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사카이 준코酒井順子

1966년 도쿄에서 태어났습니다. 고등학생 때부터 잡지에 칼럼을 기고했습니다. 릿쿄대학교 사회학부 관광학과 졸업 후 광고회사에서 일했고, 지금은 전업 작가로 활동 중입니다. 2004년 『네, 아직 혼자입니다 負け犬の遠吠え』로 후진코론문예상, 고단샤에세이상을 수상했습니다. 『깔보는 사람의 심리 下に見る人』, 『아무래도 아이는 괜찮습니다 子の無い人生』 등 다수의 저서가 있습니다.

 

 

옮긴이남혜림

서강대학교 문학부 사학과 및 한국외국어대학교 통번역대학원 한일과를 졸업하고 현재 전문 한일 통번역인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옮긴 책으로는 『인공지능 개발 이야기』, 『그래 별을 팔자』, 『생각 좀 하고 살아라』, 『바람이 분다』, 『마음 다스리기, 명상에 길이 있다』, 『검증, 미국사 500년의 이야기』, 『중국사, 한권으로 통달하다』 등이 있습니다.



일러두기

일본에서는 천황이라고 부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일반적으로 일왕이라 부르며 이 책에서는 일본 표기인 텐노를 살렸습니다.

 

 

KAZOKU SHURYO by Junko Sakai

Copyright ⓒ 2019 Sakai Junko

All rights reserved.

First published in Japan in 2019 by SHUEISHA Inc., Tokyo.

Korean edition published by arrangement with

Shueisha Inc., Tokyo in care of JAPAN UNI Agency Inc., Tokyo

through BC Agency

 

이 책의 한국어판 저작권은 BC에이전시를 통해 저작권자와 독점계약을 맺은 (주)사계절출판사에 있습니다. 저작권법에 의해 한국 내에서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합니다.


들어가며

 

 

 

 

 

한동안 병으로 요양 중이던 오빠가 세상을 뜨면서 제게 ‘가족’이었던 사람은 이제 아무도 세상에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태어나서 자란 가족을 ‘생육가족’, 결혼 등으로 인해 새로 생긴 가족을 ‘창설가족’이라고 한다는데 제 생육가족의 구성원은 저만 빼고 모두 세상을 떠난 거지요. 이제 가족이라는 게 끝이 났구나 싶더군요. 오빠가 올케와 조카를 남기고 갔다지만 두 사람은 오빠의 창설가족이지 제 생육가족은 아닙니다. 그리고 저에게 동거인(남성)은 있지만 혼인 관계도 아니고 아이도 없습니다. 가족이 사라진 상황인 거지요.

제 나이 삼십대에 아버지가, 사십대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오빠와 제가 생육가족으로 남았습니다. 형제란 자라면서 남남이 되는 법이라지요. 저와 오빠도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좋지도 않은, 그저 필요한 만큼만 오가는 사이였습니다. 굳이 “우리집은 말이야…….” 하며 생육가족 이야기를 나눠본 적도 없이, 그렇게 세월은 흘렀습니다.

그런데 오빠가 세상을 뜨고나니 새삼 오빠의 부재가 저에게는 생육가족의 소멸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우리집 니쿠자가(고기감자조림)에 소고기를 넣었나, 돼지고기를 넣었나? 아니 니쿠자가를 먹긴 먹었나?”, “왜 우리집에는 세뱃돈 주고받는 풍습이 없었지? 돈 아끼느라? 아니면 그렇게 하자고 약속이라도 했었나?” 같은 하나도 중요하지 않지만 알고는 싶은, 가족에 대한 궁금증을 털어놓을 상대가 이제 없는 것입니다. 제 생육가족에 대한 기억은 제 빈약한 해마海馬에만 존재하게 된 거지요.

