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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상현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프랑스 발랑스의 ‘에꼴 데 보자르’ 졸업 후 파리8대학에서 예술학을 전공했다. 파리8대학 철학과에서 라깡의 정신분석 연구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박사 학위 논문 「리요타르와 라깡, 증상적 문장」). 고려대, 이화여대, 강남대 등에서 정신분석과 미학을 강의했으며 한국프로이트라깡칼리지FLC 상임교수로 활동했다. 현재 숭실대학교, 말과 활 아카데미 등에서 강의하고 있고 를 대상으로 여러 형태의 강의를 시도하고 있다. 저서로 『라캉 미술관의 유령들』, 『고독의 매뉴얼』이 있으며 라깡의『세미나 7권』에 대한 해설서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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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그림 설명: 1816년 메두사호 침몰 당시 생존자들의 임시 뗏목을 재현한 당대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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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논점punctum

 

이제 막 책을 펼쳐 든 독자에게 필자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비교적 단순하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그것의 확장인 문명에 대해서 이제까지와는 다른 생각의 길을 열기. 고정관념으로 직조된 생각의 테두리로부터 벗어나는 방식으로 문명의 양상들을 상상하고, 그것의 일부인 ‘나’ 자신에게 새롭게 접근하는 길을 트기Bahnung. 생각의 송곳으로 관념들의 표면을 찔러 구멍을 뚫기puncta. 이를 위해서 이 책은 정신분석이라는 도구(송곳)를 사용한다. 특히 우리가 의존하게 될 프로이트-라깡학파의 정신분석은 인간이 스스로에 대해 갖는 다양한 오인과 환상을 분석하고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선과 악에 대해서, 아름다움과 추함에 대해서, 쾌락과 고통에 대해서, 사랑과 증오에 대해서, 평온과 불안에 대해서 우리를 사로잡는 고정관념과 오인의 베일들은 삶을 한없이 유한한 것으로, 자유롭지 못한 것으로, 특정한 심리적 힘에 종속된 것으로 만든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소유되는 방식으로 우리를 소유하는데, 그런 사정은 한 개인의 미시적 심리 상태로부터 문명의 거시적 활동에 이르기까지 다르지 않다. 우리의 마음이 우리 자신의 의지대로 흐르지 않고 오히려 우리의 존재를 구속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현상은 문명의 차원에서도 그대로 반복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물관은 어떤가? 그것은 인류의 소유일까? 반대로 인간을 소유하는 알 수 없는 힘의 신전이 아닐까? 박물관을 거니는 우리 자신의 존재 역시 박물관의 유물과 작품들이 속한 숙명에 종속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라는 틀 속의 경제활동은 어떤가? 사랑이라는 욕망의 행위들은? 삶의 안정과 쾌락을 위해 마련된 다양한 활동들에서 우리는 행위의 주인처럼 굴지만, 정작 우리를 지배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니지 않은가?

정신분석은 우리 마음의 주인인 동시에 문명의 지배자인 그것을 무의식이라 부른다. 무의식은 주이상스라고 불리는 쾌락의 중핵을 언어로 둘러싸면서 발생하는 독자적인 마음의 구조이며 그 속에서 형성되는 특정 패턴들의 반복 운동이다. 바로 이 무의식의 구조가 자아와 세계에 관련된 모든 환상들을 만들어낸다. 우리가 주체라고 부르는 것은 그와 같은 환상적 세계 이미지 속에서 출현하는 오인의 가장 극단적 형태이다. 여기서의 문제는 그러한 환상을 횡단하여 극복하는 것이 된다. 만일 사정이 그러하다면, 환상의 횡단을 위해 요청되는 첫 번째 실천은 ‘분석analysis�’일 것이다. 분석의 그리스어 어원이 말해주듯 그것은 환상을 이루는 전체를 ‘해체analuô’하여 그 밑에 숨겨진 원인을, 즉 세계를 지탱하는 환상들의 본모습을 밝히는 것이다. 마치 정신분석가를 찾아온 내담자가 자신의 삶을 지탱하던 환상들의 정체를 분석을 통해 알아가게 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그 모든 환상의 원인이 되었던 궁극적인 근본환상의 장소에 도달하게 되는 것과 같이, 문명에 대한 분석은 그것을 지탱하는 근본적 환상의 장소로 독자를 데려갈 수 있다. 한 점의 회화가, 조각 작품이 제작되었던 가장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게 됨으로써 우리는 박물관이 건설되었던 무의식적 원인을 이해하게 되며, 마찬가지로 문명 일반이 건설되는 기본적인 패러다임이 무엇이며, 그것의 원인은 또한 무엇이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나아가서 이러한 이해는 우리 자신의 자아와 관련된 환상을 이해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 문명과 자아는 동일한 구조 속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러한 과정들은 프로이트와 라깡이 행했던 작업에 대한 역방향의 탐사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정신분석의 창안자와 발전적 계승자였던 이 두 사람이 20세기 문명에 주었던 선물은 개인의 심리적 구조와 원인을 밝힘으로써 인류 문명 전체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가능성을 연 것이다. 반면 우리의 책은 문명의 양상들이 가진 무의식적 구조와 원인의 차원을 분석함으로써 그것을 만들었던 인간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는 방향을 취한다. 그러나 이 둘은 방향만 다를 뿐 궁극적으로 같은 목적을 갖는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인간 자신을 이해하고 넘어서는 것이다. ‘요컨대punctátim’ 그것은 ‘나’를 가두는 문명의 베일의 표면을 ‘찔러punctim’ 낸 ‘상처punctus’로부터 새로운 살과 근육이 생성될 수 있는, 새로운 ‘나’의 개념이 창안되는 가능성을 타진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장소topos

