 시리즈를 한 권 한 권 기꺼이 출판해 준

돈 그랜트에게



제1장데타와 오데타

1

전문용어를 빼고 설명하면 심리학자 알프레트 아들러의 학설은 다음과 같다. 완벽한 정신분열증 환자란,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한다면, 자기 안에 있는 다른 인격(들)을 인지하지 못할 뿐 아니라 자기 인생에서 무언가 빠진 것이 있음을 조금도 인지하지 못하는 남성 혹은 여성을 가리킨다.

아들러가 데타 워커와 오데타 홈스를 만났더라면 좋았으리라.

2

“……가 마지막 총잡이였다고 하더군요.”

앤드루가 말했다. 한참 전부터 얘기하는 중이었다. 늘 말이 많은 앤드루였기에 오데타는 평소 그가 뭐라고 얘기를 해도 그저 따듯한 샤워 물줄기에 머리와 얼굴을 내맡기듯이 목소리가 머릿속을 적시고 그냥 흘러가도록 내버려두곤 했다. 그러나 방금 그 한마디는 오데타의 관심을 잡아끌었다. 아니, 잡아끈 정도가 아니라 아예 낚아챘다. 귀에 걸린 가시처럼.

“방금 뭐라고 했죠?”

“아아, 그냥 신문 칼럼에서 읽은 겁니다. 누가 쓴 건지는 몰라요. 제대로 안 봤거든요. 뭐, 어느 정치꾼이 썼겠지요. 아마 보면 아실 겁니다, 미즈 홈스. 어쨌거나 전 그분을 정말로 좋아했어요. 당선된 날 밤엔 울기까지 했다니까요……”

오데타는 슬며시 웃었고,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저릿해졌다. 앤드루는 쉼 없이 튀어나오는 수다를 자신도 어쩌지 못한다고,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자기 안에 흐르는 아일랜드인의 피 탓이라고 했고, 대개는 별 것 없는 수다였다. 오데타가 결코 만날 일 없는 그의 친척과 친구들 뒷얘기, 어설픈 정치 논평, 괴상한 책을 탐독하고 얻은 괴상한 과학 이야기 등이었다(뭐니 뭐니 해도 앤드루는 비행접시 신봉자로서 그 물체를 유우포라고 불렀다.). 그럼에도 방금 전의 그 한마디만큼은 오데타의 마음을 건드렸다. 그녀 또한 그분이 당선된 날 밤에 눈물을 흘렸으므로.

“하지만 그 개놈의 새끼가…… 욕해서 죄송합니다, 미즈 홈스. 하여튼 오스왈든가 하는 그 개놈의 새끼가 그분을 쐈을 땐, 눈물이 안 나오더군요. 그 후로도 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보자…… 얼추 두 달쯤 됐지요?”

‘석 달 하고 이틀째예요.’ 오데타가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요, 앤드루. 그쯤 된 것 같아요.”

앤드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어제 그 칼럼을 읽었지요. 아마 《뉴욕 데일리 뉴스》였을 겁니다. 보니까 새로 대통령이 된 존슨이 분명 잘하긴 할 테지만 그래도 똑같진 않을 거라더군요. 필자가 써놓기를, 미국은 이 세상 마지막 총잡이의 임종을 지켰답니다.”

“내 생각에 존 케네디는 절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오데타가 말했다. 그 목소리가 귀에 익은 목소리보다 날 선 듯 들렸다면, 필시 오데타마저도 칼럼 내용에 동조했기 때문이리라(또한 그렇게 들렸음이 분명했다. 뒷거울에 비친 앤드루가 눈을 껌벅거렸는데 멍한 표정이 아니라 움찔 놀란 표정이었다.). 터무니없는 말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사실이었다. ‘미국은 이 세상 마지막 총잡이의 임종을 지켰답니다.’ 그 문장에 깃든 무언가가 오데타의 머릿속 깊은 곳에서 메아리쳤다. 추악하고 거짓된 무언가였다. 존 케네디는 평화의 설계자였다. 채찍을 휘두르는 빌리 더 키드 부류하고는 거리가 멀었다. 차라리 공화당의 골드워터 패거리가 그쪽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오데타로 하여금 소름이 돋게 한 이유는 분명히 존재했다.

“뭐, 글 써논 걸 보니 세상에 총잡이가 모자랄 일은 없을 거라고 하더군요.”

앤드루가 불안한 듯 뒷거울을 흘끔거리면서 말을 이었다.

“글쓴이가 예로 든 사람은 오스왈드를 쏴죽인 잭 루비가 있고, 피델 카스트로, 또 카스트로 친군데 아이티의 그……”

“뒤발리에죠. 별명은 ‘파파 독’이고요.”

“예, 그 사람이오. 그리고 베트남의 응오 뭐더라……”

“응오 대통령 형제는 죽었어요.”

“요는, 잭 케네디가 그 사람들하고 다르다는 겁니다. 그거지요. 글쓴이가 말하길 케네디도 총을 뽑긴 한답니다. 그러나 오직 그보다 약한 이가 그를 필요로 할 때에만, 또 오직 다른 대안이 전무할 때에만 뽑는다고 하더군요. 거기다 케네디는 영리해서, 때로는 대화가 아무 소용도 없단 걸 알았대요. 입가에 거품이 부글거릴 때에는 쏘는 수밖에 없단 걸 알았다는 말이지요. 글쓴이에 따르면요.”

앤드루는 줄곧 주의 깊게 오데타의 눈치를 살폈다.

“그래봤자 그냥 신문에서 읽은 얘깁니다.”

리무진은 5번가를 지나 센트럴 파크 서로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보닛 맨 앞에 달린 캐딜락 문장이 2월의 차디찬 공기를 갈랐다.

“그래요.”

오데타가 부드럽게 말하자 앤드루의 눈이 살짝 가늘어졌다.

“무슨 말인지 알아요. 내 생각은 다르지만, 그래도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요.”

‘이 거짓말쟁이.’ 머릿속의 목소리가 말했다. 빈번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무슨 말인지 완벽하게 이해했잖아. 완벽하게 동의하잖아. 앤드루한테는 거짓말해도 돼, 그러고 싶다면 말이야. 하지만 제발 너 자신한테까지 거짓말하진 마, 이 여자야.’

그럼에도 그녀는 마음속 한편에서 겁에 질린 목소리로 항변했다. 세상은 핵폭탄으로 가득한 화약통이고 그 통 위에는 10억이 넘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판국에 선한 총잡이와 악한 총잡이가 다르다고 믿는다면, 착각이었다. 무수히 많은 도화선 옆에서 무수히 많은 손이 라이터를 들고 덜덜 떠는 중이었다. 이 세상은 총잡이가 살 곳이 아니었다. 그런 시절이 실제로 있었다고 해도, 이미 지나가버렸다.

