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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신정훈

 

오랜 기간 역사를 공부하며 느낀 흥미와 전율을 전달하고자 2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유튜브 역사 지식 채널인 ‘아그래’를 개설하였다. 아그래 채널은 개설 1년 만에 구독자 10만을 달성하였고, 2년이 지난 현재 22만 명의 구독자와 누적 조회수 4,500만 회를 기록하며 역사 부문 대표 채널로 자리 잡았다.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조선 갈등사》는 그동안의 유튜브 활동으로 다져진 역사 콘텐츠를 추가하고 보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역사를 쉽고 재미있게 전달하려 노력하였다. 역사가 딱딱하고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도록 인간적인 측면에서 바라보았으며, 역사란 단순히 과거의 기록이 아닌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지혜라고 믿는다. 누군가에게는 역사에 관심을, 누군가에게는 놓치고 있던 지식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유튜브 아그래-역사이야기 채널

인스타그램 @ahreally_

 

 

감수자김선우

 

한양대학교 사학과 박사 과정 중이며,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에서 동북아시아의 외교 관계와 북한의 핵 문제를 연구하고 있다. 대표적 연구로 <1950년대 재일조선인 북한 송환 문제와 한·미·일의 대응>이 있으며, 2019년부터 유튜브 아그래-역사이야기 채널의 감수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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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당신이 원했던
조선 이야기를 들춰 보다

 

 

 

 

학교를 졸업함과 동시에 교과서에서 배웠던 한국사 내용은 모두 까먹는다. 사람들과 대화하다가 어디선가 들어본 사건이고, 유명한 인물이기는 한데 정확히는 몰라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가만히 입을 다문다.

 

역사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지만 우리는 왜 자꾸만 역사가 어렵다는 생각을 하게 될까. 학창시절 시험을 위해 역사를 암기 과목마냥 달달 외웠으니 ‘한국사’라고 하면 많은 학생들에게 지루하고 재미없는 과목으로 인식되었고, 그 학생들이 어른이 되어 다시 역사 공부를 시작하려 하지만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함에 가로막혀 끝내 포기하고 만다.

 

역사는 알면 알수록 굉장히 흥미로운 분야다. 오랫동안 정권을 잡은 기득권층의 부패라든지, 지도자와 권신들의 명과 암의 모습은 과거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과거에 발생한 여러 갈등들이 지금 현대에서도 비슷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처럼 역사를 단순한 과거의 기록으로 생각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삶에 있어서 지혜로운 반면교사로서 이해한다면 막막하기만 했던 역사가 쉽고 재미있게 느껴질 것이다.

 

이 책에서는 딱딱한 설명 위주의 글이 아닌 잘 알려지지 않은 조선 왕실의 사랑과 욕망, 그리고 갈등을 위주로 그렸다.

조선을 알아가는 데 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왕실과 신하들이 만들어가는 갈등을 이해하는 것이다. 왕조 시대에 나라의 주인은 ‘임금’이었다. 그러나 왕족 또한 우리와 같은 사람이기에 아내를 사랑하거나 미워하고, 사사로운 일에 휘둘리기도 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일들을 겪었다.

그렇지만 그들이 우리와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왕이 가진 권력으로 인해 단순한 사랑싸움조차 조정의 분위기를 반전시킬 만한 사건으로 확대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왕의 부부싸움 속에서 한 당파가 몰락해 많은 신하들이 죽임을 당하기도 했고, 집권당이 되어 부와 권세를 누리기도 했다.

왕의 일상에는 권력이 녹아 있었기에 이들의 갈등을 들춰 보면 역사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책에 담긴 내용들은 유튜브 ‘아그래’ 채널에서 많은 구독자들에게 호응을 얻은 ‘한국사 요약 시리즈’와 ‘인물 사전’을 결합하여 만들어졌으며, 유튜브에서 담지 못했던 풍부한 에피소드들과 표현들을 추가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한 가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점은 이 책이 역사의 모든 면을 담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꽤나 자극적인 갈등을 소재로 조선의 건국부터 멸망까지 그 일련의 과정을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다루고자 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을 꼼꼼히 검토하여 팩트 체크에 심혈을 기울였으니 당시 상황을 유추하며 조선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조선 갈등사》를 통해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쉽고 재미있는 역사 이야기를 만들고 싶었다. 역사 속 인물들의 인간적인 면모와 이를 둘러싼 권력 다툼, 갈등이 ‘어쩌면 당신이 원했던’ 조선의 이야기이지 않을까 기대해본다.