 

생각의 눈을 가리는 베일에 구멍을 뚫고자 하는 이 책이 취하는 방법과 여정은 조금 특별하다. 책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이라는 한정된 장소에 머물면서 이 모든 탐사의 여정을 이어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루브르는 이 책의 장소, 즉 ‘토포스’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마치 지형 측량사가 하듯 지도를 그려보려고 한다. 물론 그 지도는 박물관의 입구에 비치된 관람객을 위한 친절한 안내도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책이 그리려고 하는 지도는 박물관이 숨기고 있는 비밀 통로와 숨겨진 밀실들의 지도이다. 그곳을 방문하는 수십, 수백만의 관광객들과 고전적 미술사가들의 눈에는 결코 보이지 않았을 숨겨진 장소들의 지형도. 문명의 유물들과 예술 작품들이 주는 고매한 쾌락에만 이끌리는 눈들에게는 결코 보이지 않았을 하나의 구멍을, 그곳으로 통하는 비밀 통로의 지도를 그리려고 한다. 간단히 말해서, 이 책은 박물관의 무의식의 지형도를 담아내려고 한다. 그리하여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박물관을 즐기는 또 다른 하나의 방법론’ 따위가 전혀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박물관이 세워지고 유지되고 향유되는 구조의 모든 토대에 숨겨진 근본적인 장소의 위치를 드러내려고 한다. 그것은 바로 박물관의 중심에 위치한 공백의 검은 구멍이며, 그로부터 발산되는 공허와 불안이다. 박물관의 무의식은 바로 이곳을 억압하고 은폐하기 위해 복도를 만들고 천정을 높이고, 주변을 화려한 작품들로 장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박물관의 유물들에 붙여진 세밀한 이름표들의 연대기적 질서는 그것들 너머에 숨겨진 유령을, 모든 종류의 명명에 저항하는 불안의 대상을 사로잡아 가두기 위한 문명의 임시변통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와 같이 은폐하는 구조의 지형도를 그려내는 과정 속에서 은폐의 대상인 불안의 공백으로, 검은 구멍인 그곳으로 접근하는 길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를 위해 사용되는 또 다른 토포스가 바로 정신분석이다. 라깡학파의 정신분석은 우리의 마음을 세 가지 토포스로 규정하는데, 신경증, 정신병, 성도착증이 그것이다.1 유아기의 인간은 말을 배우는 단계에서 이들 세 영역 중 하나로 편입된다. 보다 구조적인 표현을 쓰자면, 인간은 자신의 주이상스에 대해서 신경증, 성도착증, 정신병의 세 가지 서로 다른 포지션 중 하나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책은 박물관의 예술 작품들을 이 세 가지 지형도 속에서 분석함으로써 박물관이 불안의 구멍을 억압하거나 드러내는 세 가지 유형의 지도를 그려낼 것이다. 예를 들자면, 첫 번째 장과 두 번째 장에서는 신경증의 두 가지 주요 유형에 속하는 강박증과 히스테리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박물관의 건축과 회화 작품들이 불안의 구멍을 은폐하거나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는지 그 양상들이 그려진다. 세 번째 장에서는 정신병의 한 유형인 멜랑꼴리의 구조가 어떻게 불안의 공백에 사로잡히는지 묘사된다. 마지막이 될 네 번째 장에서는 성도착의 구조가 공백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을 또 다른 환상의 베일로 포획하는 특별한 방식이 예술 작품들의 분석을 통해 설명될 것이다. 그리하여 이 책은 루브르의 토포스를 정신분석의 토포스와 중첩시키고, 이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교차점으로서의 구멍을 찾아내려고 한다. 이를 위해서 필자는 각 장이 시작되는 곳에서 실제의 환자들을 먼저 소개했다. 강박증 환자, 히스테리 환자, 정신병적 멜랑꼴리 환자, 성도착증 환자의 실제 기록들을 통해 정신분석의 토포스를 선명히 드러내고, 이를 다시 박물관과 예술 작품들의 토포스 위에 겹쳐지도록 했다. 아마도 이러한 토포스의 중첩은 이 책을 읽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하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을 텐데, 그것은 먼저 제시된 환자의 증상과 구조를 그대로 박물관과 작품들을 이해하는 틀로 사용하는 것이다. 

