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료가 좀 모자라도,

‘살맛’을 요리할 수 있다






얼마 전 김치찌개를 끓이다가 문득 든 생각이다. 10여 년 전 자취생으로 처음 요리를 할 때만 해도 레시피에 나오는 모든 재료를 갖추는 것이 내겐 중요했다. 양파 하나만 없어도, 굳이 또 사러 나갔다 오곤 했다. 그래서인지 요리가 참 번거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이제는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음식을 만들게 되었다. 맛이 좀 덜하더라도 끼니를 채울 정도면 그만이다. 작품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니까.

일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루를 보내는 데 거창하고 완벽한 준비가 필요하지는 않다. ‘이 정도면 살 만하네’라는 마음이면 충분하다. 마음이 툭하면 부서졌던 학창 시절에는, 내 삶에 양파 하나가 없는 것을 엄청난 비극으로 생각했다. 내 약점이나 결핍, 불안한 조건을 어마어마한 장애물로 여겼다. 시련에 걸려 넘어질 때마다 무릎을 털고 일어나기보다는 부족한 여건들이 내 삶을 괴롭게 만든다고 합리화했다. 그래서 나를 성가시게 하는 모든 것을 미워했다.


하지만 천천히 하루씩 살자고, 그 하루가 전부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럴 필요가 없었다. 결핍은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수도 있고, 어떤 조건은 삐걱거리는 채로 계속 끌고 가야 할 수도 있다. 재료의 부재나 결핍을 문제 삼고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남에게 기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실하면 부실한 대로, 제 자신을 짊어지고 ‘살맛’을 내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 살맛이라는 게 행복과 연결되지 않나 생각해본다. 한때는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사치스럽다고 여겼다. 내게 행복은, 안정되고 여유 있는 사람들이나 생각할 수 있는 호화로운 궁궐 같은 것이었다. 극복해야 할 과제나 어려움이 생길 때마다 행복은 아예 먼 얘기로 던져두었다. 문득 알 수 없는 기쁨이 차오르면 ‘설마 이게 행복인가?’ 의심했다. 별거 아닌 일에 마음이 충만하게 채워질 때 ‘혹시 이게 행복이란 말인가? 아니면 내가 행복한 척하려는 건가?’ 혼란스러웠다. 행복을 믿지 못하고 누리지 못했다. 운 좋게도, 그 당시 심리 상담을 해주시던 선생님께서 ‘혜령 씨는 행복이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고 지적해주셨다. 그 말은 나를 깨어나게 하는 작은 계기가 되었다. 나 자신을 무엇으로 생각했기에, 행복을 얼마나 대단한 것으로 생각했기에 행복이 내게는 과분하다고 여겼던 걸까.


어둠을 모르는 사람이 밝음을 구분해낼 수 없듯이, 기쁨을 알기 위해서는 기쁨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기에 내 안에 일어나는 모든 감정이 소중하다. 마찬가지로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행복이 아닌 것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그러면 장애물에 막혀 있을 때조차 ‘이 정도면 살 만하다’는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다. 완벽한 재료와 화려한 도구를 두고도 삶을 비관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처럼, 반대로 많은 것이 삐걱거릴 때조차 행복해질 수 있다. 그저 하루를 살아낼 정도의 살맛이면 된다.

종종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인사를 보낸다. ‘오늘 하루 기쁘게 보내’ ‘행복한 하루 보내.’ 이게 그저 뻔한 인사치레일까? 우리는 왜 습관처럼 다른 사람의 기쁨과 행복을 빌어줄까? 그건 분명히, 그들이 행복하지 않으면 내가 결코 행복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누군가 아프면 나도 아프고, 즐거운 사람을 보면 나도 즐거워진다. 반대로 내가 행복하면 내 주위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게 행복을 빚지고 있다. 타인에게 대단한 무엇이 되어주지 못한다고 해서 스스로 부족하다 여길 필요는 없다. 언제든 내가 행복해짐으로써 타인의 행복에 기여할 수 있다.


본문에서 학자들의 연구를 몇 군데 인용했지만, 과학적 연구 결과를 많이 안다고 해서 저절로 행복해지지는 않는다. 대단한 비법이나 기술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행복을 자각하는 마음이다. 기쁨이 기쁨인 줄 모르고 행복을 그저 돌멩이 보듯 여기는 마음, 그렇게 닫혀버린 마음은 아무리 어여쁜 것들이 주위에 널려 있어도 무감각할 뿐이다.