 

신정훈

 


 

 

프롤로그 당신이 원했던 조선 이야기를 들춰 보다

 

 

1장 타락한 고려 말, 구세주의 등장

변태성욕자가 된 고려의 왕

엽기적인 행각, 처참한 죽음

혜성처럼 등장한 이성계

최영의 고려, 이성계의 고려

개죽음을 당할 것인가, 반역을 저지를 것인가

또다시 난관, 정몽주의 개혁과 정도전의 건국

 

 

2장 아들을 세자 자리에 앉히기 위한 욕심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 강씨

피도 이길 수 없는 권력, 왕자의 난

 

 

3장 왕이 된 태종 이방원, 그의 끝나지 않는 킬러 본능

이방원의 조력자, 원경왕후 민씨

이방원의 숙청, 민씨 집안을 박살내다

희대의 인간 말종 맏아들, 양녕대군

 

 

4장 충격적인 세종의 며느리들

소박맞은 첫 번째 며느리

상상 임신과 동성애, 두 번째 며느리

세종의 마지막 며느리, 권씨

 

 

5장 김종서와 대신들의 조선 vs 수양대군의 조선

계유정난, 피바람을 일으키다

수양대군을 왕으로 인정하지 못한 사육신

 

 

6장 성군으로 평가받는 성종의 여자 사랑

성종의 사랑을 듬뿍 받은 여인, 윤씨

남편의 사랑을 갈구한 아내의 비극

 

 

7장 역사상 최악의 폭군

그의 첫 번째 피바람, 무오사화

피의 복수극, 갑자사화

색에 미쳐버린 폭군

 

 

8장 아무 힘없는 허수아비 임금, 중종

여인들의 전쟁

작서의 변, 세자를 저주하다

 

 

9장 천하를 손에 쥔 여인, 여인천하

나라를 뒤집었던 도적, 임꺽정의 난

여인천하의 결말

 

 

10장 임진왜란의 주인공, 선조

선조의 치세

임진왜란의 비겁한 주인공

질투의 끝판왕

 

 

11장 폭군이 된 임진왜란의 영웅, 광해군

피도 눈물도 없는 숙청, 계축옥사

광해군의 비참한 말로

 

 

12장 다시 일어난 쿠데타, 인조반정

밑도 끝도 없는 의심이 일으킨 이괄의 난

조선을 침략한 후금, 정묘호란

조선 최악의 굴욕, 병자호란

희대의 악녀 후궁 조씨와 지혜로운 소현세자 부부

조선의 미래, 현명한 소현세자 부부

 

 

13장 효종의 즉위와 조씨의 죽음

효종의 치세와 어이없는 죽음

예송논쟁의 현종

 

 

14장 배신남 숙종에 의해 벌어진 치열한 환국

사랑하는 여인과의 생이별

장희빈의 재등장

최종 승리자는 무수리 최씨

 

 

15장 백성을 위한 임금의 욕심

왕이 된 장희빈의 아들, 경종

극심한 콤플렉스에 시달린 영조

너무나 소중한 아들, 이선

미치광이 연쇄살인마, 사도세자의 비참한 말로

 

 

16장 조선의 마지막 희망

평생 한 여자만 바라보고 사랑했던 순정파, 정조

자신의 전부를 잃어버린 정조

 

 

17장 조선을 병들게 한 세도 정치

역대 가장 어린 임금, 헌종

농부에서 왕이 된 강화도령

흥선대원군의 시대

악순환의 고리를 끊었지만 외교의 문도 걸어 잠그다

 

