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은중

 

 

요리를 하기 전에는 음식이 그저 칼로리 충전 또는 남과 구별 짓는 연성 권력soft power, 이 둘 중 하나이거나 그 중간쯤이라고 여겼다. 그렇지만 2006년 요리를 시작한 뒤부터 ‘음식이 삶의 대부분’이라는 급진적 사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결국 20년간 해오던 기자를 그만두고 이탈리아로 요리유학을 다녀왔다. 많은 나라 가운데 이탈리아를 택한 건 ‘요린이’ 시절, 처음 만들어 먹었던 요리가 파스타였던 탓이다.

이탈리아 유학시절 이탈리아식 요리 스킬보다 올리브유, 치즈, 살루메, 와인 같은 식자재에 끌려 올리브 과수원, 치즈 공장, 와이너리 등을 열심히 찾아 다녔다. 개별 음식보다 그 음식을 이끌어내는 식생, 역사, 문화 등에 관심이 많다. 앞으로 서양 음식 문화의 발상지인 이탈리아를 오가며 이탈리아 음식을 탐닉할 계획이다. 지은 책으로 《독학파스타》, 《10대를 위한 음식인류사》, 《음식경제사》 등이 있다.




프롤로그

 

 

 

 

 

 

 

로마가 아닌 볼로냐로 간 기이한 여행자

 

사람들은 이탈리아 하면 으레 옛 로마 제국과 베네치아, 피렌체 같은 중세 도시국가를 떠올린다. 그래서 대다수 여행자들은 이탈리아 반도의 절정을 느낄 수 있는 밀라노-베네치아-피렌체-로마-나폴리를 다녀온다. 이는 1786년 독일의 대문호인 괴테가 선보였던 이탈리아 기행 루트와도 비슷하다. 당시 30대 초반의 괴테는 “로마에 들어섰을 때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고 말했을 정도로 이탈리아에서 큰 영감을 받았다. 괴테뿐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의 이탈리아 여행 코스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리고 미래에도 크게 변함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기이한 이탈리아 여행자다. 나의 여행은 이런 고전적인 이탈리아 여행 루트에서 한참 벗어났다. 로마-베네치아-나폴리 등을 대신해 내가 고른 도시는 볼로냐였다. 나는 2019년 이탈리아에 있는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에 유학을 다녀왔다. 학교를 졸업하고 레스토랑 인턴 실습을 마친 뒤, 한국으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볼로냐와 시칠리아에 각각 한 달씩 있다가 귀국했다.

볼로냐와 시칠리아를 고른 데에는 학교에서 강의를 했던 셰프들의 영향이 컸다. ICIF는 토리노가 주도인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주에 있다.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피에몬테는 프랑스 문화와 이탈리아 문화의 교차점에 있다. 그래서일까? 이들은 자신의 문화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다. 그런데 이 자부심 강한 피에몬테 사람들이 이탈리아 맛의 원조로 꼽는 도시가 바로 볼로냐와 시칠리아다.

볼로냐가 자리한 에밀리아로마냐주는 이탈리아인들의 골수라고 할 수 있는 치즈와 살루미(햄)이 유명하다. 우리가 ‘샌드위치 햄’으로 부르는 커다랗고 둥근 햄은 볼로냐에서 만든 모르타델라에서 시작되었다. 이 햄은 신성로마제국을 통해 스페인으로 전해졌고 남미로 퍼졌다. 이 햄뿐 아니라 이탈리아인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돼지 뒷다리로 만드는 생햄인 프로슈토의 집산지도 볼로냐다.

우리나라에는 스페인의 이베리코 햄이 널리 알려져 있지만 따지고 보면 고대 로마시대부터 만들어 먹었던 이탈리아가 원조다. 중세시대부터 교황의 하사품으로 알려진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도 볼로냐 인근 도시에서 생산된다. 이밖에도 발사믹 식초 등 볼로냐와 그 주변도시에서 최초로 선보인 원조음식은 끝이 없다. 볼로냐는 이탈리아 ‘미식의 수도’로 불린다. 이것만으로도 볼로냐는 충분히 다녀올 만한 가치가 있다.

 

 

항상 웃는 볼로냐 사람들, 그 행복감의 비밀은?

 

‘곳간에서 인심난다’는 우리 속담처럼 볼로냐는 개방적인 이탈리아에서도 가장 개방적인 도시였다. 나는 볼로냐에서 난생 처음으로 젊은 여성들에게 윙크를 받아보았다. 볼로냐의 젊은 여성들은 커피를 마시거나 식사를 하러 가게를 찾는 나에게 “본 조르노”라는 인사와 함께 윙크를 해주었다.

공공서비스도 훌륭하다. 외국인은 아예 못 들어가게 해놓은 토리노와 팔레르모의 도서관과 달리 볼로냐시립도서관은 내게 바로 출입증과 대출증을 만들어주었다. 이탈리아에서 1년 가까이 머물면서 처음 누려보는 빠르고 친절한 공공서비스였다. 외국인 체류자라는 이유로 이탈리아의 시골 경찰서에 가서 열손가락 지문을 찍었던 안 좋은 경험이 있던 나에게 볼로냐는 놀라운 곳이었다.

볼로냐는 활력이 넘쳤다. 이탈리아의 도시들은 고령화로 몸살을 앓고 있지만 대학 건물이 도심 전체에 흩어져 있는 볼로냐는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금요일 저녁에는 서울의 대학로나 홍대 골목처럼 젊은이들이 북적였다. 해가 떨어지면 사람들이 빠르게 사라지는 다른 도시와는 전혀 다른 밤풍경이었다.