아닌가?

오데타는 잠시 눈을 감고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지긋지긋한 두통이 또 찾아올 모양이었다. 두통은 가끔 무더운 여름날 불길하게 모여드는 소나기구름처럼 무섭게 일 때도 있었지만…… 이내 스르르 사라지곤 했다. 가끔은 한쪽으로 휙 몰려가서 어딘가 다른 곳에 천둥번개를 내리꽂는 심술궂은 소나기구름 같았다.

그러나 오데타가 생각하기에 이번 폭풍은 진짜 같았다. 천둥에, 번개에, 골프공만 한 우박까지 퍼부어야 직성이 풀릴 모양이었다.

5번가를 따라 늘어선 가로등 불빛이 지독히도 밝아 보였다.

“그런데 옥스퍼드는 좀 어떻던가요, 미즈 홈스?”

앤드루가 망설이는 목소리로 물었다.

“습도가 높아요. 2월인데도 무척 습하더군요.”

오데타는 잠시 말을 끊고, 목구멍까지 차오른 쓸개즙처럼 쓰디쓴 말을 토해내지 않으리라고 다짐했다. 되삼키리라고 다짐했다. 그런 잔인한 말을 굳이 입 밖에 낼 필요는 없었다. 앤드루가 세상의 마지막 총잡이 운운하긴 했지만, 그가 늘 주절거리는 밑도 끝도 없는 수다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런저런 온갖 생각을 뚫고 그 말은 치솟았고, 오데타는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하고 말았다. 목소리는 여느 때와 같이 차분하고 조곤조곤했다. 적어도 오데타가 생각하기에는 그랬다. 하지만 자신마저 속일 수는 없었다. 저도 모르게 털어놓은 속마음은 들으면 아는 법이므로.

“보석에 필요한 보증인은 금방 와줬어요. 당연한 얘기죠. 미리 통보를 받았으니까요. 그런데도 그 작자들이 우릴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가둬뒀어요. 나도 할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참아봤지만, 그 싸움에선 저쪽이 이긴 것 같아요. 결국엔 내가 못 참고 지려버렸으니까요.”

오데타는 움찔 놀란 앤드루의 눈을 보고 입을 다물고 싶었지만,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작자들이 가르치고 싶어하는 게 바로 그거예요. 당신도 알죠? 겁을 주려고 그러기도 할 거예요. 상대가 겁을 먹으면 자기네들의 소중한 남부 땅에 두 번 다시 발을 못 들일 거라고 생각하니까요. 귀찮게 굴지 못할 거라고요.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사람들도 대개는 알고 있어요. 바보들마저도. 그리고 그 사람들이 전부 다 바보인 건 아니죠. 자기들이 무슨 짓을 하든, 끝내는 세상이 변하는 날이 온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할 수 있는 지금, 사람들한테 굴욕을 심어주려고 하는 거예요. 너희가 이렇게 굴욕당할 수도 있다고 가르쳐 주는 거죠. 하느님, 예수님, 온갖 성인들의 이름을 걸고 절대로 나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고, 절대로, 절대로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해 봐도, 오랫동안 잡혀 있으면 어쩔 수가 없어요. 당연한 얘기지만요. 그 사람들이 가르치려는 건 이거예요. 넌 우리에 갇힌 짐승이다, 짐승보다 나을 것도 없고, 잘하는 것도 없다. 우리에 갇힌 짐승일 뿐이다. 그래서 지려버렸어요. 말라붙은 소변 냄새가 아직도 가시질 않아요. 지긋지긋한 감방 냄새도. 그 사람들은 우리가 원숭이의 종자라고 생각해요. 알죠? 그런데 지금 나한테 나는 냄새가 바로 그 냄새에요. 원숭이 냄새.”

오데타는 거울에 비친 앤드루의 눈을 보고 거기 비친 감정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때로는 소변 말고도 참을 수 없는 것이 있는 법이므로.

“죄송합니다, 미즈 홈스.”

“아니에요, 앤드루.”

오데타는 또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미안해할 사람은 나예요. 요 사흘 동안 좀 힘들었어요.”

“그러게나 말입니다.”

오데타는 앤드루의 말투가 잔소리꾼 같다고 생각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속으로는 별로 웃고 싶지 않았다. 일찍이 오데타는 자신이 무슨 일에 뛰어들려 하는지 안다고 생각했다. 얼마나 지독한 일이 될지 정확히 예측했다고 생각했다. 그 예측은 빗나갔다.

‘사흘 동안 좀 힘들었어요.’ 하긴, 그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옥스퍼드에서 보낸 사흘을 표현할 말은 그것 말고도 많았다. 미시시피 주가 아니라 지옥에서 보낸 며칠이었다거나. 그러나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법이다. 죽어도 입 밖에 낼 수 없는 말……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보좌 앞에 불려가지 않는 한 꺼낼 수 없는 말이 있다. 아마도 그 자리에 서면 두 귀 사이의 회색 젤리에서 왜 끔찍한 천둥 소나기가 일어나는지도 밝혀질 듯싶었다(과학자들은 그 회색 젤리와 뇌신경 사이에 아무 연결 고리도 없다고 했지만, 오데타가 보기에는 그저 헛소리에 불과했다.).

“얼른 집에 가서 씻고, 씻고, 또 씻고, 그다음엔 자고, 자고, 또 자고 싶은 맘밖에 없어요. 그러고 나면 멀쩡해질 것 같아요.”

“암요! 그러셔야죠!”

앤드루는 또 뭔가 사과하려고 했지만, 거기까지만이었다. 감히 그 이상 대화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여느 때와 달리 침묵을 지키며 5번가와 센트럴 파크 남로가 교차하는 모퉁이의 고풍스러운 회색 아파트 블록으로 향했다. 최상류층이 사는 고풍스러운 아파트 블록이었기에 오데타는 스스로를 ‘블록버스터’로 여겼다. 저 번드르르한 고급 아파트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니면 오데타에게 말을 걸지 않는 이들이 살았지만, 오데타는 괘념치 않았다. 심지어 오데타는 그들보다 높은 곳에 살았고, 이는 그들도 잘 아는 바였다. 오데타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이 몹시도 배알 꼴려한다고 느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때는 하녀용 흰 장갑이나 얇고 까만 운전수용 가죽장갑을 끼지 않는 한 검은 손이 닿을 수 없었던 이곳에, 이 아름답고 점잖고 유서 깊은 건물의 펜트하우스에 검둥이가 살기 때문이었다. 오데타는 그들의 배알이 한껏 뒤틀리기를 바랐다. 그러고는 심술궂은 자신을, 믿는 사람답지 않은 자신을 탓했다. 그럼에도 바라기를 멈추지는 않았다. 끝내 참지 못했기에 고급 외제 실크 속옷의 앞부분을 적시고 만 소변과 마찬가지로, 마음속에서 치솟는 바람 또한 억누를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심술궂은 마음, 믿는 사람답지 않은 마음, 나쁜 마음이었다. 아니, 그녀가 ‘운동’에 관계하는 한 그런 마음은 나쁜 정도에 그치지 않고 역효과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이쪽은 이쪽이 고대해 온 권리를 쟁취할 참이었고 필시 해를 넘기기 전에 그럴 수 있을 듯싶었다. 존슨은 살해당한 전임대통령의 유지를 무시할 수 없는 입장이므로 의회에서 공민권법이 통과되도록 적잖이 신경을 써야 할 처지였다. 필요하면 강행 통과도 불사할 태세였다(그리하여 어쩌면 배리 골드워터의 관 뚜껑에 못을 한 개 더 박을 기세였다.). 따라서 불안과 충격을 최소화하는 일이 중요했다. 아직 할 일이 많았다. 증오는 그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었다. 사실상 증오는 방해만 될 뿐이었다.