아이가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창설가족에게 생육가족의 기억을 불어넣어서 가족의 혼을 이어나가겠지요. 내 어머니가 만들어주셨던 햄버그스테이크를 내 아이에게도 먹여서 가족의 맛을 이어가는 것. 말투나 예의범절, 교육 방침, 또는 수건 교체 주기나 도시코시소바(일본에서 섣달 그믐밤 무병장수를 기원하며 먹는 전통음식) 먹는 타이밍 같은 소소한 일들까지 배우자와 합의하면서 자신의 창설가족에 전수할 것이고요.

하지만 저는 창설가족이 없다 보니 가족에 대한 기억도 저를 마지막으로 끝나게 됩니다. 나어린 조카가 오빠가 지니고 있던 생육가족의 기억을 그다지 이어받았을 것 같지도 않네요. 제가 죽으면 제 안에 간직해왔던 가족에 대한 기억도 깡그리 사라지겠지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한다고 해서 슬프거나 쓸쓸하거나 원통한가 하면 딱히 그렇지도 않은 거예요. 이미 그렇게 된 걸 어쩌겠어요. 대단한 명문가도 아니고 물려받을 기술이나 간판이 있는 것도 아니다 보니 사라진다 한들 그게 큰 문제일까 싶어요.

그리고 요즘 일본에는 저와 같은 사고방식을 지닌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족이 사라지는 현장에 있으면서도 그에 관한 기억이 사라진다는 사실에 별 감흥이 없는 저 같은 사람이 많다 보니 일본의 인구가 줄어드는 것일 테고요.

일본인은 본디 어딘가에 ‘소속됨’으로써 행복을 느꼈던 모양입니다. 직장의 일원, 지역의 일원 하는 식으로 어떤 조직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 무탈하게 살아가기 위한 전제 조건이었던 셈이지요.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조직이 가족 아니었을까요?

옛날 소설이나 영화를 보다 보면 가족이라는 조직이 단절되지 않고 이어질 수 있도록 일본인이 얼마나 애써왔는지, 당시 사용했던 언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가령 ‘결혼하다’는 말은 ‘몸을 다잡다身を固める(직역하면 ‘몸을 단단히 하다’, 즉 ‘몸과 마음을 다잡아 단단히 채비하다’라는 뜻)’라는 의미였지요.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아직 ‘몸이 제자리를 잡지 못한 상태’이며 배우자를 만나야 비로소 중심이 잡힌다는 뜻입니다.

부모는 아들에게 얼른 ‘몸을 다잡으라’며, 그러니까 장가가라고 다그치곤 했습니다. 아들이 창설가족을 만들지 않으면 대가 끊어진다느니, ‘결혼 안 한 사람은 아직 어른이 아니’라느니 하며 결혼을 종용한 거죠.

한편 딸을 시집보낼 때는 ‘치운다’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딸도 이제 겨우 치웠다오.”, “저희는 아직 딸자식을 치우질 못해서 걱정이에요.” 하는 식으로 말이지요. 나이 꽉 찬 딸이 시집도 안 가고 생육가족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고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딸은 혼기가 차면 얼른 남의 집으로 보내야 할, 즉 ‘치워’야 할 존재였습니다.

지금 그런 표현을 썼다가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다문화주의를 주창하면서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에 근거한 언어 사용이나 활동을 바로 잡으려는 운동)’에 민감한 사람들한테 항의깨나 듣겠지요. 하지만 옛날 어르신들은 젊은이들이 팔자 좋게 독신으로 눌러 있지 못하도록 일부러 야박하게 말했습니다. 때가 되면 젊은이들은 생육가족에서 창설가족으로 소속을 바꿔야만 했으니까요.

자식이 창설가족을 만들지 않아 대가 끊길까봐 부모는 자식을 압박했습니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이 왜 그렇게까지 대 잇기에 목을 맸는지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이렇다 할 설명도 없이 원래 그런 거라며 남자아이는 때가 되면 ‘몸을 다잡’고, 여자아이는 ‘남의 집으로 치워져’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이가 없으면 양자라도 들여 어떻게든 대를 이으려고 했지요.

