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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키, 그러니까 우리 부부가 막내딸에게 붙이기로 최종적으로 합의한 그 이름은 약자가 아니다. 그것은 나와 그 애 아버지와의 타협의 산물이었다. 왜냐하면 남편은 역설적으로 그 애에게 일본식 이름을 지어 주고 싶어 했는데, 나는 (아마도 과거를 떠올리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이유에서) 영어식 이름을 고집했던 것이다. 남편은 결국 니키라는 이름이 왠지 동양적인 느낌을 풍긴다는 이유로 그 이름을 붙이는 데 동의했다.

니키는 올해 초, 그러니까 아직 춥고 비가 부슬거리던 4월에 나를 보러 왔다. 아마도 그 애는 좀 더 오래 머물 작정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골집과 그 주변의 고요함 때문에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이었다. 오래지 않아 나는 그 애가 한시바삐 런던의 자기 생활로 돌아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니키는 초조한 기색으로 내 클래식 레코드를 들었고 많은 잡지들을 뒤적였다. 규칙적으로 전화가 걸려 오곤 했는데, 그러면 그 애는 여윈 몸에 딱 붙는 옷차림으로 카펫이 깔린 바닥을 가로질러 방으로 들어가서는 통화 내용이 들리지 않도록 신경 써서 문을 닫았다. 그 애는 닷새를 머물고 떠났다.

니키가 게이코 이야기를 꺼낸 것은 두 번째 날이었다. 바람 부는 잿빛 아침이었다. 우리는 팔걸이의자를 창가에 가져다 놓고 비 내리는 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제가 거기 오기를 바라셨어요? 장례식에 말이에요.” 니키가 물었다.

“아니, 그렇지 않단다. 난 정말이지 네가 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단다.”

“언니 소식을 듣고 신경이 곤두섰어요. 하마터면 올 뻔했죠.”

“난 네가 올 거라는 기대 같은 건 한 적이 없다.”

“나한테 무슨 문제가 있는지 사람들이 궁금해하더군요. 전 아무에게도 언니 일을 말하지 않았어요. 당혹스러웠던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은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내 느낌이 어떤지 결코 알 수 없을 거라고요. 자매간이란 가까워야 하는 법이잖아요. 서로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가까운 사이여야 한다고요.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았어요. 전 이제 언니 모습조차 기억나질 않아요.”

“그래, 네가 게이코를 본 지 꽤 오래됐지.”

“언니는 그저 나를 불행하게 하던 사람으로 기억날 뿐이에요. 언니에 대한 제 기억은 그뿐이에요. 하지만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정말 슬펐어요.”

니키가 서둘러 런던으로 돌아간 건 어쩌면 이곳의 고요함 때문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게이코의 죽음에 대해 깊고 길게 이야기한 적은 없었지만, 우리가 대화할 때마다 그 주제는 줄곧 우리 곁을 떠돌고 있었던 것이다.

니키와 달리 게이코는 순수한 일본인이었고, 신문 한 개 이상이 재빨리 그 사실을 강조했다. 영국인들은 우리 일본인에게 자살 본능이 있으리라는 가설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마치 그것으로 충분하고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다는 듯이. 왜냐하면 모든 신문이 그렇게 보도했던 것이다. 그 애가 일본인이고 자기 방에서 목매어 자살했다고.

 

그날 저녁 창가에 서서 어둠 속을 내다보는데, 니키가 뒤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지금 무슨 생각 하세요?” 그 애는 무릎에 문고본 책을 올려놓은 채 맞은편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내가 알던 사람을 생각하고 있었단다. 한때 알고 지내던 여자 말이다.”

“엄마가…… 그러니까 영국에 오시기 전에 알았던 사람요?”

“나가사키에 살 때 알던 여자란다. 네가 그런 걸 묻는 거라면 말이다.” 니키는 내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주 오래전 일이야. 내가 네 아버지를 만나기 아주 오래전 말이다.”

니키는 내 대답에 만족한 듯 무어라 중얼거리며 다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많은 점에서 니키는 사랑스러운 아이다. 그 애가 나를 보러 온 것은 내가 게이코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만이 아니었다. 그 애는 사명감 같은 것을 갖고 나를 보러 온 것이다. 그 애가 최근 몇 년에 걸쳐 내가 과거에 취한 몇 가지 결정에 대해 자청해서 찬탄을 보낸 사실을 감안하면, 그 애는 이번에도 지금의 사태 역시 다르지 않다고, 과거의 결정을 후회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나를 만나러 왔을 것이다. 요컨대 게이코의 죽음은 나의 책임이 아니라고 나를 안심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나는 지금 게이코에 대해 자세하게 떠올리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일은 나를 불편하게 한다. 여기서 게이코를 언급한 것은 올해 4월 니키의 방문 때 그런 일이 있었고, 그 애가 와 있는 동안 아주 오랜만에 사치코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내가 사치코를 잘 안다고 할 순 없었다. 실제로 우리의 우정은 수십 년 전 어느 해 여름 몇 주간 지속되었을 뿐이다.