그럼에도 증오를 억누르지 못하는 때가 있는 법이다.

이것 역시 오데타가 옥스퍼드타운에서 얻은 가르침이었다.

3

한편, 데타 워커는 흑인 민권운동은커녕 그보다 훨씬 얌전한 운동에도 관심을 갖지 않는 사람이었다. 데타는 그리니치빌리지의 허물어져가는 아파트 다락에 살았다. 오데타는 데타의 다락에 관해 아는 바가 없었고 데타도 오데타의 펜트하우스가 어딘지 몰랐으며 무언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고 의심한 사람은 단 한 명, 운전사인 앤드루 피니뿐이었다. 앤드루는 오데타가 열네 살일 적부터 오데타의 아버지 밑에서 일했는데 그때 데타는 아직 존재하지도 않았다.

오데타는 가끔 사라지곤 했다. 사라진 기간은 몇 시간일 때도 있었고 며칠일 때도 있었다. 지난여름에는 3주 동안 사라진 바람에 결국 앤드루가 경찰에 실종신고를 하려 했지만, 마침 그날 저녁 오데타가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이튿날 10시에 차를 대기시키라고 지시했다. 뭘 좀 사러 갈 생각이라고, 그렇게 얘기했다.

‘미즈 홈스! 도대체 어디 계셨던 겁니까?’ 앤드루는 외치고 싶어서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지만 예전에 똑같은 질문을 했을 때 돌아온 답은 어리둥절해하는 시선뿐이었다. 앤드루가 보기에 진심으로 어리둥절해하는 눈빛이었다. ‘여기 있었어요.’ 오데타는 그리 대답했으리라. ‘왜요, 여기 있었잖아요, 앤드루. 날마다 두세 군데씩 데려다주면서 왜 그래요. 벌써부터 정신이 흐릿해지는 건 아니죠, 그렇죠?’ 그러고는 웃었을 테고, 혹시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때 가끔 그러듯이)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면 앤드루의 볼을 살짝 꼬집었으리라.

“잘 알았습니다, 미즈 홈스. 10시에 뵙겠습니다.”

앤드루는 그렇게만 말했다.

오데타가 사라진 3주 동안 안절부절못했던 앤드루는 수화기를 내려놓은 다음 눈을 감고 미즈 홈스를 무사히 돌려보내주신 성모님께 감사기도를 올렸다. 그러고 나서 아파트 수위인 하워드에게 전화를 걸었다.

“언제 돌아오신 건가?”

“한 20분밖에 안 됐어.”

“누가 모시고 왔는데?”

“거야 나도 모르지. 자네도 잘 알잖아. 매번 다른 차를 타고 오시는 거 말이야. 어쩌다 아파트 옆에 차를 댈 땐 나 있는 데선 보이지도 않아. 벨이 울리면 내다보고 그제야 오셨구나 하고 안단 말이지.”

하워드가 말을 끊었다가 한마디 덧붙였다.

“볼에 꽤 심하게 멍이 들었더군.”

하워드 말이 옳았다. 지독히도 심한 멍이었지만 차츰 풀려가는 중이었다. 앤드루는 그 멍이 처음 생겼을 때 어떤 꼴이었을지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이튿날 아침 10시에 정확히 내려온 미즈 홈스는 스파게티처럼 가느다란 끈이 달린 실크 선드레스 차림이었고, 볼에 든 멍은 이때 이미 누렇게 풀려가는 중이었다. 멍을 가리려고 한 화장은 마지못해 한 듯 엷었다. 기를 쓰고 덮으려 하면 오히려 더 눈길을 끌게 되는 줄 아는 듯싶었다.

“어쩌다 그러신 겁니까, 미즈 홈스?”

앤드루가 물었을 때 오데타는 유쾌하게 웃었다.

“내가 어떤지 알잖아요, 앤드루. 늘 하는 실수예요. 어제 욕조에서 나오다가 손잡이를 놓쳤지 뭐예요. 전국 뉴스를 보려고 서두르다가 그만. 넘어져서 볼을 부딪쳤어요.”

오데타가 앤드루의 얼굴을 가만히 살폈다.

“지금 의사가 어쩌니 정밀검사가 저쩌니 떠들 생각이죠, 맞죠? 대답 안 해도 돼요. 그렇게 오랫동안 붙어 다니다보면 속이 훤히 보여요. 어차피 안 갈 거니까, 굳이 물어볼 것도 없어요. 난 더할 나위 없이 멀쩡해요. 그럼 기사님, 출발! 일단 삭스 백화점을 한 절반쯤 쓸고 나서 짐벨스 백화점을 통째로 사버릴 거예요. 중간에 포시즌스에 들러서 있는 대로 먹어치워야겠어요.”

“알아 모시겠습니다, 미즈 홈스.”