요즘 세상에는 보기 힘든 풍경이지만 예전에는 대를 잇기 위해 양자를 보내거나 들이는 일이 흔했습니다. 사실 제 아버지도 아이가 없던 친척 가족인 사카이 가문에 양자로 들어온 경우였어요. 친부모가 근처에 살았지만 아버지는 퍽 연세가 많은 양부모 밑에서 자라셨지요. 지금이라도 “아버지도 힘드셨겠네요.” 하고 한마디 건네고 싶네요. 하지만 저희 아버지가 친부모 슬하를 떠나 외로움을 견디며 지켜온 사카이 가문도 이제, 못난 딸자식 때문에 ‘가족 종료’를 선고받을 처지가 되었군요. 시대가 시대이기는 하지만, 우리 아버지도 이중으로 딱하게 되었네요.

이 상황을 보면 조부모와 제 세대 사이의 가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알 수 있지요. 메이지 시대(1868~1912년, 일본 근대의 메이지텐노 통치 시대)에 태어나신 제 조부모님은 양자를 통해서라도 대를 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윽고 그 양자도 결혼을 해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 즉 오빠와 저를 낳았습니다. 이로써 집안이 순조롭게 이어지겠구나 싶으셨겠지만, 그렇게 되지는 않았네요.

‘대를 이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째서 제 세대에서 소멸하게 된 것일까요? 가만히 살펴보니 거기에는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생각에 대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조부모 시대에는 어딘가에 ‘소속’되는 것 자체가 행복이었습니다. 그 행복은 개인이 아닌, 가족이나 지역 같은 조직 차원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었겠지요. 그렇다 보니 소속된 곳이 없으면 행복해질 수 없다는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 집안을 이어가야 했던 거고요.

하지만 그 후 시대는 변했습니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인들은 ‘나라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최상위 조직인 국가에 헌신했고 그 조직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이 행복인 줄 알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전쟁에 패하고 미국에서 개인주의가 물밀듯이 들어오면서 사람들은 개인이 행복을 추구해도 된다는 사실에 눈뜨게 됩니다. ‘소속된다는 것, 행복은커녕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 아냐? 사람을 옭아매기만 하고.’ 하며 사람들의 속마음이 나오기 시작한 거지요.

이때부터 일본인은 중매가 아닌 연애로 결혼하거나 여자들도 바깥일을 하는 등 개인의 행복과 삶을 추구하게 됩니다. 제 아버지는 그 시대적 급변의 중심에 서 있던 세대입니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미국 대항전에서 ‘텐노(일왕의 일본 공식 명칭) 폐하 만세’를 부르짖던 군국주의 소년이었지만 대학 시절에는 미군 기지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영어를 배웠다고 해요. 시급이 당시로서는 상당히 고액이었다고 하네요. 아버지보다 열 살 아래인 어머니는 전후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망설임이 없었습니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연애하고 결혼했으니 태어난 아이들에게 ‘무조건 대를 이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은 당연히 하지 않았지요.

일본 전역에서 대를 이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는 곳은 아무래도 텐노가이지요. 텐노가를 보면 알 수 있듯 가문을 존속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입니다. 헤이세이텐노(1989~2019년)는 세 명의 자식을 두었습니다. 처음에야 ‘이로써 텐노가의 안녕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차남을 빼면 두 명은 늦게 결혼했고 텐노가를 이을 사내아이는 세 명의 자식 중 한 명에게서만 태어났습니다. 차남의 부인이 서른아홉의 나이에 거짓말처럼 임신에 성공해서 낳은 귀한 사내아이가 일본 황실의 생명 줄인 거지요.

대 잇기가 일본의 어느 집보다 중요한 텐노가조차 이 지경이니 평범한 집이라면 정신 줄 놓고 있다가는 곧 대가 끊어지고 맙니다. 제 친구들을 봐도 형제자매가 모두 결혼해서 모두 아이가 있는 경우는 드뭅니다.