 

1 정신분석 진단의 이러한 세 가지 범주는 라깡의 후기 임상에서 변화를 겪는다. 후기 이론에서는 인간의 정신 구조가 ‘아버지의 이름’의 폐제 유무에 따라서 정신병(폐제)과 신경증으로 확연히 나뉘지 않는다. 이제 ‘아버지의 이름’은 주이상스를, 실재의 불안정성을 고정시키는 수많은 이름들 중 단지 하나의 우연적인 이름에 불과할 뿐이다. 따라서 전기 라깡이 ‘아버지의 이름’을 중심으로 하는 신경증의 구조를 우선해서 이론을 전개해나갔다면 후기 라깡은 정신병을 일반적 구조로 보고(‘아버지-이름’의 폐제의 일반화), 각각의 개인들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주이상스를 안정화(루틴화)시키며 서로 다른 쾌락의 향유 양식들을 생산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이 책은 후기의 논점보다는 편의상 초중기의 진단 기준을 참조한다. 정신병과 신경증 그리고 도착증의 구조가 더 이상 절대적이며 선험적인 범주가 될 수는 없지만 여전히 실용적인 구분의 틀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비장소atopos

 

그러한 방식으로 그려지는 루브르의 정신분석적 지형도의 중심에서 발견되는 검은 구멍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모든 정신적 구조 유형과 문명의 기원에 위치하는 주이상스의 중핵이며, 개인의 차원에서 집단적 문명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말하는 인간’의 쾌락과 불안을 결정하는 무의식의 결정자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실체나 생물학적 대상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이 언어를 사용함으로써 발생하는 쾌락과 언어의 관계성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이다. 무의식은 바로 이 단순한 언어적 관계를 통해 발생하며, 우리의 존재는 이러한 관계의 패턴들에 철저히 종속되어 있다. 인간 존재란 쾌락과 고통이 뒤섞인 주이상스의 중핵을 둘러싸는 언어적 직조물의 다양한 형상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달리 표현한다면, 우리의 존재는 언어의 작은 제국들이며, 역설적이게도 그러한 제국의 중심에 언어화될 수 없는, ‘말해지거나 써지는 것에 저항하는’ 주이상스의 동공洞空을 숨기고 있다.

박물관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박물관을 채우는 감각적 이미지들의 풍요로움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아름답거나 웅장하거나 새롭다고 느껴지게 하는 것은 결국 언어적 질서이다. 박물관은 이미지들을 언어적으로 거세하고 통제하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그것들이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하는 언어의 제국이다. 만일 우리가 정신분석적 토포스를 통해 박물관의 지형도를 그리려 했다면, 이는 결국 언어적 제국의 지형도를 그리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고전주의적 언어는 어떻게 이미지의 불확실성을 사로잡는가, 매너리즘과 낭만주의 미술의 언어는 어떻게 이미지의 불안을 드러내는가, 앵그르의 관음증적 언어의 회화는 어떻게 이미지들의 거세를 우회하는가 등의 문제가 그곳에 걸려 있다. 이처럼 다양한 유형의 언어에 사로잡힌 박물관-제국의 지형도를 그려내면서 우리가 접근하려는 장소는 그럼에도 언어적 틀에 의해 포획되지 않는 마지막 대상이 숨겨진 장소이다. 그곳은 어떠한 틀에 의해서도 대상화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비대상의 장소이기도 하다. 우리가 이 비대상의 장소 혹은 비장소의 장소에 도달하려는 이유는 그곳이 인간 존재의 가장 핵심적인 윤리와 관계되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다시 강조하건대, 그곳은 박물관의 모든 환상들이 출현하는 원인이 되었던 장소이다. 따라서 그곳에 도달하는 과정 자체는 이미 문명과 인간 자신에 관한 환상을 횡단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환상에 사로잡히지 않기 위해서는 필연코 그곳에 도달하는 운동을 반복해야 한다는 것인데, 그러고 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최소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존재와 세계의 좌표들, 즉 토포스의 현실성이 하나의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그토록 견고해 보였던 박물관의 벽과 천정, 그리고 복도의 구조가 한여름 밤의 꿈과 같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우리 자신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완고했던 숙명적 삶의 스토리가 한 편의 조잡한 동화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을까? 바로 이 순간을 롤랑 바르트는 비장소, 즉 ‘아토포스’라고 부르지 않았던가?