앤드루가 씩 웃었다. 억지웃음을 짓기가 쉽지 않았다. 그 멍은 전날 생긴 것이 아니었다. 최소한 1주일은 묵은 멍이었는데…… 그가 아는 사실은 그뿐만이 아니지 않은가? 지난 한 주 동안 그는 매일 저녁 7시 정각에 전화를 걸었다. 미즈 홈스가 놓치지 않고 전화를 받는 시간은 헌틀리 브링클리 리포트가 방송될 때뿐이었으므로. 미즈 홈스는 뉴스 중독자였다. 앤드루는 매일 그 시간에 전화를 걸었는데 딱 한 번 거른 날이 바로 그 전날이었다. 전날 그는 하워드를 찾아가서 설득한 끝에 관리인용 열쇠를 받아냈다. 미즈 홈스가 얘기한 바로 그런 사고가 일어났으리라고 생각한 탓이었는데…… 다만 한 가지, 멍이나 골절 정도가 아니라 그녀가 아예 죽었으리라고, 홀로 죽어 누워 있으리라고 생각한 점이 달랐다. 문을 따고 들어간 앤드루는 가슴이 쿵쾅거렸다. 피아노선이 빽빽하게 쳐진 캄캄한 방에 들어선 고양이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걱정했던 광경은 보이지 않았다. 주방 카운터에 버터 접시가 나와 있었는데 뚜껑을 덮어놓았는데도 어찌나 오래됐는지 곰팡이가 잔뜩 피어 있었다. 그는 7시 10분에 들어갔다가 5분 만에 나왔다. 아파트를 휙 훑어보면서 욕실도 들여다보았다. 욕조는 물기가 없었고 수건도 엄격하다 싶을 만큼 가지런했으며, 여기저기 달린 손잡이들은 물 자국 하나 없이 잘 닦인 채 금속광택을 되비쳤다.

앤드루는 그녀가 얘기한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러나 앤드루는 그녀 얘기를 거짓말로 여기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기가 한 얘기를 정말로 ‘믿고 있었다.’

앤드루가 다시 뒷거울로 눈을 돌리자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미즈 홈스가 보였다. 앤드루는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사라지기에 앞서 저런 행동을 하는 미즈 홈스를 너무나 여러 번 보았다.

4

앤드루는 미즈 홈스가 따뜻하게 머물 수 있도록 히터를 켜놓은 채 차 트렁크로 향했다. 그러고는 트렁크에 넣어둔 여행가방 두 개를 보고 또 한 번 움찔했다. 가방은 흡사 덩치는 커다란데 속은 좁은 성난 사내들한테 수없이 걷어차인 몰골이었다. 감히 미즈 홈스 본인에게 하지 못한 짓을 가방에 저지른 모양새였다. 만일 앤드루가 함께 갔더라면 그가 그 꼴이 되었을지도 몰랐다. 비단 미즈 홈스가 여성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녀가 검둥이인 탓이었다. 아무 상관도 없는 곳에 끼어들어 시끄럽게 구는 건방진 북부 출신 검둥이인 탓이었다. 놈들은 그런 여성에게는 그런 대접이 적격이라고 여겼으리라.

문제는, 그녀가 부자 검둥이인 점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흑인 민권운동가인 메드거 에버스나 마틴 루서 킹 목사만큼이나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점이었다. 문제는, 그녀의 부티 나는 검은 얼굴이 《타임》의 표지에 실린 적이 있는 점, 그래서 동네 놈팡이들과 짜고 흠씬 두들겨준 후에 ‘뭐라굽쇼? 에휴, 나리, 이 근처선 그 비슷한 사람두 못 봤어요, 안 그냐, 야들아?’ 하는 식으로 빠져나가기가 조금 힘든 사람인 점이었다. 또 한 가지 문제는, 따뜻한 남부에 공장을 열두 군데나 운영하고 있는 홈스 치과재료공업의 유일한 상속인을 해칠 마음을 먹기가 쉽지 않은 점, 게다가 그 공장 열두 곳 중 한 곳이 미시시피 주 옥스퍼드타운에서 한 마을 건너에 있는 점이었다.

그래서 놈들은 감히 미즈 홈스에게 저지르지 못한 짓을 그녀의 가방에 저질렀던 것이다.

앤드루는 미즈 홈스가 옥스퍼드타운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보여주는 이 무언의 증거를 모멸감과 분노와 애정이 깃든 눈으로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맵시를 부리고 떠났다가 처참하게 망가진 몰골로 돌아온 가방의 상처가 그러하듯, 그 또한 말이 없었다. 그는 가방을 내려다보며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다가, 얼어붙은 대기에 하얀 숨을 토해냈다.

하워드가 도와주러 다가왔지만 앤드루는 가방 손잡이를 잡지 않고 조금 더 망설였다. ‘미즈 홈스, 당신은 누군가요? 진짜 당신은 어떤 분입니까? 때때로 어디로 사라지시는 겁니까? 몇 시간씩 며칠씩 사라져서 얼마나 나쁜 짓을 하시기에 거짓 기억을 만들어 당신 자신마저도 속이셔야 하는 겁니까?’ 그러다가 하워드가 도착하기 직전,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기이할 정도로 정확한 생각이었다. ‘당신의 나머지는 어디에 있는 겁니까?’

‘그런 생각은 관둬. 정작 고민해야 할 사람은 미즈 홈스뿐인데 그분은 개의치 않으시잖아. 그러니 너도 할 필요 없어.’

앤드루가 트렁크에서 가방을 꺼내어 건네주자 하워드가 받으며 나지막이 물었다.

“괜찮으신가?”

“내 보기엔 그런 것 같아.”

앤드루도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저 피곤하신 것뿐이야. 뼛속까지 피곤하실 테지.”

하워드는 고개를 끄덕거리고 나서 망가진 여행가방을 들고 현관 쪽으로 돌아섰다. 그는 검은 차창에 가려 거의 보이지도 않는 오데타 홈스를 향해 모자챙을 슬쩍 올려 보이고는 지체 없이 사라졌다. 부드럽고도 정중한 경례였다.

하워드가 떠나고 나서 앤드루는 차곡차곡 접어 트렁크 바닥에 넣어두었던 스테인리스스틸 막대 꾸러미를 꺼내어 조립했다. 휠체어였다.

1959년 8월 19일, 그러니까 이날로부터 5년 하고도 반년쯤 전에, 오데타 홈스의 양 무릎 아래는 그녀가 때때로 사라지곤 하는 몇 시간 또는 며칠과 마찬가지로, 흔적 없이 사라졌다.

5

그 지하철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데타 워커가 깨어 있었던 적은 단 몇 번에 불과했고, 그때의 기억들은 물 위에서 보면 따로 떨어진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기다란 등뼈의 여러 마디처럼 물 밑으로 연결된 산호섬 열도와 비슷했다. 오데타는 데타의 존재를 조금도 의심치 않았고 데타는 오데타라는 사람이 있는 줄 까맣게 몰랐지만…… 데타는 적어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 누군가가 그녀 인생을 망가뜨리는 중이라는 것쯤은 또렷이 눈치 챘다. 오데타는 데타가 몸을 차지한 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납득하려고 상상력을 총동원하여 온갖 이야기를 지어냈지만, 데타는 그녀만큼 똑똑하지가 않았다. 데타는 몇 가지 기억은, 적어도 몇 가지쯤은 기억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기억 못 할 때가 훨씬 많았다.

데타는 부분적으로나마 ‘공백’을 눈치 챘던 것이다.