보통의 하루 속에서 벌어지는 아주 평범한 일과 내면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당신에게 무언가 알려주기 위해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그럴 때마다 민감하게 발견해냈으면 좋겠다. ‘이게 행복이 아니면 무엇이지?’ 하고, 그 두드림을 알아챘으면 좋겠다. 그것이 곧 가장 즐거운 앎이 될 것이다. 그러면 더 이상 버티는 삶이 아닌, 기쁨의 힘으로 살아내는 삶이 될 것이다.


다소 불완전한 재료들과 영영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삶의 조건들에도 불구하고, 하루씩 자신만의 ‘살맛’을 요리해나가길 진심으로 바란다. 힌트가 되어줄 만한 이야기가 이 책 속에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며, 어느 날 아침 ‘기쁜 하루 보내’라는 메시지를 전송하는 마음으로 이 책을 세상에 내어놓는다.


2018년 유난히 무더운 여름,

김혜령  



프롤로그재료가 좀 모자라도, ‘살맛’을 요리할 수 있다




행복에 가까운 사소한 태도


똑같은 하루는 없다

때로 기억하고, 더러 잊으라

슬픔을 나무라지 말라

불행하게 될 권리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재주

인생에 정말 ‘운’이란 게 있을까


행복을 부르는 적절한 관계


행복한 사람 옆에 행복한 사람

‘사랑해’보다 중요한 말

우리는 약하기에 서로 연결된다

결코 당신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사람 스트레스’와 함께 사는 법


행복이 머무는 성숙한 사랑


사랑은 삶을 버티게 한다

완벽한 이별을 위한 애도

조금 손해 봐도, 미워하지 않는 게 낫다

이유 없이 좋은 것들


행복을 닮은 작은 풍경


재미없으면 무슨 소용인가

사실은 언제나 여행 중

행복에도 가성비가 있다

언제라도 도망칠, 나만의 장소

느린 것들에 보내는 찬사


행복으로 향하는 고요한 성장


가장 막막할 때 가장 많이 자란다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꼭 사랑받지 못해도 나는 나답게

삶의 난이도를 조절할 수 없기에

과거에도, 미래에도 붙잡히지 않기



참고문헌






과학이 확인한, 세계 최고로 행복한 사람은 마티외 리카르라고 한다. 그는 프랑스에서 촉망받는 생물학자였는데 돌연 티베트로 건너가 승려가 된 인물이다. 미국 위스콘신 대학은 그에 대한 임상 시험을 통해, 긍정적 감정과 관련된 뇌 부위의 활동 수치가 다른 사람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을 확인했다. 그 덕택에 ‘세계 최고 행복남’이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닌다. 행복에 대한 그의 언급 중에 인상적이었던 내용은 ‘행복은 일종의 기술이며, 그러므로 연마하고 닦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기술을 어떻게 늘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중에, 내 주위에서 ‘최고로 행복한’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고 싶은 친구를 만났다.


최고로 행복한 사람의 비결


마티외 리카르처럼 공인된 인물이 있는가 하면,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한 세계 최고 행복남은 ‘김연재’라는 아이다. 뽀얀 얼굴의 그는 내 친구의 세 살배기 아들이다. 근래 내가 만난 사람 중에 가장 행복한 미소와 기쁨을 가졌다. 천진난만한 표정과 계산 없는 표현들, 춤을 추고 어깨를 들썩이는 원초적인 행동을 보면 한국의 행복지수와 전혀 상관없이 우주 최고로 행복한 존재임이 분명하다. 잠깐씩 울거나 고집을 피울 때를 제외하면, 함께 있는 사람까지 기쁨으로 전염시키는 ‘프로 행복꾼’이다. 그런 그와 함께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체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지친 날이라도 잠자리에 들기 전에 꼭 그 아이가 다시 생각날 수밖에 없으리라. 연재는 정말 우주 최고로 행복한 아이니까!

나는 그 아이와 함께할 때마다 즐거움의 비결이 무엇인지 유심히 관찰했다. 그는 내게 없는 무엇을 가졌기에 저렇게 모래알만큼의 빈틈도 없이 가득 행복해할 수 있는 걸까. 만약에 누구나 연재와 같은 시절이 있었던 것이라면, 자라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무엇을 잃었기에 저런 싱그러운 감정을 잊게 된 걸까.


