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르벨 바르데츠키 Bärbel Wardetzki

 

 

전 세계 베스트셀러 『따귀 맞은 영혼』의 저자. ‘상처받은 마음’을 전문적으로 치유하는 심리학자이자 심리 상담가로서 32년간 자존감에 상처를 입고 각종 심리 장애와 중독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치료해 왔다. 1981년 심리학 디플로마(학·석사 통합과정 학위) 취득 후 미국으로 건너가 게슈탈트 심리치료를 공부했고, 독일로 돌아온 뒤에는 10년 가까이 그뢰넨바흐 심인성질환 전문병원에서 근무했다. 그곳에서 거식증이나 폭식증과 같은 증상이 자존감 훼손과 깊은 관련이 있음을 발견한 바르데츠키는 그때부터 모든 잘못을 ‘내 탓’으로 돌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상처투성이 세상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상처를 이겨 내는 힘을 기르는 것이라고.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 모든 상처를 자신과 관련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부터 바꿔야 한다. ‘나의 잘못’과 ‘너의 잘못’을 분리하고 무조건 내 탓도 무조건 남 탓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책임지지 않아도 될 부당한 모욕과 이유 없는 차별, 끝없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책은 퉁명스런 말 한마디, 불친절한 행동 하나하나에 쉽게 상처받고 자존심이 상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상처에 올바르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려 준다.
배르벨 바르데츠키는 현재 뮌헨에서 심리 상담소를 운영하며 대인관계에 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치료하고 있다. 독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심리학자로서 세계 곳곳에서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법’에 대한 활발한 강연을 펼치고 있으며, 독일 공영방송 ARD··ZDF··NDR··독일문화방송 등을 통해 마음이 아픈 사람들에게 무료로 심리 상담을 해 주고 있다. 『따귀 맞은 영혼』을 비롯해, 『 여자의 심리학』, 『 너에게 닿기를 소망한다』 등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글쓰기를 계속해 왔고, 신작이 출간될 때마다 전 세계 독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지지를 받는 심리치료 분야의 최고 권위자이다.

 


옮긴이 두행숙

 

서강대학교 독어독문학과를 졸업하고 독일 뒤셀도르프대학교에서 독일문학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한국교원대, 충북대, 중앙대 등에서 독일문학과 철학을 강의했고, 현재 서강대에서 독일문학, 독일문화사, 독일어를 강의하며 번역 활동을 하고 있다. 주요 번역서로는 『스마트한 생각들』, 『스마트한 선택들』, 『시간이란 무엇인가』, 『꿈꾸는 책들의 도시』, 『의사결정의 함정』, 『헤겔의 미학강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있다.


Prologue

세상이 당신을 함부로 하게
내버려 두지 마라

 

 

 

 

 

나는 매일 상처받은 마음을 지키는 맹수와 만난다. 그 맹수는 엄청나게 사나워서 조금만 가까이 가도 더 이상 건드리지 말라며 으르렁댄다. 결국 나는 상처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보지도 못한 채 첫 번째 상담을 마칠 때가 많다. 그 맹수의 이름은 ‘열등감’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다른 사람에게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주는 것을 거부한다. 멋지고 완벽한 모습으로 자신을 꾸미거나 아니면 세상과 거리를 두고 자기만의 성을 쌓고 살아간다. 그들은 누군가 진심으로 다가와 주길 바라면서도 정작 자기 마음은 꽁꽁 숨긴다. 그러나 맹수에게 몸을 맡기고 상처받은 마음을 감추기만 하면 자기도 모르는 새 정말 소중한 걸 잃을 수 있다. 바로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마음, 자신 있고 당당하게 인생을 살아가게 해 주는 자존감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이 책에서 누구나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그 맹수를 길들이고자 한다. 그리고 우리를 함부로 대하는 수많은 사람들과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받는 세상에서, 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방법을 알려 주려고 한다.