데타는 그 도자기 접시를 기억했다. 그것만은 기억이 났다. 접시를 드레스 주머니에 몰래 집어넣던 일도, 혹시 ‘파란 여인’이 나타났는지 확인하려고 어깨 너머를 힐끗거리던 일도 기억났다. 도자기 접시는 파란 여인의 소유물이었으므로 반드시 확인해야만 했다. 그 도자기 접시가 ‘특벼란 것’임을 데타는 어렴풋이 이해했다. 이는 데타가 접시를 훔친 이유이기도 했다. 데타는 그 접시를 자신이 ‘서랍장’으로 부르는 곳으로 가져갔던 일을 기억했다. 연기가 피어오르는 쓰레기투성이 땅굴이었는데 데타는 언젠가 거기서 불에 탄 플라스틱 아기를 본 적이 있었다. 데타는 기억했다. 도자기 접시를 자갈땅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다음 발로 밟으려다 멈칫했던 일을, 입고 있던 새하얀 순면 팬티를 벗어서 접시를 숨겼던 주머니에 넣은 일을, 그러고 나서 늙다리 멍텅구리 하느님이 그녀뿐 아니라 세상 모든 여성에게 어설프게 만들어놓은 바로 그곳의 그 틈새에 왼손 검지를 조심스레 집어넣었던 일을 기억했는데 그 틈새에는 뭔가 좋은 점도 있었던 것이, 왜냐하면 데타는 그 짜릿한 기분을 기억했으므로, 그 틈새를 손가락으로 누르고 싶었으므로, 그러나 누르면 안 되는 줄을 기억했으므로, 발가벗었을 때, 순면 팬티 없이 원래 모습대로 세상을 대할 때 음부가 얼마나 짜릿한지 기억했으므로, 데타는 구두로, 자기가 신은 검은 에나멜 구두로, 그 구두로 접시를 밟아눌렀고, 그러고 나서야 비로소 손가락으로 틈새를, 발에 힘을 주어 파란 여인의 ‘특벼란’ 도자기 접시를 밟아눌렀듯이 그 틈새를 눌렀으며, 접시 둘레에 촘촘하게 그려진 파란색 그물무늬를 검은 에나멜 구두로 밟는 느낌을, 누르는 느낌을 기억했고, 아무렴, 서랍장 속에서 누르는 느낌을, 손가락과 발로 누르는 느낌을 기억했으며, 손가락과 발의 짜릿한 약속을 기억했고, 접시가 선명한 쨍 소리와 함께 깨질 때 이와 비슷하게 쨍하면서 그 틈새에서 뱃속을 향해 화살처럼 위로 치솟던 쾌감을 기억했고, 입술 새로 터져나오던 울음소리를, 옥수수 밭에서 내쫓겨 날아오르는 까마귀 떼 소리처럼 불쾌한 그 울음소리를 기억했으며, 깨진 접시 조각을 멍하니 내려다보다가 드레스 주머니에서 새하얀 순면 팬티를 천천히 꺼내어 다시 입던 일을, 기억 속에서 마치 밀물에 둥둥 떠내려온 잔디처럼 덧없이 표류하던 그 일의 이름을, 언젠가 들은 말로는 ‘발 끼우기’라고 부르는 그 일을, 그렇지, 볼일을 보려면 먼저 발을 빼고 볼일이 끝나면 다시 발을 끼워야 하니까, 먼저 반짝거리는 에나멜 구두 한쪽을 넣고 그다음엔 다른 쪽을 넣고, 그래, 팬티는 잘 입었고, 그러고 나서 팬티를 위로 쭉 끌어올린 일을, 무릎을 지나, 금방이라도 떨어져서 분홍빛 새살을 드러낼 듯 딱지가 앉은 왼쪽 무릎을 지나 팬티를 쭉 끌어올린 일을 기억했고, 아무렴, 어찌나 생생하게 기억했던지 일주일 전이나 어제가 아니라 방금 전 일인 듯싶었으며, 파티 드레스 끝단에 닿은 팬티 고무줄을, 흡사 크림처럼, 아무렴, 커피 잔 위에 딱 멈춰 있는 크림 주전자처럼 갈색 피부에 선명하게 대조된 하얀 순면을, 그 감촉을 기억했지만, 하지만 그 드레스는 농밀한 오렌지색이었고 팬티는 올라가는 대신 내려갔으며 흰색이긴 해도 순면이 아니었고, 속이 훤히 비치는 싸구려 나일론 팬티였으며, 가격뿐만 아니라 여러 모로 싸구려인 팬티였고, 그 팬티에서 발을 빼던 일을 기억했고, 그 팬티가 1946년형 다지 데소토의 바닥깔개 위에서 얼마나 빛났는지를, 아무렴, 얼마나 새하얬는지를, 얼마나 싸구려였는지를, 속옷으로 부르기도 민망한 그저 싸구려 팬티였음을, 싸구려 계집애였기에 싸구려가 돼도 괜찮았음을, 팔려고 내놓아도 괜찮았음을, 갈보 정도가 아니라 아예 싸갈기기 좋은 공중변소인 양 길바닥에 내놓아도 괜찮았음을, 데타는 기억했다. 또 데타는 기억했다. 둥그런 도자기 접시가 아니라 둥그런 사내 얼굴을, 술 취한 대학생처럼 보이는 사내의 놀란 얼굴을, 도자기 접시도 아닌데 파란 여인의 도자기 접시인 양 둥그런 얼굴을, 사내의 볼에 그려진 그물무늬를, 파란 여인의 ‘특벼란’ 도자기 접시처럼 파란 그물무늬를 기억했지만, 그것은 다만 네온 불빛이 빨간 색이었기에, 야한 네온 불빛 때문에, 데타가 할퀸 사내의 뺨에서 흐른 피가 어둠 속에서 술집 간판의 네온 불빛에 비쳐 파랗게 보였을 뿐, 사내는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이게 무슨 짓이야.” 하더니 창문을 열고 머리를 내놓은 다음 속을 게웠고 그때 주크박스에서 들려온 노래가 도디 스티븐스 노래였음을, 분홍색 끈이 달린 갈색 구두와 자주색 띠를 두른 파나마모자가 나오는 노래였음을, 사내가 토하는 소리가 흡사 자갈을 넣고 돌리는 콘크리트믹서 소리 같았음을 기억했고, 사내의 음경이, 방금 전만 해도 빽빽한 음모 사이에서 불쑥 치솟은 창백한 느낌표였던 음경이, 스르르 무너져서 구불텅거리는 흰색 물음표로 바뀌었음을, 데타는 기억했다. 또 데타는 기억했다. 사내가 크르럭거리며 토하던 소리가 멈췄다가 다시 시작됐음을, 그녀가 속으로 ‘이 새끼 아직 이쪽 분수대를 파기엔 경험부족이군.’ 하고 생각하며 손가락(지금은 길쭉한 손톱이 붙은 손가락)으로 발가벗은 자기 음부를, 발가벗었지만 지금은 음모가 텁수룩하게 돋아 완전히 드러나지는 않은 음부를 눌렀음을 기억했고, 그러자 예의 그 쨍한 느낌이 다시 몸속으로 파고들었고, 그 느낌은 쾌감인 동시에 통증이었으며(그러나 아무 느낌도 없느니보다는 훨씬 나았으며), 곧이어 사내가 그녀를 더듬더듬 붙잡고 고통스러워하는 목소리로 ‘야 이 보지 같은 깜둥이년아!’ 하고 소리쳤지만 그녀는 시종 웃기만 했고, 사내를 간단히 떠밀고 팬티를 낚아챈 다음 그녀 자리 쪽 차문을 열었으며, 사내가 필사적으로 내뻗은 손이 블라우스 등을 잡아채는 느낌을 뒤로 한 채 5월 밤공기 속으로, 진분홍색 네온 불빛이 일찍 핀 겨우살이꽃인 양 휘청거리는, 전쟁 후에 지은 어느 술집 주차장으로 달려나갔고, 팬티를, 번들거리는 싸구려 나일론 팬티를 드레스 주머니가 아니라 십대 여자아이나 쓸 법한 번쩍거리는 화장품이 가득 든 손가방에 쑤셔넣었으며, 그녀는 내처 달렸고, 불빛은 휘청거렸으며, 어느덧 그녀는 스물세 살이고 팬티는 팬티가 아니라 레이온 스카프였고, 그녀는 메이시스 백화점의 잡화 매장을 거닐다가 그 스카프를 태연하게 손가방에 집어넣었는데…… 당시 가격으로 1달러 99센트에 파는 스카프였다.