토포스의 중핵에 도달하면 그처럼 아토포스의 구멍이 열린다. 우리를 가두는 장소들이 은폐하고 있는 토포스의 중심에 비장소의 시작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곳이 바로 현존하는 토포스의 권력이 정지되는 지점인 동시에 도래할 미래의 새로운 토포스가 그려지게 될 창조의 공간이다. 롤랑 바르트는 『사랑의 단상』에서 사랑이 그와 같은 아토포스의 기능을 한다고 생각했다. 연인들을 고립시키는 사랑의 고독은 현재의 세계관이 무너지는 경험 속에서 사랑에 빠진 존재를 길 잃게 하는 힘을 갖기 때문이다. 라깡을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욕망이라 불러도 좋다. 라깡이 『세미나 7』에서 ‘죽음을 욕망함’이라고 불렀던 정신분석의 윤리가 바로 그것이지 않았던가? 여기서 죽음이 의미하는 바는 현존하는 토포스의 죽음이며, 따라서 그것은 검은 구멍을 욕망함이며, 환상의 중핵에 존재하는 상징화될 수 없는 공백을 욕망함에 다름 아니다. 

 

 

 

 

가려움증atopy

 

이 책은 바로 그와 같은 욕망의 여정을 담았다. 토포스를 횡단한 곳에서 시작되는 아토포스에 대한 욕망. 주어진 장소로부터 주어지지 않는 장소로의 도약에 대한 욕망. 견고한 환상들의 질서로부터 유령적 (비)질서로의 도약에 대한 욕망. 

신경증적 소외 일반의 토포스를 다루는 1장을 제외한 나머지 장 각각의 마지막 부분에서 필자는 아토포스의 욕망이 어떻게 논리적으로 말해질 수 있는지를 고민했다. 어떻게 히스테리적 욕망은 자신의 토포스를 무너뜨리고 아토포스로 도약하는가(2장). 멜랑꼴리의 신경증적 판본인 우울증은 어떻게 토포스의 몰락에 대한 깊은 슬픔으로부터 빠져나올 수 있는가(3장). 성도착의 구조가 보여주는 특수한 토포스의 상상적 권력을 아토포스로 도약하는 힘으로 전환시키는 문제(4장) 등이 각 장의 마지막 부분을 채우고 있다. 그런 식으로 이 책은 토포스로부터 아토포스로 나아가는 길의 논리적 지형도를 그려내려고 시도했다. 

그럼에도 필자는 이 모든 논리적 지형들이 미술사와 박물관학에 대한 정신분석적 접근이라는, 단지 사변적 설명에 한정되지 않기를 희망한다. 왜냐하면, 박물관이나 정신분석 임상실이라는 토포스의 주인공은 누가 뭐래도 우리 자신, 매일을 살아가는 평범한 우리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필자는 이 책을 가득 채우는 문자들이 우리의 일상적 사유를 간지럽히는 벌레와 같은 것이 되었으면 좋겠다. 혹은, 주어진 대로 살아가는 것에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도록 만드는 일종의 병원균이었으면 좋겠다. 예를 들면 아토피2와 같은 것 말이다. 장소를 구분하지 않고 찾아와 존재를 간지럽히는 피부병. 토포스의 경계선들을 위반하고 횡단하여 범주와 규범의 권력을 무색하게 만드는 존재의 간지럼증과 같은 것. 그리하여 우리를 좀 쑤시게 하고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게 만드는 ‘비장소’의 피부병인 ‘아토피’와 같은 책이 되기를 희망한다.

 

2 피부질환의 일종인 ‘아토피(atopy)’의 어원 역시 ‘아토포스(atopos)’이다. 특별한 부위에 머물지 않고 전신을 돌아다니기에 ‘비장소의 피부병’이라 이름 붙여졌다.


 

 

차례

 

 

 

 

 

프롤로그

 

 

1장   강박증의 박물관

 

2장   히스테리의 박물관

 

3장   멜랑꼴리의 박물관

 

4장   성도착증의 박물관

 

 

에필로그



 

 

 

 

 

 

 

 

마음의 고고학

 