 

32년간 마음이 아픈 사람들을 치료하며 깨달은 게 있다. 상처를 주고받는 일은 삶 곳곳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으며 평생 동안 계속된다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폭언, 폭행, 학대, 버림받음 같은 심각한 사건이 있을 때만 발생하는 게 아니다. 감정이 상하는 모든 일들이 상처와 관련이 있다. 점심 먹으러 갈 사람이 없을 때, 반갑게 한 인사를 무시당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나만 빼놓고 몰래 회식을 갔을 때, 뒷말을 들었을 때, 동등한 파트너라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아랫사람 취급을 당했을 때, 내가 성공시킨 업무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할 때, 사랑하는 사람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아무리 노력해도 원하는 것을 이루지 못할 것 같은 불안감이 들 때 ······,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우리에게 상처를 입힌다. “나에게는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아”라고 믿고 싶겠지만 상처받는 상황은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것도, 사라지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상처를 이겨 내는 힘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처받았다는 사실을 시인해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드러내고 치유하기보다는 가능한 꽁꽁 감추고 혼자 감당하려고 한다. 그리고 상처 준 사람에게 따지는 대신 모욕감을 끌어안고 혼자 괴로워하는 쪽을 선택한다. 감정을 터뜨려 버리면 지금까지 쌓아 온 모든 관계가 끝장나 버릴 것 같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처받은 마음을 외면하면 상처에서 벗어나기는커녕 발목을 잡히게 된다.

특히 습관적으로 남에게 모욕을 주는 사람들은 기분이 상했다는 것을 숨기려고 하는 우리의 약한 마음을 빌미로 죄책감 없이 무시하는 말들을 쏟아낸다. 그런 악순환을 끝내려면 고통도, 슬픔도, 분노도, 생생하게 느끼면서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해야 한다.

그리고 삶을 단단히 지탱해 주는 자존감 안에서 당당하게 관계를 맺어야 한다. 자존감이 약한 사람들은 모욕적인 일을 당했을 때 제대로 방어하지 않고 어물쩍 넘어간다. 화를 냈다가 더 큰 상처를 받을까 봐 겁이 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마음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자신도 모르게 남들이 좋아하는 방식에 순응하려고 하고, 점점 남들의 칭찬과 인정에 매달리게 된다. 더 큰 문제는 한쪽은 상처를 받기만 하고 다른 한쪽은 주기만 하는 부정적인 관계가 고착화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폄하하고 비하하는 말을 서슴없이 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은 없는지 생각해 보려고 하는 상대의 착한 마음을 이용해 끝없이 잘못을 전가하고 자책하게 만든다.

서로 진심으로 통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내가 책임질 필요가 없는 잘못은 반드시 상대방에게 되돌려 주어야 한다. ‘나의 잘못’과 ‘너의 잘못’을 분리하고 무조건 내 탓도, 무조건 남 탓도 하지 않을 때 비로소 나를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과 이유 없는 차별, 끝없는 열등감에서 벗어날 수 있다. 적어도 내 마음에서는 그렇게 선을 그어야 한다. 절대 나 자신을 억울한 죄인으로 만들면 안 된다.

조련사들은 호랑이를 길들일 때 살아 있는 먹이를 주지 않는다. 호랑이가 맹수의 본성을 깨닫고 포악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마음속 맹수를 길들이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피가 철철 흐르는 살아 있는 상처를 계속 마음속에 담아 두면 맹수는 더욱 길길이 날뛰며 나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까지 상처를 입힌다. 그러므로 상처를 마주보고 자신의 목소리로 말해야 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나는 세상에서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이다’라고 응원해 주어야 한다.

 

이 책을 쓰기 전, 30년 넘게 모아 둔 진료 기록들을 다시 한 번 펼쳐 보았다. 그 안에는 불친절한 태도 같은 사소한 상처부터 노골적인 조롱이나 따돌림, 가까운 사람과의 이별 같은 절대 죽지 않고 되살아나는 ‘좀비 상처’까지, 인생을 좀먹는 크고 작은 상처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며 작은 상처를 우습게 여기고 방치하는 게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인지 깨달았다. 결국 우리의 마음을 매일 조금씩 주눅 들게 하고 위축되게 만드는 건 티끌처럼 작은 것들이니까.