 

그즈음 최악의 시기는 지난 참이었다. 미군의 수는 어느 때보다도 많았지만(한국에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므로) 나가사키에는 문제의 사건이 벌어진 충격이 가시고 차분하고 안도하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세상은 변화의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나와 남편은 도시의 동쪽 구역에 살고 있었다. 시내에서 전차를 타면 멀지 않은 그런 거리였다. 동네 옆에는 강이 흘렀고, 전쟁 전에는 그 강둑에 작은 마을이 있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원자폭탄이 떨어지고 나서 그곳에 남은 것이라고는 새카맣게 숯이 된 잔해뿐이었다. 복구가 진행되었고, 콘크리트 건물 네 동이 세워졌다. 아파트 각 동마다 40여 채의 독립된 집이 있었다. 네 동 중에서 가장 최근에 지어진 우리 동은 복구가 중단된 지점을 표시해 주는 셈이었다. 우리 건물과 강 사이에는 수만 제곱미터에 달하는 말라붙은 진흙과 물웅덩이들이 있는 넓은 황무지가 펼쳐져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곳이 비위생적이라고 불평해 댔다. 물론 배수 상황은 형편없었다. 웅덩이에는 1년 내내 악취 나는 물이 들어차 있었고, 여름 몇 달 동안 모기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극성을 부렸다. 이따금 공무원들이 나와 땅을 측량하고 노트에 뭔가를 기입해 갔지만 그런 다음 여러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아파트 주민들은 우리와 무척 비슷한 이들이었다. 젊은 부부들로, 남편들은 잘나가는 회사에서 일했다. 회사 소유로 회사에서 직원들에게 좋은 조건으로 임대해 준 아파트가 많았다. 집들은 내부 구조가 똑같았다. 바닥은 다다미로 되어 있고 욕실과 주방은 서구식이었다. 면적이 좁은 편이어서 더운 몇 달 동안은 실내를 서늘하게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주민들은 전체적으로 만족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기억나는데, 그곳은 일시적인 주거지라는 분위기가 감돌았다. 마치 우리가 모두 더 나은 곳으로 옮겨 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곳에는 전쟁의 참화와 정부의 불도저 모두로부터 살아남은 목조 오두막이 하나 있었다. 널찍한 황무지 끝, 강가에 홀로 서 있는 그 집이 아파트 창문에서 내다보였다. 시골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사진 타일 지붕 끝이 거의 땅에 닿을 듯한 오두막이었다. 할 일이 없을 때면 나는 창가에 서서 그 집을 바라보았다.

사치코가 마을에 오면서 불러일으킨 관심으로 판단컨대 그 집을 유심히 지켜보던 이는 나만이 아니었다. 어느 날 그곳에서 일하던 두 남자를 두고(그들이 정부에서 보낸 일꾼이냐 아니냐를 두고) 사람들 사이에 말들이 많았다. 그다음에는 그 집에 사는 여자와 그녀의 딸인 어린 소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물웅덩이투성이 황무지를 가로질러 집으로 가는 여자와 딸을 여러 차례 보았다.

그해 여름이 시작될 무렵, 나는(당시 임신 서너 개월째였다.) 낡은 대형 미제 흰색 자동차 한 대가 털털거리며 황무지를 가로질러 강을 향해 가는 것을 보았다. 저녁으로 넘어가는 멋진 오후였다. 오두막 뒤로 지는 석양이 금속에 부딪혀 한순간 번쩍였다.

어느 날 오후였다. 전차 정류장에 서 있던 나는 여자 둘이 강가의 그 버려진 집에 이사 온 여자에 대해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한 여자가 상대방에게 자신이 그날 아침 여자에게 말을 걸었는데 여자의 대답이 모욕적이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자 상대방 여자도 새로 이주한 여자의 태도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는 데 동의했다. 좀 오만한 듯하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 생각에 그 여자는 최소한 서른 살을 넘었다. 왜냐하면 아이가 적어도 열 살은 되어 보였던 것이다. 첫 번째 여자가 그 외지인이 도쿄 사투리를 쓰는 걸로 보아 나가사키 출신이 아닌 게 분명하다고 다시 말했다. 그들은 한동안 그 여자의 ‘미국인 친구’에 대해 이야기했다. 이윽고 첫 번째 여자가 그날 아침 그 외지인 여자가 자신에게 얼마나 불손했는지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당시 나와 이웃해 살던 여자들 중 많은 이들이 슬프고 끔찍한 기억을 지닌 채 고통스러운 세월을 견디고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나는 잘 안다. 하지만 당시 그런 이들을 매일같이 보고 그들의 남편이나 아이들과 자주 부딪치면서는 그런 사실을, 그러니까 그들의 삶이 전시(戰時)의 악몽과 비극을 품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기가 쉽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이들에게 비우호적으로 보일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그렇다고 우호적으로 보이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 것도 아니었다. 그 시절 나는 사람들과 어울리기보다는 여전히 혼자 있는 편이 좋았던 것이다.