이렇듯 집안을 이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있었기에, 전통적으로 일본에서는 남녀, 또는 장남 및 차남 이하를 확연히 다른 방식으로 훈육했습니다. 장남에게는 ‘대를 이을’ 존재로서, 반면 차남 이하의 아들이나 딸에게는 ‘언젠가 집을 떠날’ 존재로서의 자각을 어렸을 때부터 주입한 거지요.

하지만 그런 교육도 전후 개인주의가 유입되면서 약해지기 시작합니다. ‘이에제도(1891년에 제정된 일본의 가족제도로, 호주에게 가족 통솔 권한을 줌)’에 불만이 있던 사람들은 개인의 인생을 추구했습니다. 집에 얽매이지 않고 홀가분하고 즐겁게 살자는 거지요.

우리집도 그런 시대에 두 명의 젊은이가 만나 만들어진, 쇼와 시대(쇼와텐노 재위 기간, 1926년 12월 25일~1989년 1월 7일) 고도성장기의 가족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앞선 시대였다면 젊은이들은 부모가 정한 사람과 백년가약을 맺었겠지만, 제 부모님은 자유연애로 결혼에 골인합니다. 양친의 반대도 있었던 모양이지만 그런 반대가 사랑하는 두 청춘에게 무슨 의미가 있었겠어요. 그저 함께 있고 싶다는 마음을 따를 뿐, 집안을 잇겠다는 생각 따위 있었을 리가 없지요.

제 어린 시절을 돌이켜봐도, 부모님이 딱히 가문에 대한 생각을 주입하신 적은 없습니다. 오빠가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맏아들이니까 대를 이어야 한다는 식의 구구한 다짐을 듣지는 않았을 거예요. 물론 저도 시집가서 훌륭한 며느리가 되어야 한다는 식의 교육은 전혀 받은 바가 없고요.

다만 한 가지 기억나는 게 있다면, 어머니가 여자는 결혼하면 어차피 집안일을 해야 하니까 벌써부터 할 것 없다며 저에게 집안일을 시키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머니도 딸은 언젠가 남의 집 며느리가 될 몸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지만, 그렇다고 결혼해서 망신당할 일 없게 미리 집안일을 익혀두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평생 할 집안일, 안 그래도 안쓰러운데 벌써부터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시대의 영향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머니의 개인적인 성향 때문이었을까요? 그런 어머니가 딸인 저에게 강조한 것은 젊었을 때 실컷 놀아두라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학생 때 정말이지 신나게 놀았단다. 그러니까 너도 그래야지.”

어머니는 이렇게 말하며 사춘기 딸이 몇 시에 나가 몇 시에 집에 오든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신나지 않으면 인생이 아니다’식의, 왕년의 후지TV 슬로건과도 같은 독특한 교육 방침을 갖고 계셨지요.

그 덕에 저도 신나게 놀며 80년대를 보내기는 했지만, 너무 큰 자유가 주어지면 오히려 스스로 자제하는 법입니다. 제가 할 거 다 하면서도 경찰 신세를 지지 않고 청춘기를 넘길 수 있었던 것은 ‘모든 것은 아이의 자율성에 맡긴다’는 부모님의 만용이 효과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또한 여자아이는 집안일 같은 거 안 해도 된다는 교육 역시 저로 하여금 ‘그렇지만 내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 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고, 저는 지금 딱히 집안일을 싫어하지 않는답니다.

‘자신의 책임하에 개인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저희 부모님의 이런 교육 방침을 ‘결과가 좋았으니 좋게 생각할 수 있던 것’이라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방침이 ‘가족 창설’에서만큼은 유독 소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젊은이에게 개인의 행복 추구란 그저 신나게 사는 걸 뜻할 뿐이라, 저는 치장을 하고 이성과 사귀거나 운동을 하거나 여행 다니는 데 온 힘을 쏟아가며 청춘을 보냈습니다.