삶은 상처투성이다. 그러나 똑같이 부당한 일을 당해도 어떤 사람은 상처를 입고 어떤 사람은 상처를 입지 않는다. 그 차이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마음에 달려 있다. “중요한 것은 부당한 대접이나 모욕을 받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이를 견뎌냈느냐다”라는 세네카의 말처럼,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상처가 인생을 망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누군가 나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을 그냥 덮고 지나가지 마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이가 많고 직위가 높다고 해서 상대가 나를 마음대로 휘두르게 둬서는 안 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서 나의 가치를 찾으려고 해서도 안 된다. 나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다. 열등감도 있고 단점도 많지만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다. 그러니까 내가 허락하지 않는 이상 ‘너는 나에게 함부로 상처를 줄 수 없다’는 단단한 마음을 갖고 삶을 헤쳐 나가길 바란다.

 

배르벨 바르데츠키



 

 

 

 

 

할머니는 언제나 가지를 소금에 절여 물기를 짜낸 다음 요리를 시작했다.

“왜 가지에 소금을 뿌리시는 거예요?”

“그래야 가지가 울거든. 사람처럼 가지도 울어야 쓴맛이 없어진단다.”

_라픽 샤미, 『1001개의 거짓말』

 

 

 

상처라는 주제에 대해 오래 다루면 다룰수록, 나는 그것이 우리의 삶에 광범위하면서도 숙명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느낀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간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우리 자신도 매번 상처 입는다.

마음에 상처를 받는다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는 가운데 느닷없이 따귀를 맞는 것이나 다름없다. 신체적 아픔보다는 모욕감과 수치심에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고 자신이 잘못한 것도 아닌데 고개를 들지 못한다. 그때 상처받은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 반응을 보인다. 판단력과 자제력을 잃고 원인 제공자를 향해 분노하거나, 모든 화살을 자기 자신에게 돌리고 스스로를 깎아내리며 괴로워하거나. 그러나 분노든 자책이든 항상 더 많이 다치는 쪽은 우리 자신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마음의 상처는 대부분 ‘마음 상함’에서 비롯된다. 마음 상함이란 어떤 말이나 행동 때문에 자존감에 상처를 받았다고 느끼는 것을 말한다. 즉, 자존감이 균형을 잃고 열등감으로 기우는 순간 사람들은 ‘마음이 상한다’라는 감정을 느끼게 된다.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건들은 일상생활에서 수도 없이 일어난다. 나보다 한참 늦게 온 손님의 음식이 먼저 서비스 될 때 같은 사소한 일부터, 퇴근 후 저녁 모임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아무도 오라고 하지 않을 때, 용기 내서 데이트 신청을 했는데 단칼에 거절당했을 때, 상사가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부정적으로 대꾸할 때, 누군가 앞에서 새치기를 하는 바람에 표가 매진됐을 때 등등 의견이 상충하고, 따돌림 당하고, 개인적 욕구가 충족되지 못하는 모든 상황들 속에 상처는 숨어 있다.

상처를 일으키는 관계를 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가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다. 애인, 부부, 친구, 직장동료처럼 교류가 많은 관계뿐만 아니라 생전 처음 보는 타인이나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에게도 우리는 얼마든지 상처를 받을 수 있고, 줄 수도 있다.

내 친구는 한 정치인을 거의 혐오에 가깝게 싫어하는데 그 이유는 그가 어느 인터뷰에서 여자배우를 성적으로 비하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배우도 아니고 영화나 방송 쪽 일을 하지도 않는다. 물론 여성 인권 운동가도 아니다. 하지만 그 방송을 보는 순간 여성으로서 모욕감을 느꼈고 그 정치인의 사과가 진실되게 느껴지지 않아 여전히 그를 보면 불쾌하다고 했다. 그의 발언은 그녀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 정치인과 그녀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말이다.

 

 

자기 자신을 향해 화살을 쏘지 마라

불교에는 ‘두 번째 화살에 맞지 말라’는 말이 있다. 다른 사람이 준 상처에 죄책감과 분노를 얹어 더 큰 상처를 받지 말라는 뜻이다. 첫 번째 화살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다른 사람이 어떤 말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할지 누가 예측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자신을 깎아내리고 엉뚱한 사람에게 분풀이를 하며 또 다른 상처를 만드는 것은 마음 먹기에 따라 얼마든지 피할 수 있다.