 

18장 고종과 그의 아내, 중전 민씨

분노한 구식 군대의 임오군란

세상을 바꾸기 위한 쿠데타, 갑신정변

세상을 바꾸기 위한 백성들의 봉기, 동학농민운동

 

 

19장 500년 조선 왕조의 최후

왕비가 시해되다, 을미사변

고종의 아관파천

뜬금없는 대한제국 선포, 마지막 기회

조선의 멸망과 또 다른 고통의 시작


 

 

일러두기

이 책에서 사용된 《조선왕조실록》 외 사료들은 독자들의 이해와 흥미를 높이기 위해 원문의 내용에 저자의 해석을 더하여 표현하였습니다.



역사를 둘러보면 멸망한 국가들에는 공통점이 존재한다. 인간의 지나친 욕심에서 비롯한 기득권층의 오랜 집권이 곧 부패와 타락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한반도의 역사 또한 다르지 않았다.

 

세상을 지배한 원나라의 간섭이 극에 치달은 고려 말, 80년의 긴 시간 동안 원의 간섭으로 고려에서는 원나라에 빌붙는 친원파인 권문세족들이 득세하게 되었다. 왕건이라는 불세출의 영웅이 건국한 고려도 어느새 본인의 부와 권세만을 생각하는 권문세족들에 의해 망가질 대로 망가진 상태였다. 그들의 횡포에 고통 받는 자는 언제나 백성들이었다.

그러나 캄캄하기만 할 것 같던 고려의 국운에 한 줄기 빛이 등장했다. 그가 바로 공민왕이다.

 

고려의 모든 왕은 어릴 적 원나라에 볼모로 잡혀 있어야 했다. 거기에 더해 나이가 들면 원나라 공주에게 장가를 들어야만 했던 것이 아무 힘없는 고려 왕실의 신세였다. 그러한 처참한 현실 속에서도 굴하지 않았던 공민왕. 타락한 고려를 다시 일으켜 세우고자 그는 굳게 다짐했다.

“썩어빠진 권문세족과 원의 세력을 몰아내고 자주적인 고려를 만들겠어!”

개혁에 강한 의지를 품으며 자신을 지지해줄 새로운 세력을 찾아 나섰다. 바로 신진사대부. 신진사대부의 대표적인 인물인 정도전과 정몽주는 고려의 마지막 구세주인 공민왕과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이때 누구보다 공민왕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 이가 그의 사랑하는 아내인 노국대장공주였다. 고려 왕은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만 했기에 원나라의 공주들은 하나같이 원의 스파이가 되어 고려 왕을 감시하고 괴롭혔지만, 그녀는 달랐다.

“저는 고려에 시집왔으니 고려인이며 마땅히 고려의 풍속을 따르겠습니다.”

원나라를 배척하는 정책에 반대하기는커녕, 오히려 든든한 지원군이 되어준 그녀는 원의 스파이가 되기보다는 공민왕의 반려자 길을 택했다. 그녀의 뜻에 끝없는 고마움을 느끼며 평생 노국대장공주만을 사랑하겠노라 맹세한 공민왕이었다.

이 맹세가 고려 멸망의 원인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른 채.

 

사랑은 상상을 초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아무리 고통스럽고 괴로운 길이라도 사랑은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준다. 하지만 반대로 한 사람의 전부였던 사랑을 잃는다면 그만큼 상실감은 헤아릴 수 없이 잔혹하다.

공민왕이 그러했다. 모든 정치적 어려움을 이겨낸 그였지만, 그의 전부였던 노국대장공주를 잃은 뒤 그는 빛을 잃었다.


 

 

변태성욕자가 된
고려의 왕

 

 

 

 

결혼생활 15년 만에 드디어 임신하게 된 노국대장공주. 그동안 왕실에서는 후사가 없는 것이 큰 걱정이었기에 그녀의 임신은 크나큰 축복이었다. 무엇보다 공민왕이 가장 기뻐했음에 틀림없었으리라.