어머니와 제 세대와의 차이점이라면, 어머니 세대에는 ‘결혼은 필수’라는 의식이 뿌리 깊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젊어서 아무리 잘나가던 여자라도 스물 남짓이 되면 벌써 ‘그래도 여자가 살길은 결혼밖에 없다’며 이런저런 방식으로 ‘치워졌’던 것이 어머니 세대였지요.

그러다가 제 세대가 되면서 소속이 주는 행복보다 자유가 주는 행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강해졌고, 결혼은 나중 일이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저도 당신처럼 때가 되면 적당히 시집가리라 믿었겠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요.

제가 이십대였을 때, 여자가 즐겁게 살고자 마음먹으면 못할 것이 없었습니다. 결혼은 모두가 하는 당연한 일이 아니었고, 본인이 혼자 사는 삶이 좋다면 부모라고 해서 말릴 수는 없는 시대였지요. 가정을 꾸린다는 것은 신나는 일들을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덩실덩실 흥에 취해 있는 사이 세월은 가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이는 어느덧 오십 줄. 옛날 같았으면 인생 거의 다 살았다 해도 이상할 게 없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즐거움을 참아가며 아이를 키워온 친구들을 보니 곁에는 어느새 아들딸들이 번듯이 자라나 있네요. 전구를 갈아 주거나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주기도 하고 외식을 시켜주기도 하는 아주 어엿한 젊은이들이 되었습니다. 창설가족이 성숙해서 이제 슬슬 새로운 분열을 하려는 시기에 들어선 것입니다.

한편 저는 생육가족이 모두 세상을 뜨면서 가족 종료를 맞이했지요. 돌이켜보건대, 지금껏 누구 한둘은 있었던 가족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처음 겪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지금 가족이라는 것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나에게 가족이란 무엇이었나. 지금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가족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나. 가족 종료의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족이 없기에 비로소 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차례

 

 

 

들어가며

 

1 / 이보다 더 애틋할 순 없는 부모자식 /

2 / 콩가루 우리집 /

3 / ‘아내’ 또는 ‘며느리’라는 이름의 트랜스포머 /

4 / 내 안에 할머니 있다! /

5 / 가사 능력은 생존 필살기 /

6 / 가정 시간에 가르쳐야 할 것은 뭐다? /

7 / 누가 내 걱정 좀 해주라! /

8 / 그놈의 가족여행이 뭐라고 /

9 / 이름이 곧 실체다! /

10 / 장남의 무게, 그리고 오빠와 여동생에 대한 환상 /

11 / 명절에 식구들이 모이면 벌써 피곤해 /

12 / 아무래도 진로는 부모의 영향이 크다 /

13 / 가족이 이어진다는 것의 묘미 /

14 / 극성 부모 극복하기 /

15 / 혼자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나쁘지 않아! /

16 / 가족을 빌려드립니다! /

17 / 사실혼이 뭐 어때서? /

18 / 별별 가족의 시대가 온다! /

 

나가며


1

 

이보다 더 애틋할 순 없는
부모자식

 

 

 

2018년 1월, 구사쓰 시라네산(일본 군마현에 있는 해발 2160m의 활화산. 하이킹, 스키, 온천을 즐길 수 있는 관광지)이 분화했을 때의 일입니다. 저도 구사쓰 지역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뉴스를 지켜보고 있었지요. 스마트폰이 보급되면서 사건 사고 현장에서 도착한 생생한 영상이 바로바로 뉴스를 타게 되었습니다. 구사쓰에서도 다양한 영상이 찍혔는데 제 눈과 귀를 사로잡은 것은 스키장 케이블카에 타고 있던 사람들이 분화 후에 찍은 영상이었습니다.