싸구려였다.

하얀 나일론 팬티처럼 싸구려였다.

싸구려.

그녀처럼.

데타가 거주하는 육체는 백만장자 상속녀의 것이었으나 데타는 알지 못했고, 상관도 없었다. 스카프는 흰색이었고, 가장자리는 파란색이었으며, 택시 뒷좌석에서 스카프를 보며 느낀 감각은 예의 그 쨍한 쾌감이었기에, 데타는 택시 기사도 잊은 채로, 한 손에 스카프를 들고 뚫어지게 들여다보며, 다른 손으로는 모직치마 아래 다리를 더듬더듬 올라가 하얀 팬티의 다리 고무줄을 들추었으며, 기다란 갈색 손가락 한 개를 펴서 주저 없이 단번에 볼일을 끝마쳤다.

그러다 보니 데타는 가끔 자신이 ‘여기’ 없을 때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가 궁금했다. 심란할 정도로 궁금한 의문이었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기에는 무엇보다 그녀의 욕구가 너무나 충동적이고 절박했기에, 데타는 그저 해야 할 일을 했다. 필요한 일을 했다.

아마도 롤랜드는 이해했으리라.

6

1959년 그해, 오데타는 어디를 가든 리무진을 타고 갈 수 있었다. 그 무렵에는 아버지가 아직 건재했던 까닭에 그녀가 아버지를 여의고 상속인이 된 1962년 당시만큼 엄청난 부자가 아니었는데도 그러했다. 오데타는 자기 명의로 신탁에 들어 있던 돈을 스물다섯 번째 생일 선물로 받은 덕분에 원하는 것을 거의 다 하면서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데타는 그 한두 해 전에 어느 보수주의 시사평론가가 만든 ‘리무진 진보주의자’라는 신조어를 무척이나 싫어했고, 실제로 그런 사람이면서도 그런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할 만큼 젊었다. 오데타는 청바지와 카키색 셔츠 몇 장을 습관처럼 입고 다닌다고 해서 자신의 본질적인 사회적 지위가 실제로 바뀌리라고 믿을 만큼 어리지는 않았고(그 정도로 어리석지도 않았다!), 리무진을 탈 여유가 있는데도 버스나 지하철을 이용한다고 해서 무언가 바뀔 거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지만(하지만 앤드루가 자기 행동 때문에 마음 아파하고 괴로워하는 줄도 모를 정도로 자기중심적이지는 않았다. 앤드루는 그녀의 행동을 개인적인 거절로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이러한 태도가 때로는 본질을 (적어도 겉으로는) 압도할 수 있으리라고 믿을 만큼 어렸다.

1959년 8월 19일 저녁, 오데타는 이러한 태도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두 다리의 절반과…… 의식의 절반으로.

7

훗날 거대한 물결이 될 그 운동에 오데타는 처음에는 솔깃했고, 나중에는 빠져들었으며, 끝내는 사로잡혔다. 1957년, 그러니까 오데타가 몸담게 된 그해에, 훗날 ‘흑인민권운동’으로 알려지게 된 운동은 아직 이름 없는 움직임에 불과했다. 오데타는 운동의 배경을 조금은 아는 상태였고, 평등을 쟁취하기 위한 투쟁이 노예해방선언 때가 아니라 첫 번째 노예 수송선이 미국 땅(조지아 주, 영국이 범죄자와 채무자를 갖다 버리려고 만든 식민지)에 닿았던 바로 그 순간에 시작된 줄도 알았지만, 그럼에도 오데타는 늘 그 운동이 바로 그 장소에서 바로 그 한마디로 시작되었다고 생각했다. 그 한마디는 이러했다. “난 안 비킬 거예요.”

그 장소는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어느 시내버스 안이었고, 그 한마디를 한 사람은 로사 리 파크스였으며, 로사 리 파크스가 비키려 하지 않았던 자리는 시내버스 앞좌석이었다. 그녀가 가야 할 곳은 물론 버스 뒷좌석, 바로 ‘짐 크로 법’에 따라 지정된 흑인 전용좌석이었다. 먼 훗날 오데타는 동료들과 함께 「우리 흔들리지 않으리」를 노래할 때마다 늘 로사 리 파크스를 떠올렸고 그럴 때면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군중과 함께 팔짱을 끼고 ‘우리’를 노래하기는 무척이나 쉬운 일이었다. 두 다리가 없는 여성에게조차도 쉬운 일이었다. 너무나 쉽게 우리를 노래했고, 너무나 쉽게 우리가 ‘되었다.’ 그러나 그 버스에, 낡디낡은 가죽깔개 냄새와 수년간 찌든 시가와 담배 냄새가 진동하던 그 버스에, 모서리가 둥그런 광고판마다 ‘L. S. M. F. T. — 럭키 스트라이크는 최고의 담배라는 뜻입니다.’ 또는 ‘천국은 스스로 정해놓고 다니는 교회에 있습니다.’ 아니면 ‘마시자, 오발틴! 마셔보면 압니다!’ 내지는 ‘체스터필드 — 스물한 가지 연초로 만든 맛있는 담배 스무 개비’ 따위 문구가 적힌 그 버스에, ‘우리’는 없었다. 버스 기사의 뜨악한 눈초리에, 주위를 둘러싼 백인들 속에, 마찬가지로 뜨악하게 쳐다보는 흑인들의 눈길 속에, ‘우리’는 없었다.