나는 의아했다. ‘왜 볼로냐는 이탈리아의 도시는 물론이고 미국이나 유럽의 도시와도 다른 에너지가 느껴지는가’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다. 이 책은 내가 가진 그 의문과 거기에 대한 내 나름의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볼로냐에 있을 때는 볼로냐 사람들이 왜 싱거운 사람들처럼 웃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볼로냐 음식이 싸고 맛있고 볼로냐의 여성들이 친절하다는 걸 느끼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가 즐거웠던 탓도 있다. 서울에 와서야 비로소 볼로냐 사람들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행복감의 정체를 깨달을 수 있었다. 그 실마리는 역시 음식이었다.

볼로냐와 그 주변 도시(에밀리아)에서는 돼지로 만든 햄은 소금과 바람 그리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 심지어 햄을 와인용 오크통에 숙성하기도 한다. 치즈 역시 마찬가지다. 치즈는 우유 말고 어떤 것도 섞어서는 안 된다고 여긴다. 풀 말고 소에게 다른 것을 먹이지 않는다. 그래야 자기 조상들이 먹었던 것과 똑같은 치즈를 먹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대단한 장인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갑갑한 고집쟁이들인 셈이다.

 

 

근대 학문과 협동조합을 탄생시킨 도시

 

볼로냐의 고집은 뿌리가 깊다. 볼로냐 사람들의 조상인 에트루리아인들은 세계 최초로 금화를 사용했다는 소아시아의 고대 왕국이었던 리디아의 후손으로 추정된다. 이탈리아 반도에 정착한 이들은 화폐를 사용하고 그리스인과 경쟁했다. 에트루리아인들은 벽돌을 사용해 수로를 놓고 아치를 만들었다. 고대 로마는 볼로냐를 정복하고 이 문화를 흡수했다. 벽돌과 아치는 고대 로마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 문화였다.

볼로냐 사람들은 중세에도 독특했다. 세계 최초의 공동체적인 대학을 만들었으며 유럽 최초로 자유도시를 건설했고 노예제를 인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유럽의 강대국인 신성로마제국이나 유럽을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교황청과도 자유를 얻기 위해 전쟁을 불사했다. 그들은 신민이길 거부하고 고대 그리스인들처럼 자유도시의 시민이길 바랐다. 그리고 볼로냐는 고대 그리스보다 한발 더 나갔다. 볼로냐 대학은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학위를 주었고 대학 교수로 임명했다. 비슷한 시기 이웃 독일과 프랑스에서 여성들을 마녀로 몰아 종교재판에 회부하고 있을 때 볼로냐에서는 여성들이 가진 재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했다.

근대 법과 근대 의학 그리고 천문학도 볼로냐에서 태동했다. 볼로냐 대학에서 물꼬를 튼 이런 학문은 사회과학과 자연과학을 종교에서 독립하게 만들었다. 학문의 독립 이후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가 시작되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현대 학문의 기원을 따지고 들어가면 많은 부분이 볼로냐의 붉은 벽돌 건물과 회랑에서 튀어나왔다.

볼로냐의 성취는 현재 진행형이다. 20개가 넘는 지역으로 쪼개져 있던 이탈리아는 1861년 통일을 했지만 근대국가였던 영국 프랑스 독일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탈리아 북부 도시들은 강대국의 자본에 맞서려면 연대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협동조합 운동을 주도했다. 중세 때 정치적으로 자치 도시를 만들어 운영했던 이들은 근대에 와서는 경제적 자치 도시를 꿈꾼 것이다.

현재도 이탈리아는 유럽 국가 가운데 협동조합이 가장 많은 나라다. 특히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은 양의 와인을 생산하는 리유니테와 같은 볼로냐와 주변 도시의 협동조합이 유명하다. 덕분에 볼로냐는 ‘협동조합의 수도’로 불리기도 한다. 협동조합이 있어서 볼로냐의 청년 취업률과 여성 취업률은 이탈리아에서 가장 높은 편이다. 볼로냐의 음식이 맛있고 싼 것도 도시 구석구석에 미치고 있는 협동조합의 힘일 수도 있다.

 

 

이탈리아 음식 인문학 기행의 다음 행선지는?

 

내 눈에는 볼로냐는 음식으로 시작해서 음식으로 마무리된다. 자유를 위해 참 지나칠 정도로 싸워왔던 이 도시의 역사는 음식으로 접근하면 이해가 쉽다. 볼로냐가 배고픈 소크라테스도 배부른 돼지도 아닌 영리한 시민들이 일군 도시라는 것을 볼로냐에서 몇끼만 먹어보면 금세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그런데 볼로냐처럼 멋진 도시를 소개하는 책이 국내에 한권도 없다는 건 좀 의아했다. 물론 이탈리아에 로마, 베네치아, 피렌체처럼 유서 깊고 아름다운 도시가 워낙 많아서 그렇겠지만 아쉬운 대목이다. 이 책이 대학도시이자 미식도시 그리고 미술과 음악의 도시이기도 한 볼로냐에 대한 국내 여행자들의 관심을 열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볼로냐에 이어 피에몬테, 시칠리아를 소개하는 이탈리아 음식 인문학 기행 시리즈를 계속 쓸 계획이다. 많고 많은 이탈리아 도시(107개)와 주(20곳) 가운데 시칠리아와 피에몬테를 꼽은 것은 두 지역 역시 볼로냐와 마찬가지로 이탈리아의 음식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쉰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이탈리아 음식에 빠져 아무 계획 없이 20년간 해온 기자라는 직업을 그만두고 요리 유학을 떠났던 나에게, 음식 인문학 기행 시리즈 집필을 제안해준 김현종 대표 등 메디치미디어 분들께 감사드린다. 메디치의 제안이 없었다면 하루 15시간(오후 브레이크 2시간 포함) 무급으로 노예처럼 일하던 나는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떤 일탈을 했을지도 모른다(이탈리아와 가까운 북아프리카 튀니지나 그리스 크레타섬으로 가볼까 진지하게 고민한 적이 있었다).