이것은 ‘또 다른 나’에게 보내는 조언이기도 하다. ‘또 다른 나’는 우리의 마음 깊은 곳에 살고 있는 상처받은 어린아이다. 이 아이는 생애 첫 2년 동안 부모로부터 진심어린 사랑과 따뜻한 스킨십을 받지 못했거나, 중요한 사람을 잃었거나,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경험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세상 밖으로 나오길 꺼리는 그림자 같은 존재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신뢰감을 쌓지 못한 채 성장하여 조금만 기분이 상해도 쉽게 상처받고 자존심이 깎였다고 생각한다.

평상시에는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모습 뒤에 숨어 얼굴을 드러내지 않지만 과거의 상처를 떠올리게 하는 일과 맞닥뜨리면 용수철처럼 튀어 나와 신경을 곤두세우고 방어 태세를 갖춘다. ‘네가 상처를 준다면 나도 똑같이 복수해 줄 것이다’라는 경계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또 다른 나’는 누군가 감히 상처를 주는 방식으로 자신을 다루려 한다는 것에 격분한다. 이때 적당한 분노 조절이란 있을 수 없다. 마음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같은 상처를 두 번 받았을 때 느끼는 모욕감과 아픔은 평상시 그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격렬하다.

그러나 내가 상처받은 만큼 상대를 아프게 한다고 해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식의 공격으로는 자신의 가치가 땅에 떨어진 것 같은 모멸감과 굴욕감에서 벗어날 수도 없고 속수무책의 곤혹스런 상황을 바꿀 수도 없다.

우리에게 모욕감이나 열등감을 안겨 주었던 사람을 한번 떠올려 보자. 창피함과 수치심 때문에 그 사람을 ‘태어날 때부터 나쁜 놈’으로 만들고 모든 책임과 잘못을 떠넘기며 발악하듯 욕한다. 자신이 누군가로부터 모욕을 당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게 너무 괴롭기 때문에, 그를 경멸하고 깔아뭉갬으로써 있는 힘껏 상처를 거부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상처만 거부하는 게 아니다. 그 사람과 다시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기회도 걷어차 버리게 된다. 일단 상대를 미워하기 시작하면 그가 옳은 말을 해도 반대 의견을 내고 싶어 입이 근질거리고 그가 선한 행동을 하면 가식적이라고 깎아내린다. 또 누군가 그 사람을 칭찬하면 이유 없이 화가 나고 그가 하는 일이 잘 풀리면 그를 이기고 말겠다는 욕망과 질투에 마음이 들끓는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이 정말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미워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큰 상처를 입게 되는 사람은 그 사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때로 받은 상처가 너무 클 때는 ‘또 다른 나’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숨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어린 시절 감당할 수 없는 충격적인 상황에서 상처를 들여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두려움과 절망의 늪에 빠져 버렸던 사람은 비슷한 상처 앞에서 똑같이 움츠러든다. 그들은 쉽게 우울증에 걸리고 자신은 능력 없고 사랑받을 수 없는 존재라며 스스로를 비하한다. 그래서 세상이 정해 주는 기준에 무조건 순응하거나 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아예 끊어 버리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고 하는 어리석은 행동을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상처가 두려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뒤로 물러나거나, 스스로를 열등하다고 깎아내리는 것은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골방에 처박혀 자기 연민에 빠지는 것 말고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상처투성이 세상에서 스스로 빛이 된 아이