사방에서 화산 자갈이 튀는 가운데 케이블카에 갇힌 사람이 찍은 그 영상에는 촬영자의 친구로 보이는 청년이 전화를 거는 모습이 찍혀 있었습니다. 전화를 받은 사람은 청년의 아버지. 청년은 아버지에게 절박한 목소리로 현재 상황을 전하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파(아빠), 사랑해!”

경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제가 놀랐던 부분은 영상 속 화산 분화 장면이 아닌, ‘아빠, 사랑해!’라는 한마디였습니다. 젊은이는 이미 어린아이가 아닌 청년. 아버지를 ‘아빠’라고 하는 것은 그렇다 쳐도 그를 ‘사랑한다’고 표현한 데서 부모자식 관계의 변화에 격세지감을 느낀 거지요.

코앞에서 화산이 터지는, 죽음의 가능성이 임박한 상황에서 부모에게 애정 표현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요. 하지만 제 세대 이상의 남자들이라면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외칠 마음은 아예 없을 것이고, 기껏해야 “아버지, 지금까지 감사했어요!”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제가 십대 시절로 돌아가 같은 상황에 처한다 해도 부모에게 절대 ‘사랑한다’고는 못 할 것 같아요. ‘사랑한다’는 말은 제 어휘 서랍 안에서 겨우 한자리 차지하고는 있지만 아주 깊숙이, 저 안쪽에 사장되어 있을 뿐입니다. 여차하면 바로 튀어나갈 수 있는 위치에서 스탠바이하고 있는 게 아니다 보니 저 역시 최대한 노력해서 말해봤자, “지금까지 감사했어요!” 정도일 것입니다.

아빠를 사랑하는 젊은이를 보며 아버지랑 아들도 드디어 친구 같은 사이가 된 건가 싶었습니다. 제가 젊었을 때만 해도 청년들은 일정 시기가 되면 아버지에게 대들고 반항하는 것이 예사였습니다. 아버지에게 반항한다는 것은 청년에게는 통과의례 같은 것이며 그 반항을 극복했을 때 비로소 어른이 될 수 있었지요.

남자들은 아버지에 대한 반항이 시작되면서 부모를 부르는 방식도 바뀝니다. 저희 오빠도 어렸을 때는 ‘오토상(아버지, 아빠)’, ‘오카상(어머니, 엄마)’이라고 하다가 중학생쯤 되자 부모님을 부르는 횟수가 줄어들더니 머지않아 아예 부르지 않게 되었지요. 그러더니 대학생이 되어서 갑자기 ‘오야지(아버지, 아저씨, 영감. 주로 성인 남성이 아버지나 아버지뻘 남성을 다소 무람없이 부를 때 사용하는 말)’, ‘오후쿠로(주로 성인 남성이 어머니를 부를 때 사용하는 속어. ‘어무니’ 정도)’ 하고 부르는 걸 보며 제가 괜히 민망했던 기억이 나네요. 그것이 아마 오빠의 ‘탈피’ 신호였던 거겠지요.

요즘 젊은이들 중에도 아버지에게 반항하는 친구들은 있습니다. 옛날식 반항기를 거친 뒤 어머니를 ‘바바아(할멈, 노파)’라 부르는 청년들도 있지요. 하지만 저희 때와 비교해보면 반항기를 겪는 아이들의 비율은 아무리 봐도 줄어든 것 같습니다. 제 친구들의 아이들이 마침 청년기에 접어든 경우가 많은데요, 우리 애는 반항기 없었다고 하는 친구도 적지 않습니다. 사춘기를 거쳐 청년기에 접어들어도 부모와 줄곧 사이가 좋은 거지요. 본인이 직장에 다녀 아이가 남편과 있는 시간이 더 길다는 한 친구는 아이가 자기보다 남편하고 사이가 더 좋다고 말하기도 했지요. 지금 청년들은 아버지에게도 어머니 대하듯 하다 보니 아버지와 맞서거나 극복할 필요도 없이 친구 같은 사이로 지낼 수 있는 모양입니다.