또 나에게 음식에 대한 관심과 역사에 대한 애정을 일깨워 주신 나의 부모님 권희균·김금자님께도 감사드린다. 대책없이 회사를 그만두고 자기 좋아하는 일만 하려는 철없는 남편을 인내하며 격려해준 아내 박세나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2021년 6월 권은중




파스타의 맛

 

 

 

 

 

 

파스타를 모르면

이탈리아를 반만 아는 것이다


“오, 볼로냐 사람의 피에 흐르는 고유한 부드러움이여.

볼로냐 사람들은 찬사를 받을 가치가 있다.”

보카치오, 《데카메론》 중에서

 

 

 

 

 

이탈리아 음식, 하면 가장 먼저 어떤 음식이 떠오르는가? 어떤 사람은 피자를, 어떤 사람은 파스타를, 또 다른 사람은 치즈를 떠올릴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피자와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넘어서 서양 요리를 대표하고 있다. 이탈리아뿐 아니라 영국 런던이나 미국 뉴욕 그리고 일본 도쿄에 가도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은 어디에나 있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분식집만큼이나 많은 피자집이 골목골목마다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에 파스타와 피자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는 그렇게 오래되지 않았다. 내가 태어나 가장 처음 스파게티를 먹었던 것은 서울 신촌의 어느 음식점에서였다. 1988년에 맥도널드 햄버거가 처음 한국에 들어오고, 그 후 피자헛이 들어오더니 어느새 미국의 새로운 음식 문화가 물밀듯이 들어오던 1980년대 말이었다. 당시 새로운 음식 문화를 접하는 수업료는 꽤 비쌌다. 그때 나는 젊은 층 사이에서 핫플레이스였던 종로2가 종로서적에 갈 일이 있으면 근처의 맥도널드에서 친구들과 햄버거를 먹었다. 시집이 한 권에 2,000원이고, 구내식당의 장국밥이나 돈가스가 500원, 1,000원 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맥도널드 햄버거와 콜라, 감자튀김으로 구성된 빅맥 세트는 4,000~5,000원이나 했다. 교내 매점의 햄버거가 250원인 것에 견주면 엄청나게 비싼 가격이었다. 요즘 물가로 환산하면 요즘 괜찮은 레스토랑에서 점심 세트 메뉴를 먹을 수 있는 20,000원 정도다.

피자는 한술 더 떴다. 국내에 가장 먼저 들어온 피자 체인점인 피자헛의 피자 한 판 가격이 당시 가격으로 무려 20,000원이었다. 심지어 샐러드 작은 그릇 한 접시가 2,000원이었는데 한 번밖에 담을 수 없었다. 그래서 샐러드를 켜켜이 눌러 담는, 다소 점잖지 못한 기술을 익히려 애쓰기도 했다. 피자를 맘껏 먹을 수 있게 된 것은 1990년대 말 피자가 본격적으로 대중화되면서부터였다.

 

 

나의 첫 파스타는 이탈리아 파스타가 아니었다

 

파스타를 처음 접한 것도 비슷한 시기였다. 대학생 때, 서울 신촌에 미트볼 스파게티를 맛있게 하는 음식점이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당시 신촌은 대학로와 함께 강북 최고의 핫플레이스였다(1980년대 말 홍대 앞에는 지금과 달리 분식집만 있었다). 미트볼 스파게티를 먹으러 친구들과 가끔 그 집을 찾았다. 미트볼도, 토마토 스파게티도 신기했던 시절이었다. 특히 가장 새로웠던 것은 파스타에 뿌려먹는 파르메산(보통 ‘파마산’이라 한다) 치즈였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파르메산 치즈는 미국의 브랜드명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탈리아의 파르미지아노-레지아노 치즈와는 전혀 다른 치즈다.

한번은 미국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던 친구와 함께 신촌에 있는 이 가게에 들렀다. 내가 자랑스레 “이 집의 인기 메뉴는 미트볼 스파게티야” 하며 주문을 했는데 정작 그 친구는 이 미트볼 스파게티에 손도 대지 않았다. “왜 먹지 않는 거야” 하고 물었더니 예상치 못한 답변이 돌아왔다.

“미국 학교에서 급식으로 가장 자주 나오는 메뉴가 미트볼 스파게티야.”

가난한 학생에게 제공되는 무료 급식 메뉴도 이 미트볼 스파게티였다고 한다. 그 친구에게 미트볼 스파게티는 내가 고등학교 야간 자율학습 때 흡입했던 육개장 사발면과 비슷한 느낌이었나 보다. 그러나 스파게티라는 새로운 문화에 들떠 있던 나에게 ‘스파게티=가난 혹은 식상’이라는 친구의 말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친구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미국에 가서야 알았다. 미국에서는 아침에 맥도널드 앞을 지나가다 보면 많은 사람이 맥모닝을 사려고 줄 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 가운데에는 상자를 외투 삼아 뒤집어쓴 노숙인도 많았다. 피자 역시 미국에서는 패스트푸드의 일종이었다. 1980년대 말 한국에 세련된 외식으로 알려졌던 대부분의 미국 음식들이 사실상 지극히 평범한 서민 음식이었던 것이다.