고고학아르카이올로기아ἀρχαιολογία이란, 단어의 어원이 상기시키듯 ‘오래된아르카이오스ἀρχαίος’ 옛것이 다시 ‘말해지도록로고스λόγος’ 발굴하여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말해진다’는 의미의 고대 그리스어인 ‘로고스’는 ‘이성적으로 엄밀히 말해짐’ 또는 ‘보편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도록 논해지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따라서 고고학이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상실되었던 과거의 흔적을 오늘의 규범적 언어 속에 통합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는 망각 속에 묻혀 있던 인류의 기억에 이름을 붙여주고, 그에 합당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인류가 과거에 대한 소문과 억견1으로부터 벗어나 자신의 진리 또는 정체성에 더 가까이 접근하려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고고학의 본질적인 질문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알기를 원하는 인류의 고유한 학문, 즉 인문학의 궁극적 질문과 동일한 지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1 플라톤의 철학에서 억견(doxa)은 진리와 대립되는 상대적인 의견들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억견은 또한 ‘텅 빈 말(parole vide)’과 같다. 그것은 진리를 말하지 않기 위해 발음되는 자아의 방어적 사변들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와 같은 고고학적 실천은 학자들만의 고유한 활동은 아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일어나는 기억과 환기의 작용들 역시 이미 고고학적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우리 자신의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가? ‘내’가 누구인지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기억의 흔적들이다. 기억들은 정체성을 유지하게 하지만 때로는 변화를 야기한다. 새로 발견된 과거 또는 현재의 기억의 흔적이 나 자신에 관한 이미지를 뒤바꿔놓을 가능성은 언제나 존재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정신은 고고학자가 과거의 기억을 탐사하고 그 결과물을 통해 인류의 정체성을 이해하듯이 자신의 과거로부터 비롯된 기억의 흔적들을 탐사하여 현재의 자아를 이해하려고 한다. 정신의 이러한 고고학적 작업은 결코 쉬는 법이 없다. 가깝게는 어제의 사건들에 관해 질문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시도가 있을 수 있고, 멀리는 수년 전의 기억의 발굴과 재해석을 통해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질문하고, 이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이미지를 구성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러한 기억의 작업이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분열과 혼돈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정신병 환자들의 경우가 그렇다. 기억의 작업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던 그들은 정체성의 치명적인 분열을 경험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결국 망상적인 해석으로 이어지고, 이를 통해 다시금 끔찍한 불안의 고통을 겪어야 하는 악순환에 빠져든다. 그들은 기억의 고고학적 작업에서 로고스적 언어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 유아기에 언어의 상징적 규범이 안정적으로 구성될 기회를 놓쳐버렸기 때문이다. 정신병의 고고학은 그래서 시적인 언어의 고고학이며, 무한한 차이를 획득하는 대가로 보편성을 상실하게 된 고독의 세계를 창조해낸다. 만일 이러한 비유가 가능하다면, 그들의 개인사 박물관에는 진기한 유물들이 가득하지만 이 유물들은 그곳을 찾는 관람객들에게 그 무엇도 말해주지 않는다. 

반대로, 소위 정상인이라는 사람들, 라깡이 신경증자로 분류하는 이들의 개인사 박물관의 유물들은 그곳을 방문하는 관람객 모두에게 대체로 이해되는 가치를 갖는다. 이들이 자신의 기억을 탐사하기 위해 사용했던 언어는 모두에게 소통 가능한 형식의 공용어, 라깡학파의 정신분석이 대타자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언어를 통해 말하고 말해지는 우리는 개인사의 고유함을 포기하는 대가로 소통 가능성이라는 편리를 얻어낸다.

 

 

 

 

늑대인간의 개인사 박물관

 

수집된 마음속의 기억은 다양한 층위를 이룬다. 어떤 기억은 의식의 표면 위에서 생생한 반면 다른 기억은 무의식의 차원에 은폐되어 있다. 어떤 기억은 아주 오래된 일임에도 결코 잊히지 않는데 어떤 기억은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도 거짓말처럼 전혀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은 또한 원래의 모습에서 변형되어 왜곡의 과정을 거친다. 만일 한 인간의 기억의 흔적들이 보존된 마음속의 공간을 ‘개인사 박물관’이라고 은유할 수 있다면, 그곳에 안치된 유물들은 어떤 신비로운 힘에 의해 선택 혹은 거부되거나 자주 왜곡되는 듯이 보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우리에게 알려준 교훈 중에 하나는, 이러한 선택이 우리 자신의 의지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에 따른다면, 한 인간의 개인사 박물관에 유물로 보존되는 대상들의 선택은 무의식의 수준에서 벌어지는 어떤 종류의 힘의 작용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마음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선별적 고고학을 실행하고 있었던 것이다. 프로이트의 이 같은 발견은 그가 신경증 환자들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얻어낸 지식이었는데, 그중에서도 세르게이 판케예프Sergei Pankejeff라는 남자의 치료 과정은 한 인간의 개인사 박물관이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늑대인간’으로 더 잘 알려진 이 남자는 1910년에서 1914년 사이에 프로이트에게 정신분석 치료를 받았던, 당시 23세의 젊은 신경증 환자였다. 프로이트의 기록에 의하면 그는 어린 시절 강박신경증의 다양한 증세를 차례로 앓았으며, 성인이 되어 프로이트를 찾아왔을 당시에는 심각한 무기력증과 우울증 그리고 히스테리성 대장 장애를 호소했다. 치료가 진행되는 동안 환자는 자신의 유년기의 기억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프로이트에게 들려주었는데, 어떤 것들은 환자가 이미 기억하고 있는 것들이었고, 다른 어떤 것들은 상담 과정에서 새롭게 환기된 내용이었다.  

 

세르게이 판케예프와 그의 아내.