하루는 바쁜 친구를 대신해 어린이집으로 그를 데리러 간 적이 있었다. 어린이집에서 연재의 집까지는 성인의 걸음으로 3분 정도 걸리는 거리이다. 하지만 그 아이와 함께 걷는다면 30분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그 짧은 거리 안에 시선을 사로잡는 재미난 것들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것을 보고 만지고 알아내야 한다. 오토바이 두 대가 연달아 지나가자 놀라며 “우와, 오토바이가 같이 지나가네!”라고 소리친다. 바닥에 떨어진 연두색 나뭇잎을 보며 “우와,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연두색이다!” 하고 반가워한다. 바삭한 낙엽을 발견했을 때는 “우와! 초코색 나뭇잎이네” 하더니 직접 주워서 나에게 건네며 “이거 이모 가져!”라며 선물할 줄도 아는 센스 있는 아이다.

그에게는 모든 게 반갑고 신기하다. 늘 상념에 가득 차 있는 나랑은 다르다. 지나온 거리에 나무가 있었는지 외계인이 있었는지도 기억하지 못하는 나와 달리, 연재에게는 짧은 하원길조차 신비감으로 가득 찬 세계다. 그의 눈에는 모든 게 새로움이다. 어제도 그제도 같은 길을 걸었을 텐데 매번 새로운 길을 걷는 듯이 잔뜩 흥분해 있다.


어쩌면 나와 연재의 이 차이에 비결이 숨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 중에는 참 많이도 알고 있는 어른들이 있었다. 그들의 시선에서는 새로울 게 전혀 없었다. 웬만한 일은 다 뻔하다는 듯이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그거 내가 아는데 별로다’ ‘그거 내가 해봤는데 별거 없다’라는 식이다. 실제로 아는 게 많긴 한데, 대체로 평가나 부정의 표현이 많았다. 또한 그들의 세계는 대체로 똑같은 것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게 그거지 뭐’라는 표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렸을 때는 그런 어른을 보면 되게 아는 게 많은가 보다 하며 부러워했다. 뭐든지 어설펐던 어린 시절에는 그런 태도의 어른이 ‘어른스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그런 사람은 웃음도 적고, 행복해 보이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표정이 별로 없었다. 아마 어른이 되면 무슨 연유인지 기대감도 흥미도 잃게 되고, 호기심도 잃어버리는 것 같다. 나의 경우 실망감이 클까 봐 애초에 기대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는 일이 더러 있다. 어쩌면 기대와 호기심을 잃어야만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어른의 삶인지도 모르겠다. 더는 실망하기 싫고, 아픔을 느끼기 싫은 사람들의 자기 구제책인 것이다. 하지만 그러는 동안 어른의 시간은 매해 짧아지기만 한다. 연말이면, ‘한 것도 없는데 벌써 12월이야?’ 하면서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어른의 시간은 왜 짧은가


어른의 시간이 어릴 때에 비해서 점점 짧게 느껴지는 이유는 기억과 관련이 있다. 우리의 시간감각, 그러니까 시간이 빠르게 느껴지거나 더디게 느껴지는 정도는 기억에 의존한다.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의 심리학 교수 다우어 드라이스마는 저서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에서 이를 설명한다.

어렸을 때는 주관적으로든 객관적으로든 완전히 새로운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따라서 여러 사건과 그로 인한 감정이 매우 강렬하게 기억된다. 많은 생생한 기억이 길고 자세하게 마음에 새겨진다. 그러면 의식된 시간은 길고 빼곡하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나 반복된 날들이 늘어나고, 많은 경험 중 일부는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익숙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실제로는 존재했지만 기억 속에는 많은 시간이 생략되는 것이다. 그렇게 지나간 일 년의 시간은 어렸을 때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짧고 공허하게 느껴진다.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장마리 귀요는 이러한 시간개념을 공간에 비유한다. 화가가 원근법을 이용해 공간을 정돈하는 것처럼 우리의 기억도 경험한 일들을 정돈하는 작업을 한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깊은 인상을 남긴 사건은 더 가깝게 느껴 최근의 일로 기억할 수 있다. 인상적인 일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기억의 공간은 점차 커지고, 당연히 시간도 더 길게 느껴질 것이다. 그래서 귀요는 이렇게 권한다.