미국뿐만이 아니었다. 스파게티는 파스타 종주국인 이탈리아에서도 고급 음식이 아니다. 심지어 지역에 따라서 찬밥 취급을 받을 정도다. 나는 요리 공부를 하려고 이탈리아 북부에 위치한 피에몬테Piemonte주에서 ‘외국인을 위한 이탈리아 요리학교ICIF’를 다녔다. 그때 내가 학교를 다녔던 지역의 레스토랑 가운데 스파게티를 파는 곳은 거의 없었다. 피자 역시 사정이 비슷했다.

한국에서는 스파게티나 마카로니, 펜네 등의 건면pasta secca과 생면pasta fresca을 크게 구분하지 않는 편이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한국에서는 생면 파스타를 내놓는 레스토랑이 극히 드물다. 한국에서는 건면의 일종인 스파게티가 파스타를 대표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북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 유감스럽게도 건면인 스파게티를 팔지 않는다. 심지어 메뉴에 쌀로 만든 리소토는 있어도, 스파게티나 마카로니가 있는 레스토랑은 드물다. 물론 북부에서도 파스타를 먹기는 하지만 대부분 생면 파스타를 선호한다. 이 생면 파스타는 남부의 파스타인 건면과는 확연하게 다르고, 가격도 스파게티보다 두 배쯤 비싸다.*

*북부에서는 피자나 샐러드 등을 간단하게 파는 바르Bar나 역 식당, 고속도로 휴게소 등에서만 건면 파스타를 파는데, 의외로 고급 호텔 중에서 건면 파스타를 파는 곳이 많다. 이는 외국에서 온 고객들이 미국 문화의 영향을 받은 탓에 생면 파스타보다 스파게티 등 건면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나도 북부 이탈리아에 가보기 전까지는 생면과 건면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했다.

 

피자도 사정은 비슷해서 한국인이 알고 있는 프랜차이즈 피자와 이탈리아 피자는 많이 다르다.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는 절대 미국의 파르메산 치즈처럼 공장에서 만든 치즈를 식사와 함께 내놓지 않는다. 이는 대부분 미국에서 건너온 미국식 이탈리아 음식의 특징이다. 이탈리아 북부의 레스토랑에서는 대부분 피자를 팔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동네에나 피자만 파는 피체리아pizzeria가 따로 있다. 피자 가격은 한 판에 10유로 선으로 저렴하고 푸짐하면서도 맛있다. 당연하게도 피체리아는 내가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간 음식점 중 하나였다. 또 피자의 원조인 이탈리아 남부식 피자는 도우가 두껍지 않다. 나폴리 피자협회AVPN에서는 피자 중심의 두께가 3밀리미터를 넘으면 나폴리 피자라는 말을 붙일 수 없다고 규정했다. 그래서 두툼한 도우를 쓰는 중부 지방의 피자는 피자가 아니라 ‘핀자pinzza’ 등 다른 이름을 쓴다. 나는 토스카나Toscana의 두툼한 핀자를 좋아하며 두툼한 라치오Lazio식 피자도 좋아한다. 핀자에는 피자처럼 바질이 아니라 민트를 뿌려주는데 그 향과 맛이 매우 독특하다.

그렇다면 이탈리아 남부의 음식인 스파게티와 피자는 어떻게 이탈리아 음식을 대표하게 된 것일까? 이탈리아 남부는 오랫동안 스페인의 식민지였기에 경제 사정이 좋지 않았다. 1861년 이탈리아 통일 후에도 이런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이탈리아 남부 사람들은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을 포함해 아르헨티나, 브라질, 호주 등의 신대륙으로 이민을 떠났다. 특히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며 많은 이탈리아인이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19세기부터 20세기 초까지 미국에 건너간 이탈리아 이민자는 500만 명이 넘는데, 이 가운데 80퍼센트는 남부 사람들이었다.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 남부 사람들의 음식인 피자와 스파게티가 이탈리아 음식의 전부인 것처럼 알려지기 시작한 계기였다. 미국 문화권인 우리나라도 그중 하나였다.

 

 

파스타를 모르면 이탈리아를 모르는 것이다

 

이탈리아 파스타를 둘러싼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다. 이탈리아에서는 북부의 토마토 고기 소스인 라구 소스를 남부의 스파게티 면에 버무려주면 큰일이 난다. 쫄면으로 만든 평양냉면처럼 경계를 허무는 음식이 되는 것이다. 이탈리아에서는 이런 경계를 오가는 음식을 ‘불경’으로 간주한다. 다른 나라에서는 ‘창의적’이라고 평가받을 수 있는 시도가 이탈리아에서는 완전히 금지되는 것이다. 그런 음식을 이탈리아인에게 대접하면 그 음식을 받아든 사람이 접시를 요리사 얼굴에 집어던질지도 모른다. 파스타는 자국 음식을 대하는 이탈리아인들의 보수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식재료다.

이들의 보수성은 좀 더 근본적이다. 이들에게 ‘전통’은 자신의 정체성이다.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 이탈리아인은 완전히 별개의 지역에서 별개의 역사를 일구어왔다. 이들에게는 지금도 이탈리아의 국가적 정체성보다 자기가 사는 지역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더 강하다. 내 이탈리아 친구들은 “이탈리아는 월드컵 기간에만 한 국가이고 그 외의 시간에는 20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어”라고 말하기까지 했다. 이토록 지역을 중시하는 이탈리아인의 특징을 증명해주는 게 바로 음식이다.