제가 대학생 시절 소속되어 있던 스포츠 동아리가 있는데, 지금 활동하고 있는 회원들만 봐도 하나같이 부모와 사이가 좋습니다. 시합이 열리는 곳이 동북 지방이든 규슈든, 부모들은 먼 데까지 달려와 이겨도 울고, 져도 울고 하는 식입니다.

제가 현역이었을 때는 부모가 시합에 따라온다는 건, 무슨 올림픽 출전도 아니고 생각해본 적 없었습니다. 어쩌다 부모님이 보러 오겠다고 해도 “오지 마. 창피하게.” 하고 말렸겠지요. 그때에 비하면 부모자식 사이의 거리는 확실히 가까워졌습니다.

졸업하고 이 동아리 관련 모임을 떠나는 한 4학년 남학생이 발언을 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발언 중에 이렇게 외치는 거였어요.

“마지막으로 감사드리는 분은…… 제 어머님이십니다!”

거기서 끝이 아니고 어머니를 단상에 불러서는 뜨거운 포옹을 나누었지요. 대학 당국의 높으신 분들부터 왕년의 대선배들까지 모신 자리. 말할 것도 없이 선배들 자리에서는 불안한 웅성거림이 들려옵니다. 그러나 정작 두 모자는 행복에 겨운 표정입니다. 저도 선배들과 마찬가지로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남들 앞에서 자기 어머니를 높여 부르질 않나 끌어안질 않나, 어디 남의 나라 일만 같았어요(사적인 관계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높여 부르는 ‘오카상’이라는 호칭을 공적인 자리에서 썼기 때문에 저자는 당혹감을 느끼고 있다). 내가 아이 없이 넋 놓고 지내는 동안 이 나라의 부모자식 관계가 어디까지 간 거지? 그 일이 있은 후 저는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물어보았습니다. 이 상황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말도 안 되지! 공적인 동아리 행사 자리라면 자기 엄마한테 고마워하기 전에 먼저 선후배나 동기들에게 감사 인사부터 하는 게 도리잖아. 게다가 그런 자리에서 포옹이라니, 어떻게 된 거 아냐?” 노기를 띠며 말하는 사람은 저와 비슷한 나이인 진지한 성격의 운동부 출신 남성(딸 있음).

“싫다. 마마보이가 정말 있었군요! 어떤 여자가 그런 남자랑 결혼할지, 불쌍하네요.” 하고 말한 사람은 삼십 살 여성(딸 있음).

엄마랑 사이가 좋은 것을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들을 마마보이라고 하던데, 여자들이라고 해서 이를 좋게만 보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아이 없는 기혼의 제 또래 여성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즘 젊은 남자들, 마마보이인 걸 굳이 감추지도 않는다더니 진짜였구나. 그건 그렇다 쳐도 그 엄마도 멀쩡히 포옹을 하고 대단하네…….”

‘내가 자식도 없는 매정한 사람이라서 그 행동이 이상해 보이는 게 아니었구나, 다행이다.’라고 생각하며 이번에는 아이가 있는 제 또래 여성들에게 운을 띄웠더니, “뭐, 이해 가는데…….”, “그럴 수도 있지 않아?” 하는 의견이 속출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상 놀라운 일인 것처럼 너무 호들갑을 떠는 말투로 물어서 그런지 어딘가 뜨뜻미지근한 대답이긴 했지만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라고는 하지 않는 거였어요. 개중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친구도 있었습니다.

“우리 아들 학교 럭비부에서는 마지막 시합 끝날 때마다 애들이 엄마들을 공주님처럼 번쩍 들어올린 채로 사진까지 찍어. 엄마들도 다들 좋아하고 애들도 싫어하지 않던데.”

말인즉슨, ‘엄마랑 포옹 정도야 당연히 할 수 있지. 키우시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라는 거지요. 저는 정신이 멍해졌습니다. 생각해보니 그녀들은 모두 아들 둔 엄마들이었어요. 모자의 사이도 좋았지요. 종종 아들 둔 엄마들에게서는 섬뜩한 이야기를 들을 때가 있습니다.