시간을 길게 늘이고 싶다면, 기회가 있을 때 새로운 것들로 시간을 채워야 한다. 신나게 여행을 다녀오거나,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 한층 젊어지거나. 뒤를 돌아보면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과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상상 속에 쌓여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의 일부인 이 모든 조각들이 길게 줄지어 늘어설 것이고, 그것이 길게 이어진 시간을 보여줄 것이다.

- 다우어 드라이스마, 《나이들수록 왜 시간은 빨리 흐르는가》 중에서

장마리 귀요의 말


언제부턴가 크리스마스나 생일, 기념일이 더 이상 설레지 않고, 많은 날 중에 하루일 뿐이라고 무심하게 넘어가곤 했다. 유난 떨지 않는 내 모습이 ‘쿨해’ 보인다는 생각에 만족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많은 날을 무뚝뚝하게 ‘그게 그거’인 날들로 만든 탓에, 충분히 느낄 수 있었던 즐거움이 줄어들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뻔하고 식상한 날이 많아질수록 재미도 없어질뿐더러 시간이 그만큼 기억 속에서 ‘스킵’될 것이다.

귀요는 새로운 경험으로 가득 채워야 한다고 했지만, 단지 매 순간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충분할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건 시간을 늘이는 것이라기보다 더 자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상은 어차피 내 눈에 담기는 것이다. 다가오는 가을이 작년의 가을과 같지 않은 것처럼, 무엇도 하루하루 새로워지지 않는 것은 없다. 내일은 오늘과 다르다. 식상함으로 가득 차서 삶을 짧게 요약해버리기보다, 매일 새롭게 정성 들여 시간을 색칠해가는 것, 그것이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즐거운 선물이 아닐까. 연재처럼 매일이 신비로 가득 찰 때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기쁨을 맛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그 아이를 만나러 간다. 오늘은 또 내게 어떤 행복의 기술을 알려줄까? 이미 그는 지난주에 만난 연재가 아니니까.





‘즐거운 기억은 미소를 짓게 합니다.’ 지인의 SNS에 올라온 사진 속에 있던 문장이다. 어느 식당 후식 코너에 붙어 있는 아주 작은 칠판에, 손글씨로 쓰여 있던 것이라고 했다. 사진뿐이었다면 쉽게 지나치고 말았을, 다소 뻔한 문구였다. 하지만 그 사진 아래에 지인의 생각이 덧붙어 시선을 사로잡았다. 그녀의 글은 이렇다.


즐거운 기억은 언제고 있게 되는, 있을 수밖에 없는 삶의 고통들을 잘 견디게 해주는 면역력. 즐겁고 신날 때 충만하고 행복할 때 그 순간을 오롯이 경험하는 것이 첫 번째 지혜이겠고, 힘들고 침울하고 허약하게 느껴질 때 잘 저장해놓았던 즐거운 기억을 꺼내어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두 번째 지혜이겠다.


그녀의 생각을 따라가다 보니, 다시 올려다본 사진 속의 글이 새롭게 느껴졌다. 그 짧은, 어쩌면 뻔한 한마디를 놓치지 않고 저장하고 곱씹어본 그녀의 마음이 참 예뻤다.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치료하는 일을 하는 그녀는 자신의 내담자들이 즐거운 기억을 통해 회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을지도 모른다. 혹은 스스로에게 되새기고 있었을지도. ‘그래, 언젠가 마음이 허약하게 느껴질 때 좋은 기억을 되살려야지’ 하고 다짐했을 한 사람이 그려졌다. 그녀의 생각처럼 즐거운 경험은 그 자체로 지금의 나에게 기쁨을 주지만, 후에 기억으로 남아 언제든 내가 필요할 때 꺼내 볼 수 있다.