 

그 나이의 아이들이 대체로 그렇듯이 소년 시절의 환자는 무서워하는 동물이나 벌레가 많았다. 특히 늑대를 무서워했는데 이는 소년의 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하나의 장면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소년은 꿈속에서 창문이 열리고, 창밖의 나뭇가지 위에 대여섯 마리의 하얀 늑대가 꼼짝 않고 앉아 자신을 응시하는 이미지를 보았다. 소년이 네 살 되던 해의 크리스마스 전날 밤부터 시작된 악몽이었다. 이 꿈에서 비롯된 늑대 공포증 외에도 소년은 애벌레 같은 작은 동물들을 무서워했다. 줄무늬 나비도 무서웠다고 기억했고, 그러면서도 이들을 가학적으로 잔인하게 찢어 죽이는 놀이에 몰두했다는 상반된 기억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소년은 성서에 영향을 받아서 종교에 대한 강박적인 증세를 보이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가슴에 십자가를 긋는다든가, 침실 벽면에 걸려 있는 성화들에 의자를 놓고 기어올라가 모두 입을 맞추기 전에는 잠들려 하지 않았다. 이 같은 증상들 말고도 환자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는 시기에 자신이 섭식 장애를 겪었고, 또한 대장 장애를 지속적으로 겪어왔다고 했다. 늑대인간이 간직하고 있던 이러한 파편적인 기억들 외에 분석이 진행되는 동안 새롭게 떠오른 기억들도 있다. 예를 들면, 환자가 두 살 반쯤 되었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살이던 누나가 마차를 타고 어디론가 떠나는 모습을 가정교사와 함께 배웅한 뒤 평화롭게 집으로 들어서는 자신의 모습에 관한 기억이 있다. 또한 환자가 세 살 반쯤 되었을 때 그의 누나에게서 성적인 놀이를 통해 유혹받은 기억도 상담 과정에서 떠오르게 되었다. 누나는 소년의 성기를 잡고 장난쳤고, 그러면서 소년에게 그들의 유모 역시 자기와 똑같은 일을 아무에게나 했다고 말해주었던 기억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환자는 부모의 성교 장면을, 아버지가 뒤에 서고 어머니가 엎드린 자세로 성교하고 있던 장면을 기억해낸다. 놀랍게도 이것은 한 살 반쯤의 나이로 추정되는 시기의 기억이었다.

 

세르게이와 누이 안나의 유년 시절.

 

프로이트와의 상담치료 과정에서 늑대인간이 구성해낸 자신의 개인사 박물관의 유물들이란 대체로 이러한 것들이다. 마지막에 언급된 한 살 반 시기의 ‘믿기 힘든’ 부모의 성교 장면에 대한 기억을 제외하면 대체로 우리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는 개인사의 흔한 에피소드들이 박물관을 채우고 있다는 사실에 동의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마지막의 기억이 믿기 힘들다는 말의 의미는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그것은 흔한 일이다) 유아기 기억의 조숙함이 우리의 상식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한 살 반의 유아가 부모의 성교 장면을 볼 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기억의 형태로 무의식 속에 간직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힘들다. 물론 부모의 성교 장면의 진정한 의미는 그보다 훨씬 뒤에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최초의 성적 기억은 그저 단순한 행위로 간주되는 이미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환자에게 분명 성적인 충동을 자극하는 원형적 힘을 가진 이미지였다. 프로이트는 이런 기억을 원장면이라고 부른다. 유아 성욕과 기억 그리고 그것의 억압과 은폐 등에 관한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관점에 동의하건 그렇지 않건, 어쨌든 우리는 늑대인간의 상담치료 기록을 통해서 개인사 박물관의 구조에 관한 하나의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되었다. 이처럼 늑대인간의 사례는 정신분석학의 발전에 기여했던 분석 사례일 뿐만 아니라 일반 독자의 관점에서 기억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특히 기억들이 서로 연결되거나 단절되는 방식은 우리 자신의 정체성이 어떻게 구성되는지를 알려주는 단서가 될 수 있다. 

 

늑대인간이 치료 중에 직접 그린 늑대 꿈 이미지.

 

예를 들어, 소년의 꿈에 나타난 늑대 무리가 발산하는 공포감은 아버지에 대한 소년의 성적 충동을 억압하는 기능을 했던 것으로 분석에 의해 밝혀진다. 늑대에 관한 소년의 지식은 동화 속의 이미지 또는 실제의 사냥개들이 보여주는 이미지를 통해 습득되었을 것이다. 소년이 살던 곳은 농장이었고, 근처의 목장에는 양치기 개들이 많았다. 그들이 성교하는 장면을 소년이 보았을 가능성은 충분히 높고, 이를 통해서 늑대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후배위 성교 장면을 은밀히 연상시키는 기능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꿈속에서의 늑대는 에로틱한 환상이 아니라 공포의 대상이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소년의 성적 충동은 자신을 어머니와 동일시하면서 유형화되었다. 늑대 꿈은 소년을 수동적이며 여성적인 위치로 자리 잡게 만드는 환상이었고, 소년의 자아는 이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늑대 꿈을 꿀 당시의 소년은 이미 남성과 여성의 성적인 태도에 관한 지식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이 남자의 능동적 위치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아버지를 사랑하는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던 성적 충동은 어떤 방식으로든 억압되어야 했고, 억압의 양상은 늑대 꿈을 비롯한 다양한 공포증의 형태로 나타났던 것이다.2 늑대에 대한 공포는 소년의 성충동을 겁주고 억압하여 의식의 표면으로 등장하지 못하게 하는 파수꾼의 기능을 했다. 그러나 공포증이 소년의 금지된 성충동을 모두 억압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소년은 작은 벌레들에 대해서 공포증과 동시에 가학적 태도를 보였는데, 이는 벌레들이 작은 아기들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작은 아기들이란 소년의 욕망의 범주 속에서는 아버지의 사랑에 대한 경쟁 상대를 의미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작고 힘없는 생물들은 공포증을 통해 그것이 환기시키는 성충동을 억압하는 반응을 불러일으켰지만, 또한 경쟁 상대인 그들을 가학적으로 파괴하면서 성충동을 긍정하는 반응 또한 불러일으켰다.3