그중에서도 파스타는 이탈리아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열쇠다. 이탈리아의 파스타는 지역마다 완전히 개성이 다르다. 같은 북부 지역이라도 피에몬테주에서는 파스타 반죽에 계란을 넣고, 리구리아Liguria주에서는 계란을 넣지 않는다. 리구리아주의 파스타로는 바질 페스토를 이용한 파스타가 대표적인데, 대부분 건면인 링귀니를 쓴다. 바질 페스토는 바질 잎과 구운 잣을 찧어 올리브 오일과 양젖으로 만든 페코리노 치즈 가루에 버무린 소스다. 바질 특유의 상큼한 향과 오일의 부드러움, 치즈와 잣의 고소함이 잘 어우러진 소스로 파스타는 물론이고, 샐러드나 생선구이 등에도 어울린다.

 

리구리아를 대표하는 바질 페스토 파스타.
리구리아주는 북부인데도 생면이 아닌 건면을 쓴다.

 

리구리아주는 바질과 올리브의 대표적인 산지 가운데 하나다. 고도가 높은 편인 리구리아주의 올리브는 남부의 올리브에 비해 열매는 작지만 풍미가 뛰어나다. 리구리아의 바질 역시 원산지 보호*를 할 정도로 명성이 높다. 그런데 바질 페스토처럼 산뜻한 소스의 파스타에는 계란으로 반죽한 생면보다는 건면이 더 어울린다. 리구리아주가 북부인데도 생면을 잘 먹지 않은 이유는, 오래전부터 시칠리아Sicilia에서 밀을 수입해 건면을 만들어 주변 지역에 판매해오던 그 지역의 상업적 전통 때문이다. 리구리아에서는 심지어 치즈도 북부의 치즈가 아니라 남부의 페코리노 치즈를 수입해 먹었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파스타에는 저마다의 역사적 배경이 있다.

*Denominazione Di Origine Protetta, 줄여서 DOP라 한다. EU의 원산지 보호 인증으로서 제한된 지역에서 전통적 방식으로 재배, 생산, 포장한 식품이다. 인증받기 까다롭고 비교적 고가의 상품이 많다.

 

그런데 놀랍게도 파스타는 이탈리아의 창작품이 아니다. 파스타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가장 유력한 것은 ‘아랍 기원설’이다. 강렬한 햇볕이 내리쬐는 뜨거운 날씨의 아랍에서는 이동하기에 편리한 보관식이 발달했는데, 건면도 그중 하나였다는 거다. 치즈 역시 중동 지역에서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동물의 위에 들어 있는 응고 효소인 레닛renet을 쓰는 중동의 치즈 생성법이 유럽으로 전파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아랍인들과 교류가 가장 활발하고 11세기에 아랍의 지배를 받았던 시칠리아 등 남부 이탈리아에 먼저 건면 제조법이 전파되었을 것이다. 밀 생산량이 풍부해 고대부터 카르타고와 그리스의 식민지였던 이 지역에서 생산한 면들을, 제노바를 비롯한 피사·아말피·토스카나 지역 상인들이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에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기록만 놓고 본다면 시칠리아가 파스타의 성지인 셈이다.

 

 

생면 파스타의 성지, 볼로냐

 

볼로냐 역시 또 다른 파스타의 성지다. 시칠리아가 건면의 성지라면, 볼로냐는 생면 파스타의 성지다. 이탈리아의 생면 파스타는 기원전 에트루리아인들이 최초로 만들었다고 전한다. 1세기 고대 로마의 작가 아피키우스Apicius는 파스타에 고기와 생선을 곁들인 양념에 대한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이러한 기록과는 별개로, 볼로네제 파스타는 전 세계에서 즐겨먹는 토마토 고기 소스 파스타의 원조다. 현재 지구에서 가장 많이 먹는 파스타가 바로 이 볼로네제 파스타다. 내가 대학 때 처음 먹었던 미트볼 스파게티도 이 볼로네제 파스타의 미국적 해석이다. 볼로네제bolognese란 ‘볼로냐의’란 뜻의 이탈리아 형용사다. 영어 단어 차이니즈나 재패니즈와 비슷하게 ‘-ese’라는 접미사가 붙는다. 볼로네제 파스타는 아마 이탈리아의 파스타 이름 가운데 도시 지명이 붙은 보기 드문 예일 것이다.

 

 

대부분의 파스타에는 각양각색인 파스타 면의 이름이 붙는다. 바질 페스토 파스타Pesto Genovese에 ‘제노바의’란 뜻의 제노베제Genovese가 붙기는 하지만 볼로네제의 명성에 견주기는 어렵다. 이탈리아에서는 바질 페스토 파스타를 바질 소스 파스타라는 뜻의 ‘파스타 콘 살사 알 바질리코’라는 이름으로도 많이 부르기 때문이다. 나폴리탄 파스타라는 이름의 파스타가 있기는 하지만, 이는 이탈리아식이 아니라 일본식 파스타다. 문법적으로도 이탈리아어였다면 나폴리타노Napolitano 파스타가 되어야 한다.