기억의 힘


다행히 뇌는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한다. 이전의 경험을 상기할 때 작동하는 두뇌 메커니즘은 현재 시점에서 경험할 때와 거의 흡사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과거를 떠올리며 미소 짓는 마음과 바로 지금 실제로 웃을 때의 마음은 그다지 큰 차이가 없다. 오스트리아의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나치의 강제수용소에서 고통받을 때 아내와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하면서 버텼다는 것이나, 요즘 가상현실이 유행하는 것도 인간의 뇌가 현실과 허구를 구분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뇌의 복잡한 처리 방식을 다 이해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기억의 힘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기록한다. 사진을 찍고 글로 남겨두거나 SNS를 활용한다. 누군가에게 되풀이하여 말한다. 그러면서 기억은 더욱 선명해져, 권태롭거나 지치는 날에 다시금 떠올려보게 된다. 마음의 당분처럼 나를 회복시킬 수 있는 자원이다. 나를 행복하게 하는 기억은 많을수록 좋다. 왜곡되고 미화되더라도 괜찮다. 프로이트는 마음의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기억이 얼마큼 정확한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실제로 일어난 일을 ‘역사적 사실’이라고 한다면, 개인이 기억하는 경험은 ‘서사적 사실’로 구별한다. 그리고 경험한 사실에 대한 느낌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진실 여부보다 자신이 그 경험을 어떤 방식으로 구성해냈는지가 주목할 대상이다. 그 기억이 아프다는 것은 치유가 필요하다는 적신호이다. 반대로 기쁘다면, 언제든 꺼내 먹을 수 있는 영양제가 되어줄 것이다.

기억은 왜곡된다. 기억의 메커니즘은 ‘입력→저장→인출’의 3단계를 거치는데, 인출되는 순간의 기억은 이미 처음 입력될 때와는 어떤 식으로든 달라져 있다. 아니, 처음부터 사실과 다르게 입력되기도 한다. 우리는 자신을 보호하고 합리화하기 위해 과거의 이야기를 끊임없이 구성해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이 얼마나 진실에 가까운지는 좀처럼 파악하기 어렵다.


기억은 과거 사건의 복제가 아니다. 기억은 복제와 위조가 섞인 연출이다. 기억은 내가 엮은 책략이다. 나는 단순히 사진가가 아니라 편집자이자 가끔은 컴퓨터 그래픽 아티스트이기도 하다. 잘 알려진 철학 이론에 따르면 나는 나의 기억이다.

- 마크 롤랜즈, 《철학자가 달린다》 중에서


학창 시절 자신이 친구들에게 보냈던 수많은 편지의 내용을 일일이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까? 우리는 받은 편지들을 간직하고는 있어도, 보냈던 편지는 가지고 있지 않다. 받은 편지는 다시 읽어보면 그만이지만, 내가 무슨 말을 썼는지는 쉽게 잊어버린다.

부커상 수상작이기도 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는 영국 작가 줄리언 반스의 소설이다. 주인공 토니의 시점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의 기억에 의존해 서술된다. 토니는 대학 시절 베로니카와 일 년 정도 사귀다가 헤어졌다. 이후 토니의 고등학교 친구였던 에이드리언이 그에게 편지를 보내, 베로니카와 연인이 된 것을 알리며 양해를 구한다. 그의 기억에 고등학교 시절 에이드리언은 지적이고 장래가 촉망되던 학생이었고, 토니는 그를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이미 베로니카와 헤어진 후였기 때문에 토니는 ‘쿨하게’ 그들의 사이를 인정해주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 어떤 이유인지 에이드리언이 자살을 했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시간이 지나 그마저 기억에서 지워졌다.


40여 년이 지났다. 토니는 베로니카의 엄마가 유품으로 남긴 뜻밖의 편지를 받게 된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을 통해 처음으로, 에이드리언의 자살에 의문을 품는다.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40여 년 만에 베로니카를 만난다. 그녀는 토니가 오래전 자신과 에이드리언에게 보냈던 편지를 보여준다. 에이드리언의 편지에 토니가 보냈던 답장이었다.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편지에는, 스스로 열등감에 휩싸여 쏟아낸 엄청난 독설과 저주가 담겨 있었다. 그 편지로 인해 에이드리언이 자살이라는 비극에 이르렀다는 이야기의 조각이 맞추어진 것이다. 그는 충격에 빠진다. 이 소설은 우리가 거대한 기억의 왜곡 속에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문을 품어보게 한다. 정말 그럴지도 모른다. 남이 내게 한 말은 평생 담고 살기도 하지만, 내가 내뱉은 말은 쉽게 증발한다. 받은 편지는 다시 꺼내 볼 수 있지만, 보낸 편지는 잊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기에 기억은 이미 충분히 이기적인 것이다.