그들이 사치코에 대해 하는 이야기에 관심이 끌린 것은 그즈음이었다. 그날 오후 전차 정류장에서 있었던 일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우기가 지나고 다시 해가 나기 시작하던 6월의 어느 날이었다. 비에 흠뻑 젖었던 주위의 벽돌과 콘크리트 표면이 말라 가고 있었다. 우리가 서 있던 곳은 전차와 자동차가 동시에 오가는 철교 위였다. 철길 한쪽으로 언덕을 따라 한 무리의 지붕들이 펼쳐져 있었는데, 마치 집들이 언덕 비탈로 굴러떨어지는 것처럼 보였다. 그 너머 조금 떨어진 곳에 우리 아파트가 네 개의 콘크리트 기둥처럼 서 있었다. 그때 나는 사치코에게 동류의식 같은 것을 느꼈고, 그녀를 멀리서 지켜보면서 감지한 그녀의 무심한 태도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해 여름 우리는 친구가 되었다. 적어도 한동안 사치코는 내게 속내를 털어놓았다. 우리가 처음에 어떻게 만났는지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 날 오후 주택가를 막 벗어나는 골목길에서 내 앞에 걸어가는 그녀의 모습을 보았던 것이 생각난다. 종종걸음을 놓는 나와 달리 사치코는 안정된 보폭으로 걷고 있었다. 그즈음 우리는 이미 서로의 이름을 알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왜냐하면 내가 다가가면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던 것이다.

사치코는 몸을 돌려 내가 다가올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어요?”

내가 조금 숨을 헐떡이며 대답했다. “이렇게 만나서 다행이에요. 조금 전 나올 때 보니 따님이 아이들과 싸우고 있었어요. 저기 물웅덩이 근처에서 말이에요.”

“우리 애가 싸우고 있었다고요?”

“아이 둘이랑요. 그중 하나는 남자아이였어요. 좀 험하게 싸우는 것 같더군요.”

“알겠어요.” 사치코는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와 보조를 맞추어 걸었다.

“당신을 놀라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아이들 싸움이라기엔 상당히 고약해 보이더군요. 사실 따님 뺨에 칼자국이 난 것 같아요.”

“알겠어요.”

“저쪽이었어요. 황무지 끝요.”

“그 애들이 아직도 싸우고 있을까요?” 그녀가 언덕을 오르면서 물었다.

“음, 아뇨. 따님이 달아나더군요.”

사치코가 나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아이들 싸움에 익숙지 않죠?”

“음, 물론 아이들은 싸우면서 크지요. 하지만 당신한테 알려 줘야 할 것 같았어요. 그리고 따님이 달려간 방향은 학교 쪽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다른 아이들은 학교 쪽으로 가던데, 따님은 강 쪽으로 돌아가더라고요.”

사치코는 대답 없이 줄곧 걸음을 옮겼다.

“사실 전부터 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어요. 최근 따님을 여러 차례 봤거든요. 혹시 따님이 무단결석을 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언덕 꼭대기에 이르자 갈림길이 나왔다. 사치코가 걸음을 멈추었다.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렇게까지 걱정해 주다니 정말 친절하시네요, 에츠코. 정말 친절하세요. 당신은 훌륭한 어머니가 될 거예요.”

전에 나는 사치코가 서른 살 정도 되었을 거라고(전차 정류장에서 그 여자가 말했던 것처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아이 같은 몸매 때문에 잘못 생각한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 들었다. 그녀의 얼굴이 훨씬 나이 들어 보였던 것이다. 그녀는 약간 재미있어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 태도에 담긴 뭔가가 나로 하여금 어색한 웃음을 터뜨리게 했다.

“이렇게 와서 말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하지만 보시다시피 지금 좀 바쁘답니다. 나가사키에 가야 하거든요.” 사치코가 말했다.

“알겠어요. 그냥 당신에게 말해 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한 것뿐이에요.”