볼로냐에서는 건면 파스타를 제외한 거의 모든 파스타를 만날 수 있다. 파스타 가운데 가장 면적이 넓은 라자냐에서부터 볼로네제 라구 소스와 어울리는 두꺼운 면인 탈리아텔레tagliatelle와 같은 다양한 길이와 모양의 파스타를 파는 생면 파스타 레스토랑을 도시 곳곳에서 접할 수 있다. 젊은이들이 많은 거리에는 키오스크 매장이 있는가 하면, 클래식한 미슐랭 레스토랑에서도 단품 메뉴로 생면 파스타를 즐길 수 있다.

볼로냐 파스타에서 주목할 만한 점은 맛도 맛이지만 가격이 매우 합리적이라는 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피에몬테의 고유한 생면 파스타인 타야린이나 수제 라비올리인 아뇰로티는 가격이 좀 비싼 편이다. 반면 시칠리아의 스파게티는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노점이 아닌 레스토랑에서도 10유로도 안 되게 파는 파스타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심지어 반 인분씩 팔기도 한다. 여행 중에 자주 갔던, 시칠리아 팔레르모 중심가에 위치한 어느 레스토랑 파스타 작은 접시의 가격은 6유로였다(와인 반병은 5유로. 맘마미아! 저렴한 가격임에도 엄청 맛있었다).

 

이탈리아 만두, 라비올리.

 

볼로냐 파스타의 가격은 두 지역의 중간 정도이다. 대학생이 3분의 1을 차지하는 도시인 만큼 볼로냐의 음식 가격은 다른 도시에 견주어 합리적인 편이다. 미슐랭 레스토랑임에도 비스트로용 점심 세트 메뉴를 만들어서 9~10유로 정도에 팔기도 한다. 게다가 점심 세트 메뉴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샐러드와 파스타 그리고 고기나 생선 등 메인 메뉴로 구성되어 있는데, 물과 빵도 포함되어 있어 가성비가 좋다. 심지어 젊은이들이 많이 가는 식당에서는 이 모든 음식을 나무 쟁반 하나에 담아서 낸다. 마치 밥과 국과 반찬을 예쁜 나무 쟁반에 함께 내놓는 한국 식당처럼 말이다. 10유로에 괜찮은 볼로냐 현지 음식을 무제한으로 맛볼 수 있는 점심 뷔페도 제법 많다. 맛도 제법 괜찮아서 좌석은 조금 좁지만 추천할 만하다.

 

 

볼로냐에 간 것은 행운이야

 

내가 요리학교 인턴을 마치고 볼로냐와 시칠리아 딱 두 곳만을 선택해서 각각 한 달씩 머문 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시칠리아를 선택한 것은 우리 요리학교인 ICIF에 강의를 하러온 셰프들이 이구동성으로 “이탈리아 요리를 배우려는 사람이라면 시칠리아는 반드시 가봐야 한다”고 강조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시칠리아를 거의 이탈리아 미식의 원류쯤으로 강조했다. 평양냉면을 먹으려면 서울의 냉면집이 아니라 평양 옥류관을 가봐야 한다는 식이었다. 나중에 시칠리아에 가서야 그 이유를 깨달았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 거의 모든 음식의 고향이었다.

시칠리아는 이탈리아의 밀, 소금, 쌀의 고향이다. 또 오렌지, 아몬드, 피스타치오, 체리 같은 과일과 가지, 펜넬 같은 채소가 시칠리아를 통해 이탈리아에 전달되었다. 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시칠리아가 없었다면 오늘의 이탈리아 음식은 없었을 것이다. 시칠리아의 밀이 파스타가, 시칠리아의 쌀이 리소토가, 시칠리아의 과일이 젤라토와 디저트가 됐다. 이탈리아인들이 왜 볼로냐를 ‘미식의 수도’라 부르고, 시칠리아를 ‘미식의 고향’ 혹은 ‘미식의 조국’이라 칭하는지 알 수 있었다.

시칠리아를 다녀온 뒤 볼로냐에도 꼭 가보겠다고 마음먹은 건, 전적으로 ICIF 동기생이자 이탈리아인 친구 브루노 덕분이었다. 그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몇 안 되는 학생 중 한 명이었다. 피에몬테 출신으로, 사업가이자 아이 네 명의 아버지이기도 한 브루노는 맥주와 빵 등 발효 식품에 푹 빠져 있었다. 그는 은퇴 후 맥주 바를 여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실제로 그의 집 지하실에는 100리터는 족히 넘을 것 같은 거대한 스테인리스 맥주 양조 탱크가 두 개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한 뒤 토리노에서 인턴을 하면서 나는 가끔 브루노의 집에 놀러가 그의 가족과 식사를 했다. 그때마다 그는 나에게 이탈리아 방방곡곡의 진귀한 음식을 소개해주었다. 책으로는 도저히 배울 수 없는 각종 식재료와 와인도 알려주었다. 와인 말고도 베르무트vermouth라는 멋진 피에몬테의 진gin도 그가 알려줬다. 또 토리노의 유서 깊은 음식점에도 나를 많이 데려가주었다. 고맙게도 토리노 최초의 레스토랑, 토리노 최초의 카페, 토리노 최초로 초콜릿 음료를 선보인 카페 등을 그 덕분에 다 돌아볼 수 있었다.*

*토리노의 비체린bicerin은 에스프레소에 초콜릿과 우유를 층층이 쌓아 만든 음료이다. 1763년 이 음료를 만든 카페Caffe Al Bicerin가 아직도 토리노 시내에 있다. 이곳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식재료를 팔고 있는 시장과 가깝다.

 

2019년 초여름의 어느 날, 브루노의 초대로 그의 집에서 저녁을 먹은 뒤 하루를 묵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브루노와 그의 부인 마리에게 물었다.