하지만 1365년, 야속하게도 노국대장공주는 출산 도중 아이와 함께 그만 생명을 잃는다. 그녀와의 갑작스러운 이별로 인해 공민왕은 더 이상 개혁의 의지도, 살아야 할 이유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앞으로 오직 비극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를 잊지 못해 공민왕은 매일 그녀의 초상화를 그렸다. 그림이 마치 살아 있다는 듯 마주보며 식사하기도 하고,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 갑자기 슬피 울기도 하고, 3년 동안은 아예 고기도 먹지 않았다. 이때부터 고려의 유일한 구세주의 모습은 온 데 간 데 없이 공민왕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쳐버리게 되었다.

신진사대부와 함께 꿈꿨던 개혁 의지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정사는 내팽개쳐두고 그는 온갖 기행을 저지르게 된다. 슬픔에 젖은 채 오직 아내의 영전 건설에 막대한 돈과 인력을 쏟았고, 이에 국고가 남아나지 않게 되어 백성들에게서 극심한 원성을 사게 되었다. 이후 점점 정신병이 심해진 그는 방탕한 변태성욕자로 변해갔다.

 

“용모가 빼어난 소년들을 들여라.”

1372년, 어느 날 그는 갑자기 자제위라는 기구를 만들도록 명했다. 젊고 아름다운 귀족 자제들 중 미소년들을 뽑아 자제위에 소속시켰다. 그들의 역할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공민왕 자신의 호위 겸 성적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그의 총애를 받는 어린 꽃미남들에게 자신의 침소에서 시중을 들게 했다. 마음의 병이 점차 깊어질수록 그의 엽기적인 만행은 도를 넘어섰다.

공민왕은 자제위들을 침실로 부른 뒤 자신의 궁녀들과 음란한 행각을 하도록 명했다. 왕의 명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그들은 강제로 성관계를 나눌 수밖에 없었다. 공민왕은 몸이 섞인 그들의 모습을 보며 쾌락을 느꼈고, 더 나아가 본인 스스로 여장을 하여 자제위들과 동성애 행각을 벌였다.

공민왕의 총애를 받던 자제위들은 온갖 위세를 부리며 고려 왕실을 개판 5분 전으로 만들었으니, 수많은 신하들이 무슨 미친 짓이냐며 비난했다. 그럼에도 자제위는 열심히 공민왕의 타락을 도왔다.


 

 

엽기적인 행각,
처참한 죽음

 

 

 

 

문제는 이때까지도 아직 왕의 후사가 없다는 것이었다. 노국대장공주가 세상을 뜬 후 얻은 후비들이 있었지만, 공민왕은 그녀들을 아예 거들떠보지 않았다. 허구한 날 자제위들과 음란한 기행만 하고 있었으니 후사를 보지 못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어느 날 공민왕은 후사 문제를 타개할 매우 기발한 아이디어를 떠올린다. 그는 가장 총애하는 자제위 소속 홍륜을 조용히 불러 명령했다.

“내 아내를 겁탈해라!”

동성애만으로는 후사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공민왕. 고민 끝에 결정한 계획은 상당히 엽기적이었다. 노국대장공주 이외의 여인과는 죽어도 관계를 맺기 싫었던 것인지, 아니면 완벽한 동성애자로 변모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후비들과 동침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대신 홍륜으로 하여금 후비들을 간음하도록 명했다. 그 사이에서 낳은 아들을 자신의 후사로 속이기 위해.

이 말도 안 되는 계획을 공민왕은 거침없이 진행했다. 그러나 후비들은 그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엽기적인 행각을 모두 거부하며 심지어는 자결하려는 모습에 공민왕의 계획은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생각이 없던 그는 익비 한씨에게 칼을 들이밀며 협박했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익비는 결국 홍륜과 사통할 수밖에 없었고, 이후에도 홍륜은 왕의 명이 없어도 몰래 익비와 지속된 동침을 이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공민왕의 계획은 결실을 맺게 되었다.