프랑스 소설가 르 클레지오의 『황금 물고기』에는 예닐곱 살에 인신매매를 당한 아프리카 소녀 라일라가 나온다. 유괴당할 때 한쪽 청력을 잃은 라일라는 아스마라는 노파의 집에서 잔심부름을 하게 된다. 아스마는 라일라를 사랑했지만 아스마의 아들은 호시탐탐 라일라를 덮치려 했고 며느리는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히고 학대했다. 결국 라일라는 아스마가 죽은 뒤 그 집을 탈출해 자신의 삶을 찾아 나선다. 하지만 길 위에서의 삶은 녹록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라일라를 소유하고 지배하려 했다. 폭력과 억압의 공포는 어딜 가도 사라지지 않았고 더 나은 곳을 찾아 프랑스, 미국을 떠돌 때는 불법체류자로 쫓겨야 했다. ‘밤’이라는 뜻의 이름처럼 그녀의 인생은 앞이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뿐이었고, 그녀는 수많은 올가미와 그물 사이를 뚫고 바다로 나가야 하는 작은 물고기처럼 연약하기만 했다. 하지만 라일라는 포기하지 않았다. 현실을 바꿀 수도, 완전히 극복할 수도 없었지만 두려움에 무릎 꿇는 대신 스스로 빛을 찾아 떠났다. 그녀가 바라던 대로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물고기처럼 다른 사람들, 다른 사물들 사이를 누비며 살아가는” 여정을 선택한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순전히 자신의 의지와 노력으로 어머니의 땅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신은 인간이 견딜 수 있을 만큼의 시련만 준다고 하지만, 그 말을 믿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일이 계속될 때가 있다. 더 이상 상처를 견딜 수도, 새로운 희망을 찾을 수도 없는 것 같을 때 사람들은 절망한다. 입을 닫고, 눈과 귀를 닫고, 감정이 말라 죽을 때까지 마음의 문을 걸어 잠근다. 자신에게 상처를 주는 사람들에게 인생을 몽땅 내주고 자포자기해 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도 한 발 한 발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야 햇살이 비추는 곳을 만날 수 있는 법이다. 비록 가시덤불 같은 세상이었지만 라일라가 아스마의 집에서 탈출하고 프랑스로,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향하는 여정을 절대 멈추지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

인간관계에서 갈등이 일어나는 이유는 오랫동안 서로에게 받은 상처를 그냥 덮어두었기 때문이다. 상담실을 찾는 부부들 중에는 별거나 이혼을 결심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상대방에게 받은 상처를 끌어안고 몇 십 년을 ‘그냥 참고’ 살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근본적인 상처는 마음에 쌓아둔 채, 고작 약속 시간을 어긴 것으로 시비를 거는 것이다. 사회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사람이나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근본적인 상처는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삶에 놓인 가시덤불을 깨끗이 걷어 낼 방법은 없다.

한 가지 희망은 그 모든 나쁜 경우에도 선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안젤리나는 3년을 만난 남자친구가 한 번도 정식으로 프러포즈를 한 적이 없다는 것 때문에 괴로워했다. 예전만큼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는 거였다. 남자친구에게 프러포즈 얘기를 꺼내 보라고 했지만 자존심 때문에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녀는 공연히 남자친구의 재미없는 농담과 식상한 데이트 코스를 트집 잡으며 화를 냈다. 남자친구 입장에서는 그녀가 별것 아닌 일로 화를 내는 것 같아 오히려 서운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친구 역시 부모님에게 교제 사실을 알리지 않는 그녀 때문에 마음이 상해 있었다. 그는 그런 그녀의 행동을 ‘인생을 함께할 만큼 널 믿지 못하겠다’는 것과 다름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그녀와 더 가까워지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얼마 후 안젤리나는 남자친구가 회사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화가 났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예정대로 휴가를 떠났다. 그러자 남자친구는 그녀가 자신과 미래를 생각하지 않는 게 분명하다고 확신하고 연락을 끊어 버렸다.

만약 그가 왜 부모님에게 교제 사실을 말하지 않는 거냐고 물었다면 어땠을까. 그녀 역시 프러포즈를 하지 않는 이유를 그에게 물었다면, 적어도 서로를 오해한 채 헤어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마음속에 담고 있는 상처는 서로에게 거는 기대가 큰 친밀한 관계일수록 더욱 치명적일 수 있다.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기 때문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들은 상대가 자신의 상한 마음을 알아서 보살펴 주기를 바란다. 하지만 말하지 않는 상처를 치료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어떤 명의도 얼굴만 보고 병을 알아맞힐 수는 없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타인과 화목하게 지내지 못해서 불행해졌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진실은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과 화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도 불화를 일으키게 되는 것이다.