“인턴이 끝난 뒤에 시간이 나면 이탈리아를 돌아볼 계획인데 어느 도시를 가봐야 할까?”

그는 주저 없이 대답했다.

“볼로냐.”

“왜 볼로냐야?”

내가 되묻자 그는 주석 잔에 든 자신이 만든 흑맥주를 들이키면서 이렇게 말했다(그가 만든 흑맥주는 도수가 10도를 넘는 강한 맛이었다).

“피에몬테 사람들은 프랑스와 지긋지긋하게 독립 전쟁을 해서 강인해. 하지만 남에게 자신을 잘 내보이지 않지. 그런데 볼로냐 사람들은 완전히 달라. 볼로냐는 정말 개방적이야.”

나는 애초에 학교 졸업 후 인턴 실습을 북부가 아니라 남부로 가고 싶었다. 육류 중심인 북부의 음식보다는 해산물 중심의 남부 음식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쌀쌀맞은 북부 사람 대신 쾌활한 남부 사람들을 더 만나고 싶었다. 학교에서 만났던 남부 출신 셰프와 동기생들은 나의 이런 생각을 더욱 확고하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학교에서 만났던 북부 사람들보다 훨씬 상냥하고 인간적이었다.

학교에서 한국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던 제제(원래 이름은 에우제니오인데 줄여서 ‘제제’라는 애칭으로 불렸다)라는 셰프가 있었다. 그는 이탈리아 남동부 풀리아Puglia주 출신으로, 거구인데도 아주 섬세한 요리를 했다. 파스타의 귀재였던 그는 듣도 보도 못한 파스타를 시연해서 내 입을 떡 벌어지게 했다. 훌륭한 실력임에도 그는 미슐랭 레스토랑의 수셰프였는데, 그 레스토랑의 오너셰프는 페이스트리 셰프pastry chef(이 셰프도 ICIF의 강사였다)였기에 사실상 레스토랑의 코스 메뉴를 제제가 전담하는 셈이었다.

제제는 친절했고 유쾌한 사람이었다. 한국 인턴을 많이 채용해서 한국어를 조금 할 줄 알았고, 성실한 한국 학생들에게 애정이 많았다. 하루는 휴식 시간에 그와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가브리엘(내 세례명이자 이탈리아 이름), 너 기자 출신이라며?”

“응, 한국에서 기자였지.”

“너 그럼 아는 사람 많겠다. 나 일본은 몇 번 가봤는데 한국엔 한 번도 가보지 못했어. 나 한국 레스토랑에 취직 좀 시켜줘. 제주도가 좋다고 하던데 월급은 안 받아도 돼. 나랑 우리 가족이 함께 지낼 체류비만 제공해주면 지금 당장이라도 한국에 갈 수 있어.”

“진짜? 너 같은 셰프가 한국에 오면 아마 그 집은 대박이 날거야. 아니다. 내가 한국에 가서 당장 레스토랑을 열어서 널 초청할게. 그때 꼭 와줘.”

이런 실없는 농담을 나누며 우리는 낄낄거렸다. 그가 한국 레스토랑에 와서 딱 1년간만 요리를 한다면 그 레스토랑은 대박이 날 게 틀림없다. 그만큼 그가 한 요리는 심플하면서도 강렬했다. 특히 남부 출신답게 해산물 요리와 파스타가 정말 훌륭했다. 그의 요리를 배우고 싶어 그의 레스토랑에 인턴을 지원하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나 제제의 레스토랑은 호텔에 있어서 연회가 많은데, 연회 때마다 새벽 3~4시까지 일을 해야 한다며 주변에서 만류했다. 제제가 좋은 셰프라는 사실은 틀림없지만 내가 버티지 못할 거라는 이유에서였다. 결국 나는 제제의 레스토랑에 지원하지 않았다. 한번 그의 레스토랑에 가봤는데 정말 엄청난 규모였다. 그 레스토랑에서 일했다면 정말 많은 것을 배웠겠지만 아마 체력적으로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인턴을 한 토리노를 비롯해 피에몬테주 출신 셰프들은 따뜻한 제제와 참 다른 스타일이었다. 일부 셰프는 전직이 군인이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학생들에게 규율을 강조했다. 학생들이 실습 중에 화상을 입거나 칼에 베이면 걱정은커녕 요리사의 기본이 안 되어 있다고 화부터 냈다. 이해는 간다. 10여 주 동안에 외국인 학생들에게 이탈리아 요리를 가르쳐서 이탈리아 유수의 레스토랑으로 최장 8개월 동안 인턴을 보낸다는 미션은 그들에게도 대단한 도전이었을 것이다. 학교가 욕먹지 않으려면 학생들을 아주 확실하게 가르쳐야 했다. 실제 졸업생 가운데 일부가 인턴으로 간 레스토랑에서 며칠 만에 짐을 싸 야반도주해 본국으로 돌아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학교에서의 이런 엄격한 경험 탓인지, 나는 볼로냐의 개방성이란 게 도대체 어떤 것인지 몹시 궁금했다. 덕분에 나는 로마도, 베니스도, 나폴리도 돌아보지 않고, 인턴을 마치자마자 볼로냐와 시칠리아만을 방문하고 한국에 돌아온 기이한 여정의 여행자가 되었다(물론 학교 부근의 도시인 밀라노, 피렌체, 알바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다).