 

익비는 공민왕의 바람대로 홍륜의 아이를 임신했다. 이 소식을 환관 최만생이 가장 먼저 알아챘다. 최만생은 다급하게 변소에 있는 공민왕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렸다.

“익비가 홍륜의 아이를 임신했습니다.”

술에 잔뜩 취한 공민왕은 이에 대답했다.

“홍륜을 죽여야겠구나.”

익비와 홍륜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자신의 후사로 속이기 위해서는 홍륜이 제거되어야만 했다. 홍륜만 없으면 오랜 계획을 성공시킬 수 있으리라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홍륜 말고도 없어져야 할 인물이 한 명 더 있었다. 그는 최만생을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너도 이 비밀을 알고 있으니 죽어야겠다.”

 

왕이 홍륜 등에게 여러 비빈妃嬪과 간통하게 하여 아들을 낳아 후사로 삼기를 기대하였는데, 익비가 임신하였다. 환관 최만생이 일찍이 왕을 따라 측간에 가면서 몰래 보고하여 이르기를, “신이 익비전에 갔더니 익비가 말씀하시길, ‘임신한 지 5개월이 되었다.’고 하셨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영전影殿을 부탁할 곳이 없어 근심하였는데, 익비가 이미 임신하였다고 하니 내가 무엇을 근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잠시 후 묻기를 “누구와 관계를 가졌더냐?” 라고 묻자, 최만생이 말하기를, “익비가 홍륜이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내일 창릉昌陵을 알현하고 거짓으로 술자리를 베풀어 홍륜 등을 죽여서 입을 막을 것이다. 너도 이 계획을 알고 있으니 모면할 수 없을 게야.”라고 하였다.

─ 《고려사》 권131, 열전 권제44

 

순식간에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공포에 질린 최만생은 황급히 궁을 빠져나왔다. 자신이 곧 죽게 되리란 것을 안다면 어느 누구도 이성적인 판단이 힘들 것이다.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한 가지뿐이었다. 바로 홍륜을 찾아가 모두 죽게 되리란 사실을 알리는 것.

최만생으로부터 공민왕의 계획을 전해 들은 홍륜은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겁이 났다. 자제위 동료들도 두려움에 떨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머리를 싸매고 회의를 거듭할수록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내 공포는 분노로 변했다.

“죽을 바에는 차라리 왕의 목을 치자.”

 

1374년 공민왕의 계획을 알아챈 그날 밤, 그들은 거사를 치르게 된다. 홍륜과 최만생을 포함하여 자제위 동료들은 임금의 처소로 향했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달빛 아래 빛나는 것은 오직 그들 손에 들려 있는 회색빛의 칼날뿐이었다. 순식간에 처소로 난입한 그들 앞에는 술에 취해 잠든 공민왕이 있었다. 그들의 눈에 더 이상 그는 임금이 아닌 사라져야 할 존재에 불과했다. 그 순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일제히 공민왕을 향해 달려들었다. 회색빛을 띠던 칼은 온통 핏빛으로 물들어갔고, 무자비한 칼부림에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도질을 당하여 뇌수가 벽에 흩뿌려졌다.

그렇게 고려의 임금이 참혹하고 허망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왕의 시해를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건의 전말은 밝혀졌다. 결국 시해에 가담한 모든 이들은 사형을 당했다. 그러나 아무것도 되돌릴 수 없었다.

 

공민왕의 처참한 죽음과 함께 고려의 몰락이 다가오고 있었다.


 

 

혜성처럼 등장한
이성계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온 힘을 다했던 이들에게 공민왕의 죽음은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다. 특히 공민왕을 믿고 따른 신진사대부들은 지지 세력이 없어졌으니 한순간에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젠장.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이를 어쩐담….”

신진사대부 정도전과 정몽주는 큰 혼란에 빠졌다. 희망을 버릴 만도 하지만 그들은 마흔이 넘는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열정적인 개혁 의지를 갖고 혁명을 준비했다. 그렇지만 의지만으로는 부족했다. 아무 힘이 없어진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다. 강력한 힘이 필요했다.