‘우리’는 없었다.

행진하는 수많은 군중도 없었다.

오직 로사 리 파크스와 훗날 거대한 물결을 일으킨 단 한 마디 말이 있었다. “난 안 비킬 거예요.”

오데타는 생각했다. ‘내가 그럴 수만 있다면, 그토록 용감하다면 남은 평생 동안 행복할 텐데. 하지만 내 안에는 그런 용기가 없어.’

처음 파크스 사건 기사를 읽었을 때 오데타는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관심은 차츰차츰 일어났다. 처음에는 소리 없이 남부를 뒤흔들기 시작했던 인종 갈등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오데타의 상상력에 불을 지폈는지 밝히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기사를 읽고 나서 한두 해 지났을 무렵, 오데타와 꾸준히 만나던 청년이 그녀를 가끔 그리니치빌리지에 데려가기 시작했다. 마침 그곳에서 공연하던 (대개 백인인) 젊은 포크송 가수들이 충격적인 노래 몇 곡을 막 연주 목록에 끼워넣은 참이었다. 망치를 불끈 쥔 존 헨리가 증기기관 망치를 이겼다느니(그러고는 그만 죽고 말았다네, 저런, 저런), 또 바브리 앨런이 상사병 걸린 젊은 구혼자를 냉정하게 내쳤다느니(젊은이는 수치심을 못 이겨 그만 죽고 말았다네, 저런, 저런) 하는 케케묵은 노래들 사이에, 어느 날 문득 이런 내용을 담은 노래가 등장했다. 도시에서 빈털터리로 설움을 받는 처지가 어떤지, 능력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피부색이 글러먹었다는 이유만으로 직업을 잃는 심정이 어떤지, 피부색이 시커먼 주제에 감히, 저런, 오오, 저런,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의 울워스 백화점 식당 백인 전용좌석에 앉았다가 감방에 처박혀 백인 간수 나리한테 채찍질당하는 심정이 어떤지 등등.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오데타는 그제야 비로소 자기 부모에 대해, 조부모에 대해, 또 증조부모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 『뿌리』를 읽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오데타는 알렉스 헤일리가 『뿌리』를 쓰기는커녕 쓸 생각을 하기도 전의 다른 시공에서 살아가는 중이긴 했으나, 그렇다고는 해도 자기 조상들이 백인에 의해 사슬 채워진 채 끌려왔던 때가 그리 오래전이 아님을 그토록 늦은 나이에 깨달은 점은 역시 석연치 않았다. 물론 ‘사실’로서 인식한 적은 예전에도 있었지만 이는 수학 방정식과 마찬가지로 감정이 배제된 단순한 정보였을 뿐, 삶과 긴밀하게 연관된 것이 아니었다.

오데타는 자기가 아는 사실을 모두 더해 보았고, 그 초라한 결과에 경악했다. 어머니가 아칸소 주 오데타 출신이고 (외동딸인) 자기 이름도 어머니 고향에서 따온 줄은 익히 아는 바였다. 시골 마을의 치과의사였던 아버지가 치아 덧씌우기 치료법을 고안하고 특허를 출원한 사실, 또 그 특허가 10년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가 하루아침에 그를 웬만큼 사는 부자로 만들어준 사실도 익히 아는 바였다. 아버지는 특허권을 기다리던 10년 동안, 또 돈이 슬슬 굴러들어오기 시작하고 나서 4년 동안 치과 치료법을 몇 가지 더 고안했는데 주목적은 대개 교정이나 성형이었다. 이후 그는 아내와 (첫 특허권을 인가받은 지 4년째 되던 해에 태어난) 딸을 데리고 뉴욕으로 이주했고, 곧바로 홈스 치과재료공업이라는 회사를 창업하여 지금은 항생제 부문의 브리스틀 마이어스 스퀴브와 맞먹는 회사로 키워냈다.

하지만 오데타가 자신이 태어나기 전과 자신이 어렸을 적에 부모님은 어떻게 사셨냐고 물었을 때, 아버지는 딸에게 가르쳐주려 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무엇이든 말해주었지만 아무것도 ‘가르쳐주려’ 하지는 않았다. 그 시절 이야기만큼은 딸로부터 차단해 두었던 것이다. 한번은 오데타의 어머니인 앨리스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댄, 얘한테 그때 얘기 좀 해줘요. 왜 당신이 포드 차를 몰고 지붕 있는 다리를 지날 때 웬 패거리가 총을 쏜 적 있었잖아요.”

불콰하게 취했을 때나 기분이 좋을 때면 가끔 어머니를 앨리라고 부르던 아버지가 이때에는 입 다물라는 듯 찌푸린 표정으로 노려보았고, 늘 참새처럼 심약했던 어머니는 자리에 앉아 잔뜩 움츠린 채로 입을 다물었다.

그날 저녁 이후 오데타는 어머니에게 따로 몇 번 캐물어보았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물었더라면 무언가 알아냈을지도 모르지만, 아버지가 입을 다문 이상 어머니도 입을 열려 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이미 깨달았던 것이다. 그녀의 남편에게 과거는, 즉 친척들은, 불그죽죽한 흙길은, 유리창도 없이 덜렁 커튼 한 장만 달아놓은 창문은, 온갖 구타와 학대는, 원래 밀가루 포대였던 것을 옷 대신 입고 다니던 이웃 아이들은, 이제 그에게 말끔하게 덧씌운 새하얀 보철 뒤의 썩은 이와 같았다. 아버지는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고 어쩌면 말할 수 없었는지도 몰랐다. 어쩌면 그 시절의 기억만 기꺼이 삭제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얗게 덧씌운 보철은 곧 센트럴 파크 남로의 그레이말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그들의 삶 자체였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철벽같은 장막 뒤에 감추어져 있었다. 아버지가 과거를 어찌나 꼭꼭 숨겨두었던지 오데타로서는 파고들 틈새가 하나도 없었다. 완벽하게 덧씌운 장막을 파고들어 진실의 목소리를 들을 방법은, 전무했다.

‘데타’는 저간의 사정을 알았다. 그러나 데타는 오데타의 존재를 몰랐고 오데타 역시 데타의 존재를 몰랐기에, 데타의 위아래 치열 또한 철문처럼 매끈하고 굳건하게 닫혀 있었다.

