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은실

2018년 제주로 이주한 후 4.3 관련 증언을 기록하며 시로 쓰는 일을 이어오고 있다. 문명과 역사, 체제와 이념의 폭력 속에서 음소거된 목소리를 듣는 일, 문서가 누락한 이름들을 부르는 작업에 더 많은 시간과 마음을 쓰려 한다. 지은 책으로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 산문 『내일 쓰는 일기』 『그날 당신이 내게 말을 걸어서』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이 있다.

 

 

사진고현주

2018년부터 제주4.3 유품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 〈기억의 목소리〉 시리즈를 진행하고 있다. 4.3의 역사가 당대의 집단기억으로, 문화적·시대적 상징으로 자리잡는 계기를 만드는 데 예술가로서 작은 역할이나마 하고자 한다. 일곱 번의 개인전과 국내외 다수 기획전에 참여했다. 지은 책으로 『꿈꾸는 카메라』가 있다.




 

 

 

제주도 무가巫歌에 따르면,

서역 어딘가에는 서천꽃밭이 있다고 전한다.

여기에 피는 꽃을 죽은 사람에게 뿌리면

살살이꽃은 살을,

뼈살이꽃은 뼈를,

혼살이꽃은 영혼을 되살아나게 해준다고 한다.



프롤로그 

봉인된 시간의 기억과 마주하다

고현주

 

 

동백이 진다. 제주의 봄은 붉은 꽃덩어리가 통꽃으로 장렬하게 떨어져 땅에서도 핀 채로 충분히 아름답다. 제주의 봄은 피어나는 꽃보다 지는 꽃에 눈이 먼저 가는 계절이다. 떨어진 동백꽃 한 송이 한 송이마다 4.3의 영혼이 깃들여 있는 것 같아 차마 밟지 못한다.

 

암이 왔다. 공교롭게도 『기억의 목소리』 작업은 항암과 함께 진행되었다. 스스로에게 수없이 되새겼던 질문. ‘난 왜 이 작업을 하고 있나? 이 너덜거리는 육신을 이끌고, 난 지금 누구를 부여잡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려 하고, 들리지 않는 것들을 들으려 하는가?’

 

4.3은 그렇게 동백이 질 무렵, 내 육신이 완전히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 나에게로 왔다.

 

작업 나가기 전에 내가 밟고 다니는 제주 땅 처처에 누군가의 억울한 영혼이 묻혀 있는 것 같아서 빌고 또 빌었다. 땅을 밟고 걸을 때도, 나무를 만질 때도, 바다를 바라볼 때도, 곶자왈에 들어설 때도, 땅에 떨어져 있는 돌들을 볼 때도, 동백이 지고 벚꽃이 피어날 때도 그 풍경 속에 갇힌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알면 알수록 두려웠다.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들어가면 갈수록 처참하고 슬펐다. 그래서 더 숨막히게 아름다웠다. 너무나 모순되는 이 감정들이 난 아직도 낯설다.

 

제주에 오면 많은 사람들이 성산일출봉, 함덕해수욕장, 섯알오름, 다랑쉬오름, 정방폭포, 표선해수욕장 등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 아름다운 공간들이 4.3 당시 집단학살터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제주의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은 어쩌면 4.3 영령들의 피의 대가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제주에 너무 많은 빚을 졌다.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기억의 목소리』 작업은 그렇게 무거운 마음으로 시작되었다.

 

4년째, 4.3 관련 작업을 하면서 많은 유족과 희생자분들을 만난다. 70년 넘는 시간, ‘상처’와 ‘회복’ 그 중간 어디쯤에 있을 균열의 틈새를 비집고 들어간다. 아득한 시간은 먼지가 쌓여 매캐하고, 비밀스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4.3을 경험한 이들의 이야기는 듣기에도 버겁고 가슴에 쌓아두기엔 더더구나 아프다.

더이상 이름 불리지 않는 것들, 끝내 쓸모없어진 것들, 그리하여 하루하루 닳고 닳아 조금씩 사그라지는 것들은 ‘가족의 유품’이라는 단 하나의 이유로 70여 년간 피붙이처럼 남겨진 물건들이다.

이런 사소한 물건 하나를 꺼내봄으로써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아버지를, 어머니를, 형님을, 누이를, 동생을 소환해내어 조우한다. 70년 넘게 이 사물과 함께한 시간은 그렇게 스스로 상처를 걷어내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혼자 세월의 흔적을 더께로 입고 남겨진 사물들은 4.3의 참혹한 현장 안에 있었다. 낱장의 사진은 그래서 알 수 없는 ‘아우라aura’를 당당히 뿜어내고 있다. 그 아우라는 처참하고 아픈 역사의 시간을 뚫고 나온 힘이다.