“나중에 나에게서 못 벗어나게 키워야지.”

“세상에서 너를 가장 생각해주는 여자가 누구일지 잘 생각해보라고 아들한테 단단히 일러두고 있어.”

아들 앞에서는 엄마도 한편 ‘여자’라는 생각이 드는 모양입니다. 자식이 있는 사람들은 저에게 “애를 안 낳아봐서 모른다.”고 하던데, 아들을 향해 품는 ‘여성성’에 대한 의식이랄까, 소유의식 같은 것이야말로 저처럼 자식이 없는 여성이 가장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키시노노미야(현 나루히토텐노의 남동생 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 가문의 마코(아키시노노미야 후미히토의 장녀)님이 고무로 케이(일반인 남성) 씨와 약혼한다는 뉴스가 전해지자 고무로의 어머니가 아들을 ‘왕자’라고 부른다는 둥 다정한 모자 사이의 일화나 사진이 주간지를 장식했습니다. 마마보이라 보는 시각도 있는 모양이지만 그 나이대에 그 정도는 이제 마마보이도 아닙니다. 마마보이를 둔 엄마들에게는 “어머나, 아드님이 정말 다정하네요. 좋으시겠다.” 하고 말해줘야 하는 거죠.

제 어머니의 경우는 아들 사랑이 그렇게까지 끔찍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가 평생토록 여자이기를 포기하지 않으셨던 분이기는 하지만 아들에게는 딱히 그러지 않았어요. 여자이고자 하는 욕구가 너무 강해 아들 가지고는 그 욕구를 다 충족시킬 수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시절에는 일반적인 다른 엄마도 아들과 껴안거나 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옛날 엄마들도 속으로는 아들과 포옹도 하고 싶었겠지요. 하지만 ‘아들을 향한 마음을 내색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게 지금과 다른 점이 아닐까요?

제 어머니 때는 마마보이를 터부시하는 분위기가 지금보다 훨씬 강했습니다. 엄마와 아들이 딱 붙어 있으면 바로 ‘마마보이’ 소리를 들었기 때문에 아들들도 지금처럼 당당하게 엄마에게 가까이 갈 수 없었지요. 엄마들도 집 밖에서는 아들에 대한 애틋한 마음을 발산하지 않도록 자제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마마보이는 나쁜 것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저출산으로 아이가 있기만 해도 감지덕지하는 세상이 되자 아이는 애지중지 키워야 할 소중한 존재가 된 거지요. 사회 일각에서 가정 해체 현상까지 나타나면서 친밀한 부모자식 관계의 가치는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SNS에서 화목한 가족의 모습을 과시하려는 것도 무리가 아니지요.

남들 앞에서 자신의 부모를 ‘치치’, ‘하하’라고 낮춰 부르지 않고 ‘오토상’, ‘오카상’이라 높여 부르는 것도 이제는 당연한 일입니다. 요즘 아이들은 부모를 너무 좋아하다 보니 낮춰 부르기 싫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보니, 한 젊은 배우가 녹화 영상 속에서는 어머니를 ‘마마’라고 부르다가 스튜디오에서 이야기할 때는 ‘오카상’이라고 하더군요. 젊은 친구들은 ‘오카상’이 남들 앞에서 쓰는 격식 있는 말인 줄 잘못 알고 있는 모양입니다. 이런 인식에 대해서는 더 생각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네요.

아무튼 일본의 부모자식 사이가 좋아지긴 한 모양입니다. 메이지 시대 이후 백오십 년의 세월이 흘러 부모자식 간에도 사랑한다고 말하거나 껴안을 수 있게 되리라고는 이토 히로부미(일본의 정치적 근대화는 메이지 유신을 기점으로 하며 이토는 그 시기의 초대 총리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도 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