그들은 똑똑한 머리, 즉 문을 겸비했으니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강력히 떠오르는 무인武人 세력이었다. 그들의 레이더망에 들어온 첫 번째 이는 고려의 영웅이자 무인 세력의 넘버원 최영 장군이었다.

수많은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최영은 청렴결백한 인물이었다. 또한 언제나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 정도로 검소한 자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한 가지 치명적인 결격 사유가 있었다. 바로 권문세가. 즉, 다이아 수저였다는 것. 고려를 개판치는 권문세족을 몰아내려는 정도전과 정몽주에게 최영은 어울리지 않았다.

 

다시 희망을 품고 주변을 둘러보니 한 명이 눈에 띄었다. 또 다른 난세의 영웅으로 수많은 전공과 함께 막강한 군사력을 갖고 있는 한 사나이. 권문세족이 아닌 시골 변방 출신의, 그들이 찾던 사나이. 그가 바로 이성계였다.

동북면 쪽에서 천천히 자신만의 세력 기반을 꾸려온 이성계는 수많은 적을 물리치며 공민왕의 신임을 받는 인물이었다. 특히 혼란스러운 고려 말기에 백성들을 괴롭히던 홍건적과 왜구를 단 한 번의 패배 없이 보이는 족족 두드려 팼으니, 백성들에게 그는 영웅이나 다름없었다. 이런 그에게 정도전이 찾아와 비장하게 말했다.

“새로운 세상을 함께 만듭시다!”

이성계 또한 정도전이야말로 자신이 그토록 찾던 문인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강력한 장수가 더 큰 야망을 꿈꾸기 위해서는 제갈량과 같은 책략가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들의 운명적인 만남은 혁명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믿고 있었다. 그들의 꿈이 이루어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최영의 고려,
이성계의 고려

 

 

 

 

세상은 점점 빠르게 변해가고 있었다. 세계를 제패했던 용맹한 모습의 원나라는 그 위상을 잃은 채 타락해갔고, 결국 새롭게 떠오른 명나라가 원나라를 북쪽으로 몰아내 사실상 대륙의 주인이 되었다. 이것이 바로 원명 교체기다.

 

원나라를 물고 빨며 권세를 누리던 친원파, 권문세족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권력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정국은 권문세가 최영을 안은 친원파와 이성계를 낀 친명파인 신진사대부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명나라에서 글 한 통이 날아왔다.

‘이제 우리가 대륙의 주인이다. 그러니까 철령 이북은 우리 땅이니 내놔라.’

철령 이북 지역은 본래 고려의 땅이었다. 원나라에게 강제로 빼앗겼지만 공민왕 때 비로소 어렵게 되찾은 지역이었다. 그런데 그 땅을 자기네 것이라 우기니 막가파도 이런 막가파가 없었다. 이때 최영이 길길이 날뛰며 분노했다.

“당장 명나라 놈들을 공격해야 한다!”

최영은 고려 임금 우왕을 적극적으로 설득했다. 당장 명나라에 선제공격을 하지 않는다면 눈 뜨고 코 베이는 꼴이 되기 십상이었다. 그동안 우왕은 장인어른이기도 한 최영을 많이 의지하고 있었고, 정치는 쥐뿔 아는 것이 없었다.

험악해진 고려 조정에서 최영의 주장에 힘이 실렸고, 결국 그는 왕의 허락을 받아 거침없이 전쟁을 준비해나가기 시작했다.

 

반면 고려의 또 다른 실권자 이성계는 큰 고민에 빠졌다. 명나라의 막강한 군사력을 알고 있었기에 무턱대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은 승산이 없다고 생각했다. 또한 당시 고려 내부 사정도 여러모로 개판이었으니 승산도, 득도 될 것이 없는 싸움이었다. 이성계는 네 가지 이유를 들어 전쟁을 반대했다.

 

첫째,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둘째, 여름철에 군사를 동원하면 중요한 농사를 망칠 수 있기 때문에 옳지 않습니다.