내가 그 편지를 썼다는 사실이나 그렇게 험담을 퍼부었다는 것을 부인하기가 어려웠다. 행여 하소연할 수 있는 게 있다면, 그 편지를 쓴 당시의 나와 현재의 나는 다르다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말이지, 나의 어떤 성정이 나를 부추겨 그런 편지를 쓰게 했는지 나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고도의 자기기만인지도 모른다.

- 줄리언 반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중에서


망각의 축복


마음에 저장되는 모든 이야기가 자로 잰 듯 사실과 정확하게 일치한다면, 죄책감과 수치심으로 견디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또는, 모든 일을 전혀 걸러내지 못하고 빠짐없이 쌓아가야 한다면 과연 우리의 저장 창고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을까. 감당하지 못하는 것은 진실 여부나 기억의 양이 아니라 진실에 대한 우리의 감정이다. 그렇기에 어떤 걸 기억하느냐가 아니라 어떤 걸 지워내느냐가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다. 인간은 생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것만 기억하고 나머지는 잊어버리도록 진화되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뇌는 기억보다 망각에 익숙하다. 망각은 없어선 안 될 능력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기억만큼 망각을 중요하게 여긴 듯하다. 전해지는 신화에 따르면, 보이오티아라는 지방의 신전에는 두 개의 샘물이 있었다. 하나는 ‘레테’라는 망각의 샘물이고, 다른 하나는 ‘므네모시네’라는 기억의 샘물이다. 그곳에 신탁을 구하러 오는 자들은 그 두 샘물을 차례로 마셔야 했다. 이전까지의 불필요한 생각들을 지우고, 예언을 더 잘 기억하기 위해서였다. 레테는 기억을 지우는 것뿐만 아니라, 진실을 은폐한다는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어 다양하게 해석해볼 수 있다.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의 토니를 생각해보라. 기억을 단지 잊은 것일까, 자신 때문에 에이드리언이 비극을 맞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기 위해 은폐한 것일까. 어떤 일은 절대 잊어선 안 되지만, 잊어야만 살 수 있는 일도 있다. 뜨겁게 사랑했던 연인과의 이별, 또 절대 헤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가족과의 영원한 이별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갈 수 있는 것은 망각의 덕 아니겠는가. 그뿐만 아니라 나 자신의 부끄러운 말과 행동, 상처가 되었던 타인의 말들도 그것이 시간과 함께 흐릿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 기분을 영원히 감당할 수 있을까. 우리가 내일로 다시 발을 디딜 수 있는 것은 망각이 있기 때문이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망각을 능동적인 활동이라고 표현했다. 정신적 질서와 안정을 찾아주고, 행복감과 건강함을 주는 장치라고 말한다. 잊히는 것이 수동이 아닌 능동이 될 수 있는 것은, 망각을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연의 상처를 지우기 위해 새로운 만남을 향해 가고, 나의 과오를 잊기 위해 다시 마음을 다지고 발을 구른다. 멈추어 있다면 아픔과 괴로움이 잊히기는커녕 온 힘을 다해 나를 짓누를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망각은 기억보다 더 적극적인 정신 활동이다.



망각이란 천박한 사람들이 믿고 있듯이 그렇게 단순한 타성력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일종의 능동적인, 엄밀한 의미에서의 적극적인 저지 능력이다. (중략) 여기에서 바로 알 수 있는 것은 망각이 없다면, 행복도, 명랑함도, 희망도, 자부심도, 현재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지 장치가 파손되거나 기능이 멈춘 인간은 소화불량 환자에 비교될 수 있다.

-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학》 중에서


현명한 망각 활동 중 하나는 온전히 현재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아픈 기억에 휩쓸리지 않고, 온갖 상념에 시선을 내어주지 않고 ‘지금, 여기’를 그대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망각은 순간의 경험에 완전히 주의를 기울이는 일종의 ‘마음챙김Mindfulness’이다. 명상의 한 개념이기도 한 마음챙김은, 순간에 주의를 집중하는 하나의 정신적 태도를 말한다.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는 이유의 대부분이 지난 일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걱정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당연한 얘기이다. 적극적인 망각 활동을 통해 현재에 편안하게 머무를 수 있다.