 

2 라깡에 따르면, 엄밀한 의미에서의 성관계, 즉 성에 대한 규범적 관계성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성관계란 없으며 오직 욕망의 대상a와의 관계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능동성(남성)과 수동성(여성)은 그것 자체로 남성과 여성의 성차에 대한 근본적 표상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오히려 욕망의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매개하는 문화-지식의 상대적 베일들이다. 그럼에도 남녀 관계의 심리적 포지션으로서의 능동과 수동의 구분은 이미 어린아이의 지식 속에서 성적 정체성을 구분하는 강력한 표지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또는, 성차에 대한 능동성-수동성의 지식은 유아기로부터 비롯되는 신화에 근거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에 대해서 라깡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프로이트]는 남녀 관계는 심리적으로 능동성-수동성의 대립이라는 대표자를 통해서가 아니면 달리 포착될 수 있는 방법이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어떤 것도 남녀의 대립 자체에 딱 들어맞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 그[프로이트]는 수동성-능동성의 대립이 유입되고 본떠지고 주입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남녀 관계를 완전하게 담아내지는 못합니다.”(Jacques Lacan, Le Séminaire XI, Paris, Le Seuil, 1973)

3 우리는 이것을 라깡이 초기 이론에서 말하는 ‘침입-콤플렉스(complexe d’intrusion)’와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유아기의 공격성 중에서 특히 형제와 같은 경쟁 상대들에게 보이는 공격성이 그것이다. 성충동의 경쟁 상대들에 대해서 보이는 이와 같은 공격성은 이후 ‘부성적 심급(instance paternelle)’의 개입으로 극복(승화)된다. 늑대인간에게는 바로 이러한 부성적 심급의 개입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침입-콤플렉스와 공격성에 대해서는 라깡의 다음 텍스트 참조. Jacques Lacan, «Les comlexes familiaux dans la formation de l’individu», Autres écrits, Paris, Le Seuil, 2001, p.28.

 

세 살 반에 일어났던 누나에 의한 유혹 역시 소년의 성적 정체성을 구성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늑대 꿈보다 이른 시기에 일어난 이 유혹은 소년을 성적으로 수동적인 위치에 놓이게 만들었다. 소년의 성기를 가지고 장난을 친 대상이 두 살 많은 누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입된 흥분은 소년의 충동을 수동적인 형태로 환기시켰고, 스스로를 아버지에 대해서 여성적 위치를 차지하게 만들었다. 물론 이러한 위치는 소년이 습득하기 시작하는 성차 구별에 관한 지식에 반하는 것이었다. 이에 소년의 자아는 성충동을 다양한 방식으로 억압하거나 승화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이때 자아의 가장 공격적인 반응은 늑대 꿈의 형성이었다. 그러나 소년이 유모와 어머니로부터 성서의 이야기들을 듣게 된 이후부터는 종교적 담론이 보다 효과적인 방식으로 아버지에 대한 성충동을 억압한다. 처음에는 그 방식이 강박적인 형태로 나타났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가슴에 십자가를 반복하여 긋거나 벽에 걸린 성화들에 사다리를 놓고 기어올라가 하나하나 입 맞추기 전에는 절대로 잠들려 하지 않는 등의 행동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강박증은 이후 성서 이야기들에 몰입하면서 보다 안정적인 방식으로 승화된다. 예수의 고난은 소년이 자신을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면서 아버지에 대한 충동을 하나님에 대한 것, 즉 종교적이며 따라서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으로 전환시켜 사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강박적인 종교적 행동들과 이어지는 성서 이야기에의 몰입은 소년이 자신의 충동과 대면하지 않도록 하는 완충장치 역할을 해주었다. 성인이 된 이후까지 지속되었던 대장 장애 증세 역시 비슷한 역할을 했다. 환자는 성인이 된 후에도 관장을 하지 않으면 거의 배변을 볼 수 없는 신경성 대장 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이러한 관장 행위는 환자의 여성적 성충동을 은밀하게 만족시켜주는 일종의 히스테리적 증상이었다.4 그리하여 환자는 동성애자가 되지 않으면서도, 심지어는 다양한 여성 편력을 거치면서도 아버지에 대한 성충동을 무의식 속에 고스란히 간직할 수 있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다양한 병리적 증상이 돌출하여 환자의 삶을 괴롭힌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이 환자에 대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치료는 돌출된 병리적 증상들이 사회적으로 허용된 욕망의 흐름에 연결될 수 있도록 진행되었다.