마음의 상처는 타인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앞에는 엄청나게 큰 맹수가 버티고 앉아서 누군가 상처를 건드리려고 하면, 더 이상 가까이 오면 살점을 물어뜯을 거라며 으르렁댄다. 결국 그 경계 앞에서 사람들은 다투고 오해를 키우며 멀어진다.

철학자 헤겔의 말처럼 마음의 문을 여는 손잡이는 안쪽에만 달려 있다. 내가 먼저 열지 않으면 밖에 있는 사람은 내 마음의 귀퉁이조차 보지 못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실망하고 상처받고 싶지 않다면 꽁꽁 닫아 둔 마음의 문을 열고 말해야 한다. 지금 내 마음이 아프다고, 있는 그대로만 이야기하면 되는 것이다.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지만

그것을 이겨 내는 일로도 가득 차 있다.

_헬렌 켈러

 

 

 

독일 일간지 《쥐트도이체 차이퉁》에 미국 영화배우 모건 프리먼의 인터뷰 기사가 실렸다. 어떤 주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자의 첫 질문은 상당히 도발적이었다.

 

기자 : 내가 당신에게 ‘니그로’(흑인을 비하하는 말)라고 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프리먼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기자 :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프리먼 : 만약 내가 당신에게 ‘바보 독일 암소’라고 말하면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기자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요.

프리먼 : 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죠?

기자 : 난 관심이 없으니까요.

프리먼 : 나도 똑같습니다.

기자 : 그건 일종의 눈속임 아닌가요?

프리먼 : 당신이 나를 ‘니그로’라고 부르면 문제는 당신에게 있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잘못된 단어를 사용하고 있으니까요. 나는 관심을 끊어 버림으로써 문제를 갖고 있는 당신을 혼자 내버려 둘 겁니다. 물론 행동으로 나를 공격한다면 얘기는 달라지겠죠. 그러면 단언컨대 나 자신을 방어할 겁니다.

 

 

독이 든 사과를 삼키지 마라

상처에 대한 강연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말한다. “전 정말 상처받고 싶지 않아요. 누구에게도.” 우리 모두가 그렇다. 다른 사람에게 존중받고 세심한 배려를 받으며 서로의 마음에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상처 따위는 없이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모든 관계에서 그렇게 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피곤해하는 연인을 위해 이번 주말에는 만나지 말고 집에서 쉬라고 얘기했다. 그런데 연인은 고마워하기는커녕 데이트가 지겨워졌나 보네, 하며 서운해한다. 당신은 연인의 그런 생각을 예측할 수 있었을까? 또 다른 상황을 생각해 보자. 당신은 친구들이 별명을 부를 때마다 기분이 나쁘다. 그런데 소개팅을 하는 장소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가 당신을 발견하고 소리친다. “얼큰이!” 당신이 주의한다고 해서 그 입을 막을 수 있었을까?

아무리 이렇게 저렇게 애를 써도 우리 인생에서 상처를 일으키는 사건을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그러나 한 가지 위로가 되는 것은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다는 사실이다. 상처를 일으키는 사건을 나와 관련된 문제로 받아들이고 마음이 상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를 선택할 권리는 전적으로 나에게 있다는 말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다. 인도를 여행하던 백인 남성이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청년들이 들어오더니 식당 주인에게 말했다.

“저쪽에 앉아 있는 흰 오랑우탄은 대체 뭘 먹으러 왔답니까?”

주인은 조금 당황한 듯 백인 남성을 바라보았다. 키는 30센티미터 이상 더 클 것 같았고 어깨 근육은 자신의 허벅지보다 굵어 보였다. 그런데 그 육중한 손님은 아무 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식당 주인은 조금 안심한 듯 청년들을 향해 말했다.

“글쎄, 오랑우탄이 먹을 만한 건 여기 없는데 말야. 돈이나 배로 받는 거지 뭐.”

청년들은 백인 남성이 음식 먹는 모습을 보며 한참을 자기들끼리 키득거리다 식당을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