오데타는 어머니의 수줍음뿐 아니라 아버지의 한결같은(또는 벙어리 같은) 우직함도 물려받은 딸이었다. 그런 오데타가 지난날에 관해 아버지에게 캐물을 작정을 한 때는 단 한 번, 어느 날 저녁 아버지의 서재에서였다. 그때 오데타는 아버지가 거절하려 하는 요청은 그녀가 마땅히 받아야 할 투자신탁 같은 것이라고, 받을 기약도 없고 더 불어날 가망도 없는 투자신탁 같은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버지는 읽고 있던 《월 스트리트 저널》을 조심스레 툭툭 털었고, 이내 덮었다가, 아예 접어서 기다란 전등 옆에 있는 작은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뒤이어 테 없는 철제 안경을 벗어서 신문 위에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딸을 바라보았다. 거의 수척하다 싶을 만큼 날씬한 이 흑인 남성은 몹시도 곱슬곱슬한 흰머리가 슬슬 뒤로 밀려나는 중이었고, 둥그렇게 드러난 관자놀이에는 용수철인 양 구불구불한 정맥이 불끈거렸다. 아버지는 이렇게만 대답했다. “오데타, 난 그 시절 이야기는 안 하련다. 생각하기도 싫구나. 해봐야 어차피 아무 의미도 없다. 세계는 이미 변해 버렸으니.”

아마도 롤랜드는 이해했으리라.

8

그늘 속의 여인이라고 적힌 문을 열었을 때, 롤랜드는 자기가 본 광경을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해하든 못하든 상관없음을 그는 곧 깨달았다.

그곳은 에디 딘이 사는 세계였다. 그러나 보이는 것이라고는 오직 어지럽게 일렁이는 빛과 사람과 파는 물건뿐이었다. 롤랜드가 평생 본 것보다 훨씬 많은 물건이 한데 모여 있었다. 여성이 쓰는 물건으로 보였고, 파는 것임이 분명했다. 어떤 것은 유리장 안에 들어 있었고 어떤 것은 멋지게 진열되어 있었다. 저쪽 세계의 풍경이 이쪽 세계의 문틀 바깥으로 물 흐르듯 사라져가는 와중에 중요한 것은 오직 세계의 움직임뿐, 물건은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문은 여인의 눈이었다. 에디가 공중 마차의 복도를 걸어갈 때 그랬듯이, 롤랜드는 여인의 두 눈을 통해 보는 중이었다.

한편 에디는 놀라서 딱 얼어붙은 상태였다. 손에 든 리볼버가 바르르 떨다가 살짝 아래로 기울었다. 총잡이는 거뜬히 리볼버를 빼앗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 있기만 했다. 그것은 총잡이가 오래전에 배운 속임수였다.

문을 통해 보이던 광경이 갑자기 휙 틀어졌기에 총잡이는 몹시 어지러웠다. 그러나 에디는 갑작스럽게 바뀌는 풍경을 총잡이와 나란히 보았으면서도 왠지 아무렇지 않은 기색이었다. 롤랜드는 영화를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반면 에디는 영화를 수없이 많이 보았고, 이때 그가 보고 있던 광경은 「할로윈」이나 「샤이닝」 같은 영화에서 등장인물의 시점이 움직이던 방식과 비슷했다. 에디는 심지어 이런 장면을 찍을 때 사용하는 장비를 뭐라고 부르는지도 알았다. 스테디캠. 분명 그런 이름이었다.

“「스타워즈」에도 이런 장면이 있었어. 죽음의 별에서. 엑스윙이 골짜기를 날아다닐 때 말이야, 기억 안 나?”

에디가 중얼거렸지만 롤랜드는 말없이 쳐다보기만 했다.

롤랜드의 눈에는 문으로 보이던 공간에 갑자기 두 손이 나타났다. 암갈색 손이었다. 에디는 이미 일종의 마술 영사막을 보는 중이라고 생각했는데…… 다만 이 영사막은 상황이 허락하기만 하면 영화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도 있을 듯 보였다. 남자 주인공이 현실 세계로 걸어 나왔던 「카이로의 붉은 장미」처럼. 그러고 보니 끝내주는 영화였다.

에디는 그 영화가 얼마나 끝내줬는지를 그제야 깨달았다.

다만 에디가 들여다본 문 저편은 아직 「카이로의 붉은 장미」가 만들어지기 전의 세계였다. 물론, 배경은 뉴욕이었다. 희미하게 들리는 택시 경적소리로 보아 틀림없었다. 장소는 에디도 가본 적이 있는 뉴욕의 어느 백화점이었는데…… 그런데 왠지…… 무언가……

“꽤 오래돼 보여.”

에디가 중얼거렸다.

“네가 살던 때보다 더 앞선 시대인가?”

총잡이가 묻자 에디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겠네. 그런 것 같아.”

“어서 오십시오, 워커 고객님.”

누군가의 떨떠름한 목소리가 들렸다. 문을 통해 보이는 광경이 너무나 급작스럽게 위로 치솟는 바람에 에디마저도 조금 어지러울 정도였다. 뒤이어 여성 판매원의 얼굴이 보였는데 에디가 보기에는 암갈색 손의 주인과 구면임이 분명했다. 아는 사이이긴 해도 손 주인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듯 보였다. 아니면 양쪽 다였거나.

“오늘은 어떤 걸 찾으십니까?”

“이걸로 줘.”

암갈색 손의 주인이 집어든 것은 파란색으로 테를 두른 흰색 스카프였다.

“아가씨, 포장할 필요 없어. 그냥 봉투에 넣어줘.”

“계산은 현금, 수표 어느 쪽으로……”

“현금. 항상 현금이었잖아, 안 그래?”

“예, 알겠습니다, 워커 고객님.”

“알아봐줘서 고마워, 아가씨.”

에디는 판매원이 돌아서기 전에 얼굴을 살짝 찌푸린 장면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내심 ‘건방진 검둥이’로 여기는 여자한테 그리 불렸기 때문인지도 몰랐다(이 또한 에디가 역사책을 읽다가 또는 길거리에서 굴러먹다가 터득한 지혜가 아니라 영화관에서 습득한 지식 덕분에 떠오른 생각이었다. 문 너머로 보이는 광경이 꼭 1960년대에 찍었거나 당시를 배경으로 한 영화의 한 장면 같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면 시드니 스타이거와 로드 포이티어가 주연한 「밤의 열기 속으로」라든가.). 하지만 어쩌면 그보다 훨씬 단순한 이유 때문일 수도 있었다. 롤랜드가 찾는 ‘그늘 속의 여인’은 피부색을 따지기에 앞서 퍽이나 무례한 년이었다.

어쨌거나 상관없는 일 아닌가?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에디가 관심을 둔 것은 단 한 가지뿐이었고, 그 한 가지란 바로 이 염병할 세계로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