 

만지면 바스러질 듯한 고무신, 할머니의 곱디고운 물빛 저고리, 푸르렀던 시절의 아버지 초상화, 관에서 처음 만난 어머니의 은반지, 푸른 녹이 콕콕 박힌 부러진 숟가락, 두피의 각질이 화석처럼 굳은 채 남아 있는 등 굽은 빗……

 

바스러져가는 사물을 통해 다시 삶을 이야기한다. 까마득한 시간의 증거, 흔적의 더께를 더 자세히, 더 오래, 더 깊이, 더 느리게 바라본다. 1948년에서 오늘까지, 그사이 벌어진 시간의 균열. 그 가느다란 틈새에서 희미한 빛이 쏟아진다.

 

섬광 속에 ‘반짝’하고 빛나는 그 무엇,

오래 들여다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사물의 영혼들.

 

비로소 부재 속의 존재들을 만난다.

 


차례

 

프롤로그봉인된 시간의 기억과 마주하다고현주

강은택 아버지의 저고리

안순실 어머니의 비녀

안순실 시아주버니 내외의 영정 사진

양남호 어머니의 놋쇠숟가락

강중훈 어머니의 재봉틀

이양자 부모님의 놋화로

윤만석 아버지의 궤

홍기성 어머니의 데왁세기

윤옥화의 물옷

김두연의 망주석

오국만 부모님의 궤

강숙자 어머니의 은반지

임애덕 아버지의 그림

강방자의 아버지 사진

양성보의 맷돌

조인숙의 혼례복

이재후 어머니의 다듬잇돌

조정자 아버지의 성경책

고창선 형님의 엽서

김연옥의 사진

진아영의 무명천

박선희 시할머니의 궤와 한복

수장고에 보관된 4.3 유품들

에필로그끝내 남아 부르는 노래허은실




 

“아가

그만

일어나”


아버지가 유년 시절 입었던 저고리의 안쪽.

일제강점기 정미소에서 쌀을 담던 자루를 안감으로 써서 ‘흑전정미소’라는 글자와 손바느질 흔적이 선명하다.

 

“밥

먹어야지”


꽃 찾으러

 

 

 

 

하 봄잠 오래도 잤다

제주도 서사무가 〈이공본풀이〉에서.

 

아가 그만 일어나 밥 먹어야지

 

죽은 아이들

서쪽 하늘가 꽃밭지기 되었지

목까지 차는 붉은 강

세 번 물을 건너

도환생 도환생

꽃이야 꽃이야

 

애기구덕 한가득 꽃을 따오렴

물허벅 넘치도록 꽃을 져오렴

제주에서 물을 길어서 등에 지는 물항아리.

 

아가 아가 꽃분홍 새 옷 입고

가자 가자 도환생 서천꽃밭

핏속으로 흐르는 꽃

숨 따라 드나드는 꽃을 다오

 

검은 밭 버려진 몸

흩어진 사지육신 거두어

가슴에 문질러라 숨 돌게 숨살이꽃

상처마다 대어라 살 돋게 살살이꽃

 

찔린 자리 총구마다

꽃으로 막아

동백은 이리 붉었다

 

꽃 찾으러 왔단다 왔단다

동쪽 푸른 꽃 줄게

서쪽 흰 꽃을 줄게

 

말굽에서도 꽃향기가 나는 사월이야

 

꽃봉오리 열리듯

살아오는 내 사람아


 

내가 세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어려서 입던 옷입니다. 한 일고여덟 살 때쯤 입었던 것 같아요.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궤를 열어보니까 아버지의 위아래 옷이 있더라고요. 바지는 조금 커서 제가 어릴 때 잠시 입었어요. 그건 입다 버려버리고, 이 저고리는 아마도 색도 곱고 이렇게 하나도 바래지 않았으니까 보관한 것 같아요. 90년이 넘었는데도 변하질 않았잖아요. 할머니가 정미소 쌀 담던 일본 자루를 안에 기지로 대서 만든 옷이더라고요.

‘천’의 일본말.

 

아버지가 아직 살아 계셨다면 98세예요. 4.3 때 스물네 살이었으니 꽃다운 나이에 돌아가셨지요. 1948년 겨울 토벌대가 외도리 주변 마을 주민들을 제주 경찰서 외도지서에서 300여 미터 떨어진 서쪽밭으로 끌고 가서 여러 차례 집단학살했는데, 그때 학살된 수십 명 중 상가리 주민 6명에 우리 아버지도 포함돼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죽었다는 내력이 안 나옵니다. 제가 세 살 때 돌아가셔서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거의 없는데, 그나마 이 옷이 하나 남아 꺼내서 손주들도 보여주고 그럽니다. _강은택(1947년생)





 

“우리 아버지

너무 잘생겼다.

계속 살았으면

백 살 난 할아방 아이가.”


비녀

 

 

 

 

기척에 눈뜨면

경대 앞에 앉은 실루엣

새벽 어스름 머리 빗어 여미는 여자

흐린 거울 속에서 눈 마주치면

희미하게 웃어준다

다시 잠들었다 깨어보면

사라지고

 

없네

 

겨울밭 가득 까마귀떼

부리마다 피가 묻어 있었다

 

세 살배기 업고

수용소로 움막으로

죽지 않으면 살아진다

 

그것은 비념이었을까

어떤 결심이었을까

제주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