그렇지만 나는 시칠리아와 볼로냐에서 이탈리아를 아주 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지평을 열어준 것은 바로 음식이었다. 파스타도 그중 하나였다. 이탈리아 친구들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볼로냐에 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볼로냐를 다녀오게 된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소스는 짧고 파스타는 길다

 

볼로냐를 대표하는 파스타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볼로네제 파스타’와 이탈리아식 만두인 라비올리를 작게 만든 ‘토르텔리니tortellini’가 특히 유명하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파스타인 볼로네제 파스타는 쉽고 편안한 맛 덕분에 세계인이 가장 많이 먹는 파스타로 사랑받고 있다. 볼로네제 파스타의 역사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뒤의 토마토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그렇다면 볼로네제 파스타는 소스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파스타가 먼저 만들어졌을까? 볼로냐 소스의 유명세를 따지자면 소스가 먼저 나왔을 것 같지만, 이탈리아 음식사의 관점에서 보면 볼로네제 역시 소스보다는 파스타가 먼저 등장했다. 볼로냐에는 워낙 특색 있는 생면 파스타가 많기 때문에, 파스타가 먼저 등장한 뒤 거기에 맞춰 소스가 개발되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사실 단순한 추측만은 아니고 근거가 있는 이야기다. 기록에 따르면 처음 볼로냐 파스타가 붉은색을 띠기 시작한 때는 1800년대로 추정한다. 그 이전까지만 해도 볼로냐 파스타라고 하면 나폴리의 마카로니처럼 버터에 밀가루를 넣어 만든 화이트소스(‘베샤멜 소스’라고도 부른다) 요리였다. 이 화이트소스 대신에 토마토소스가 첨가되면서 지금과 같은 붉은색을 띠는 볼로네제 파스타가 나온 것이다. 역사만 보면 ‘소스는 짧고 면은 긴’ 셈이다.

볼로냐에서 특히 생면이 발달한 까닭은 넓은 평야를 끼고 있는 자연환경 덕택이다. 볼로냐보다 더 북쪽에 위치한 리구리아주 제노바와 베네토Veneto주 베네치아에서는 건면을 주로 먹은 반면에, 볼로냐에서는 생면을 먹었다. 제노바와 베네치아가 각각 시칠리아와 풀리아, 동유럽의 경질밀로 만든 스파게티나 링귀니를 먹었던 반면, 볼로냐는 일반적인 밀에 계란 노른자를 넣어 만든 손칼국수를 먹은 것이다. 볼로냐 사람들은 왜 이렇게 생면을 고집했을까?

볼로냐 사람들이 먹는 생면 파스타를 탈리아텔레라고 부른다. 탈리아는 ‘자르다’라는 뜻의 동사 ‘탈리에레tagliere’에서 왔다. 우리말에도 비슷한 단어가 있다. 칼과 국수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칼국수’다. 여기에 사람 손으로 만들었다는 뜻의 ‘손-’이 붙으면 ‘손칼국수’가 된다. 이탈리아의 손칼국수 면이라 할 수 있는 게 바로 탈리아텔레다.

건면 파스타를 만드는 기계는 우리나라의 국수 뽑는 기계와 거의 비슷하다. 맨 마지막 단계인 배출구의 황동 거푸집 모양을 바꾸면 면의 모양도 달라진다. 이 기계를 이용하면 스파게티나 링귀니는 물론이고 나사 모양으로 생긴 푸실리와 펜 모양의 펜네 등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기계를 통해 갓 뽑아낸 파스타는 건조기에서 말리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시판하는 건조 파스타보다 훨씬 부드럽다. 그래서 이 반건조 파스타를 가지고 요리를 하면 양념이 잘 묻어난다. 우리말로 하면 ‘기계식 즉석 파스타’ 정도 될 텐데 내 입맛에는 이것도 참 맛났다. 한국에서는 맛보기 힘든 식감이다.

ICIF에서는 파스타 수업 시간이 특히 많았는데, 역시 북부답게 생면 만드는 수업이 많았다. 나는 이탈리아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생면 파스타를 좋아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맛본 생면은 계란 면이 약간 미끌미끌하고 늘어졌다. 오히려 넓은 건면이나 속이 빈 펜네나 리가토니만 못한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ICIF에서 셰프들이 만든 생면 파스타를 먹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단순히 밀가루에 계란을 섞어놓은 면일 뿐인데 메밀냉면의 깐깐한 질감과 묘한 향취마저 느껴졌다. 한국에서 먹었던 생면은 물기가 많았지만 이탈리아의 생면은 오히려 약간 빡빡했다. 심지어 기계 롤러의 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을 정도였다. 그런 면을 꼬들하게 삶아서 라구 소스를 올려먹으면 면과 소스가 혼연일체가 된 풍성한 맛이 났다. 원조의 힘은 생각보다 대단했다.

나는 학교 셰프인 마시모가 만든 이 생면이 너무 맛있었던 나머지 수업이 끝나고 남은 생면을 집에 챙겨왔다. 수업이 끝나면 보통 빵과 정형한 고기 등을 제외하고는 수업 시간에 만든 대부분의 것들을 버리는데 말이다(단, 학생들이 수업시간에 만든 빵과 정형한 고기는 학교에서 운영하는 레스토랑 ‘라 바르베라’에서 사용한다). 생면의 독특한 식감에 빠진 나는 쓰레기통으로 갈 뻔했던 이 면들을 기숙사로 잘 챙겨와서 혼자 몰래 끓여먹었다. 아쉽게도 사흘 정도 지나니 곰팡이가 피어서 버려야 했지만 말이다. 보존식인 스파게티는 1년 가깝게 두어도 변질이 되지 않지만 계란을 넣은 생면은 사흘을 버티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