 

4 배변 장애와 유사한 구조로 섭식 장애를 들 수 있다. 사춘기 소녀들에게서 발견되는 식욕부진 증세 중에서 배변 장애 구조와 비슷한 증상들이 관찰되는데, 이것은 아버지에 대한 성충동에 대해서 방어적으로 반응하는 증상이다. 구강기에서 사랑의 대상은 ‘먹는 것’ 또는 ‘잡아먹히는 것’으로 인식된다. 따라서 아버지에게 성교를 당하고 싶어 하는 욕망은 ‘잡아먹히는’ 이미지로 되돌아오고, 이에 대한 방어가 ‘먹는 것에 대한 거부’로 나타날 수 있다. 사춘기 소녀들의 아버지에 대한 억압된 성충동이 자아의 방어에 의해서 식욕부진의 형태로 나타나는 흔한 사례들이 그것이다.(지그문트 프로이트, 『늑대인간』, 열린책들)

 

 

 

 

메타 고고학으로서의 정신분석

 

지금까지 소개된 늑대인간의 자료들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은 개인의 기억이 일종의 ‘애도 작업travail de deuil’을 수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개인의 기억의 박물관에 채워진 주요한 유물들은 모두 하나의 중핵을 중심으로 구성된 듯 보이는데, 그 중심에는 주체가 욕망했으나 잃어버리도록 강요받은 상실의 대상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유물들은 그러한 상실의 대상을 은폐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둘러싸고 있다. 표면적으로 기억의 유물들이 보여주는 인상이나 의미는 그 너머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도록 시치미를 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은폐는 무엇보다도 개인사 박물관의 주인인 주체 자신을 속이기 위한 것이다. 주체가 자신의 욕망의 민낯을 맞닥뜨리지 않도록 유물들은 전혀 다른 형상을 하고 박물관의 전시관을 채우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은폐는 그 자체로 애도의 가장 본질적인 기능이다. 만일 애도의 의미가 상실된 것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것 없는 앞으로의 삶이 가능할 수 있도록 하는 작업을 의미한다면, 애도는 또한 상실의 대상을 잊도록 만들어주는 작업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잊기 위해서는 상실된 대상이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도록 허용되어야 한다. 늑대인간이 종교적 의례에 강박적으로 사로잡혔던 것은 자신이 상실한 대상, 즉 아버지에 대한 성충동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고 그리하여 그것을 잘 잊기 위한 절망적 애도의 시도였다. 늑대인간의 내면적 기억의 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유물들은 바로 이러한 애도를 위해 준비된 제물들에 다름 아니다. 

사정은 우리 모두에게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의 개인사 박물관을 채우고 있는 유물들은 그 추억들이 간직한 표면적인 아름다움과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애틋함의 정서 이면에 하나의 강력한 동기를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영영 상실한 욕망의 대상에 대한 애도의 작업이다. 현재 우리의 정체성을 구성하고 있는 기억의 유물들은 그렇게 상실을 중심으로 전시되어 있으며, 그런 상실의 본질을 은폐하고 그에 대한 기억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기 위해서 조직되어 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사실상 우리가 상실한 것에 대한 그림자라고 할 수도 있다. 현재의 나 자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미지는 우리가 어린 시절에 포기해야 했던 사랑의 대상에 대한 그림자이다. 이것이 단순한 반영 이미지가 아니라 검은 그림자인 이유는, 상실한 대상에 대해서 우리 자신의 무지無知가 유지되는 한도 내에서만 우리의 정체성이 유지될 수 있다는 조건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알 수 없어야 하며, 그러한 무지가 우리 자신의 안정된 정체성 형성에 본질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개인사 박물관은 일종의 투쟁의 흔적들이다. 그것은 상실에 대한 투쟁이며, 상실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한때 소년이었던 혹은 소녀였던 우리 자신의 어린 시절이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는 이미지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성해내기 위해서 받아들이거나 억압해야 했던 기나긴 애도 작업의 흔적들.

프로이트의 환자였던 늑대인간의 증상들이 유별나게 환자를 힘들게 만들었던 것은 상실에 대한 이러한 애도 작업을 적절히 도와주어야 했던 상징적 아버지의 역할이 부재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는 아이들의 교육에 소홀했고,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였다. 늑대인간의 유년 시절의 정체성은 유모와 가정교사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진 교육의 흔적에 의존해 구성될 수밖에 없었다. 혹은 늑대인간 스스로의 자아가 만들어낸 다양한 공포증이나 강박증에 의존하여 자신의 정체성을 창안해낼 수밖에 없었다. 유년 시절 늑대인간은 때로는 교육이 불가능할 정도로 통제 불가능한 성격을, 때로는 말 잘 듣는 얌전한 모습을 보여줬는데, 이 모든 급격한 성격 변화의 흐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