셋째, 온 나라 군사를 동원하여 멀리 정벌하면 왜구가 쳐들어올 것이니 옳지 않습니다.

넷째, 한창 장마철이니 활은 녹슬어 시위가 줄어들고, 병사들 사이에 전염병이 돌 것이니 옳지 않습니다.

─ 이성계 ‘4불가론’

 

사실 그렇게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전쟁을 위해서는 전 병력을 이동시켜야 하는데, 그사이에 왜구가 고려를 침략할 것임이 분명했다. 또한 농업 국가였던 고려는 농사철인 여름이 가장 중요했기 때문이다. 만일 출전했다 하더라도 장마가 들이닥치고 전염병이 돌면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그러나 고려의 넘버원은 최영이었다. 이미 우왕의 마음에 기름칠을 잔뜩 해놓았으니 이성계는 임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가라면 가라.”

 

결국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그날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개죽음을 당할 것인가,
반역을 저지를 것인가

 

 

 

 

1388년 4월, 모든 전쟁 준비를 마치고 마침내 출전을 시작하는 날이 다가왔다. 이제 그 누구도 전쟁을 막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한 가지 변수가 생겼다. 최고사령관 최영의 주도로 진행될 계획이었지만 돌연 그가 불참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막상 최영이 원정을 떠난다 생각하니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는 우왕이 불안에 떨게 된 것이다. 그동안 최영만 믿고 발칙한 사춘기마냥 막장 인생을 살아온 인물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최영 장군은 여기 남아 나와 같이 정사를 돌보세요!”

결국 최영은 원정에 참여할 수 없게 되었다. 본인의 적극적인 주장으로 시작된 전쟁임에도 불구하고 철딱서니 없는 왕의 요청에 의해 본인이 전쟁에 불참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원정의 선봉은 전쟁을 강력히 반대한 이성계가 맡게 되었다.

어리석게도 이 결정이 참혹한 비극으로 다가올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소수 병력을 제외한 고려의 전 군사 5만 명을 이끌고 요동 정벌을 출병한 이성계. 약 한 달을 걸려 마침내 요동 지역의 위화도 섬까지 당도하게 된다.

사실 그동안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이성계의 예상대로 장마가 시작되었고, 무리한 출병으로 많은 병사들이 죽었으며, 군의 사기가 저하되어 탈영병들이 속출했다. 이에 이성계는 말머리를 돌릴 것을 간곡히 요청했으나, 최영은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강력하게 진군하라 명을 내릴 뿐이었다.

이성계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 비친 군사들의 모습은 몹시도 지쳐 보였다. 식량도 부족해 다들 야위어갔고, 추적추적 내리는 장맛비는 그 모습을 더욱 처량하게 만들었다. 점점 노을이 드리우는 위화도 섬에서 그는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개죽음을 당할 것인가, 아니면 반역을 일으킬 것인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이성계는 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말머리를 돌려라!”

그렇게 목숨을 건 위화도 회군이 시작되었다.

회군 속도는 엄청났다. 10일 만에 개경에 도달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최영은 황급히 방어 태세를 갖추었으나, 고려의 군사 대부분이 이성계와 함께 떠났기 때문에 최영은 아무 힘을 쓸 수 없었다. 그저 이성계를 혼자 보낸 자신을 후회하며 분노하고 있었으리라.

함께 뜻을 이루며 최고 실권자의 위치까지 오른 두 사람, 최영과 이성계. 이성계를 그 위치까지 올려주고 지지해준 이가 최영이었다. 그렇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사사로운 감정에 휩쓸려서는 안 됐다. 이성계는 자신이 따르고 존경했던 최영에게 마지막으로 나지막이 말했다.

“내 본의가 아닙니다. 그저 대의를 위한 것입니다. 부디 잘 가십시오.”

 

최영은 결국 제거되었고 우왕은 폐위되었다. 이제 새로운 세상이 도래하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또다시 난관,
정몽주의 개혁과 정도전의 건국

 

 

 

 

사실 이성계의 반란은 그의 단독 행동으로 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