현재를 더 잘 살아내기 위해, 망각을 활용해보는 건 어떨까. 언젠가 잊힐 것을 믿는다면 지금 경험해야만 하는 고통이나 불편을 충분히 겪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어쨌거나 망각이 있기 때문에, 이런저런 시련은 나의 ‘행복한 삶’을 방해할 수 없다. 계속해서 기억이 누적되어갈 우리에게 잘 잊어버리는 능력은 기억력이 부족한 게 아니라, 충분히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지혜이다. 잘 잊어야만 마음의 배는 가라앉지 않고, 노를 저어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

‘나는 나의 기억이다’라는 말이 있다. 정말로 자아가 기억의 총체라면, 나의 기쁨과 슬픔도 내가 무엇을 기억하는가와 맞닿아 있을 것이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당신의 삶은 행복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는 상상을 해본다. 그 답은 전적으로 내 기억에 의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더욱 적극적인 망각을 위해, 새로운 기쁨을 만들어나가고 싶다.





슬픔을 전혀 모르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는가. 타인의 슬픔을 조금도 헤아리지 못하는 사람, 어쩐지 차가운 피가 흐를 것만 같은 그런 사람 말이다. 루마니아는 한때 이렇게 슬픔이 없는 아이들을 한꺼번에 길러내 충격을 안겨주었다.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인구수를 늘려 국력을 높일 작정으로 피임과 낙태를 금지했다. 돌볼 여력이 없던 부모들은 아이를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고아원들은 순식간에 몇백 명의 아이를 보호하게 되었다. 보모 한 명이 수십 명의 아이를 돌봐야 하는,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정서적인 돌봄은 당연히 불가능했을 것이다. 우유도 겨우 먹일 정도여서 심지어 젖병을 기둥에 매달아 먹였다고 한다. 눈을 맞추고 웃어주는 일은 고사하고, 아이들이 아무리 소리를 지르며 울어대도 반응을 해줄 수 없었다.


슬픔이 갈 곳을 잃으면


그 결과 아이들이 세 살 정도 되었을 때는 울지도 말하지도 않게 되었다. 사람이 다가가도 아무 반응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감정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한 채로 한두 가지의 반복된 행동만 보였다. 그렇게 자라난 이들 중 일부는 차우셰스쿠 정부의 친위대나 비밀경찰이 되었다. 또한 감정을 느끼지 못해 극도의 잔인함을 장착한 사이코패스 같은 사람들도 있었다.

이처럼 슬픔이 없는 사람은 정서가 아예 말라 있는 경우가 많아서 무섭기까지 하다. 극심한 우울증을 겪는 사람과 함께하는 것도 조심스럽지만, 슬픔을 전혀 모르는 사람과는 어쩐지 정을 붙이기 어렵다. 우리는 이처럼 매정한 사람, 슬픔을 모를 것 같은 사람을 가리켜 흔히 ‘피도 눈물도 없는’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곤 한다. 자신에게 슬픔이 없는 사람은 타인이 가진 슬픔의 영역 또한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루마니아의 고아원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어도, 우리 사회 역시 슬픔에 관대하다고는 할 수 없다. ‘남자는 태어나서 세 번 운다’든가 ‘계집애처럼 질질 짜고 그래’ 같은 말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슬픔을 부정적인 정서로 간주하는 것은 충분히 슬퍼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자연스럽게 표출되는 슬픔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슬픔은 갈 곳을 잃고 결국 사라져버린다. 그렇게 슬픔을 잃어버린다.


우리 문화는 슬픔에 인색한 경향이 있다. 그리하여 슬픔에 빠진 사람들에게 빨리 정상적인 삶의 궤도로 돌아오라고 압박을 가한다. 그러나 슬픔을 수용할 충분한 시간을 갖지 않으면, 삶의 속도를 늦추고 내면에 집중함으로써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 일자 샌드, 《서툰 감정》 중에서


덴마크의 심리치료사 일자 샌드의 설명처럼, 슬픔을 충분히 수용하지 않으면 내면이 성장할 기회를 놓친다. 슬픔으로 인해서 우리는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스스로를 보게 되고, 삶을 반추할 기회를 가질 수 있다. 앞만 보고 달리느라 아무 생각 없이 가던 길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을 때 내면은 여물기 때문이다. 슬픔이 없다면 성숙할 기회를 놓쳐버리는 것이다.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