잠시 그녀는 앞서 지었던 재미있어하는 듯한 표정으로 줄곧 나를 바라보다가는 말했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이제 실례해야겠어요. 시내에 가야 해서요.” 그녀가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더니 전차 정류장 쪽으로 올라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내가 조금 목소리를 크게 해서 말했다. “따님 얼굴에 칼자국이 나 있었어요. 강은 상당히 위험한 곳이고요. 그래서 당신에게 말하는 게 가장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녀는 몸을 돌려 다시 한 번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특별히 할 일이 없다면 말이에요, 에츠코. 오늘 하루 딸을 좀 돌봐 주셨으면 해요. 난 오후에 돌아올 거예요. 당신은 틀림없이 그 애와 잘 지낼 거예요.”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겠어요. 따님은 하루 종일 혼자 있기에는 너무 어린 것 같으니까요.”

“정말 친절하시군요.” 사치코가 다시 말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한 번 더 미소를 지었다. “그래요, 당신은 틀림없이 훌륭한 어머니가 될 거예요.”

사치코와 헤어진 나는 언덕을 내려가 주택가를 가로질렀다. 이내 우리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 넓은 황무지 앞에 이르렀다. 소녀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황무지 안으로 발을 내딛으려는 순간 나는 강둑을 따라 뭔가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마리코가 그전까지 웅크리고 앉아 있다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이제 진흙땅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꽤 분명하게 보였다. 한순간 나는 모든 일을 잊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 내 일을 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물웅덩이를 딛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이를 향해 걷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한 마리코에게 말을 건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날 아침 마리코의 행동에는 그렇게 이상한 점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결국 그 아이에게 낯선 사람이므로, 그 애는 충분히 나를 의심의 눈길로 바라볼 만했다. 내가 당시 실제로 기묘하게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면, 그것은 그런 마리코의 태도에 대한 반응이었을 뿐인지도 모른다.

강은 우기가 지난 지 한두 주밖에 되지 않아서 여전히 수위가 상당히 높고 물살도 빨랐다. 물가로 다가갈수록 바닥이 가파르게 낮아졌다. 소녀가 서 있는 비탈 아래쪽의 진흙땅은 얼핏 보기에도 다른 곳보다 훨씬 질척해 보였다. 마리코는 무릎까지 오는 수수한 면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짧게 쳐 낸 머리카락 때문에 사내아이처럼 보였다. 아이는 웃지도 않은 채 내가 서 있는 진흙 비탈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안녕, 조금 전 네 엄마와 이야기를 나눴단다. 마리코 상 맞지?”

소녀는 대답 없이 줄곧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아까는 그 애가 다쳤다고 생각했지만, 칼자국이라고 여겼던 것은 이제 보니 진흙이었다.

“넌 지금 학교에 가 있어야 할 시각이지?”

아이는 잠시 가만히 있다가 대답했다. “난 학교에 가지 않아요.”

“너만 한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야 해. 학교에 가는 게 싫니?”

“난 학교에 다니지 않아요.”

“하지만 네 엄마가 너를 이곳 학교에 전학시켰잖아?”

마리코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내게서 한 걸음 물러났다.

“조심해. 그러다 물에 빠지겠다. 바닥이 무척 미끄럽잖아.” 내가 말했다.

아이는 비탈 아래쪽에서 줄곧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은 신발이 그 애 옆의 진흙 속에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이의 맨발은 신발과 마찬가지로 진흙 속에 묻혀 있었다.

나는 마리코를 안심시키기 위해 미소를 지어 보이며 말했다. “조금 전에 네 엄마를 만나 이야기를 했단다. 네 엄마 말씀이 네가 우리 집에 가서 엄마를 기다리면 좋겠다고 하셨어. 우리 집은 바로 저기 저 건물이란다. 내가 어제 케이크를 만들었는데 가서 먹어 보지 않을래, 마리코? 그리고 네 얘기를 들려줘도 좋고.”

마리코는 줄곧 나를 주의 깊게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주저앉아 신발을 집어 들었다. 처음에 나는 그 애가 나를 따라 오려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애가 내게서 줄곧 눈을 떼지 않는 것을 보고는 달아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신발을 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난 너를 해치지 않아. 난 네 엄마의 친구란다.” 내가 신경이 곤두서서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내가 기억하는 한 그날 아침 마리코와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은 이뿐이었다. 나는 아이를 더 이상 겁에 질리게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잠시 후 몸을 돌려 다시 황무지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아이의 반응에 내심 불편해진 것이 사실이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사소한 일조차 내 마음속에서 모성애에 대한 이런저런 불안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나는 그 일은 별거 아니라고, 어쨌든 며칠 안으로 마리코와 친구가 될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과연 그로부터 보름 정도 지난 어느 날 오후 나는 다시 마리코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이전에는 한 번도 그 오두막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었으므로, 그날 오후 사치코에게서 안으로 들어오라는 말을 듣고 나는 적잖이 놀랐다. 실제로 나는 그녀의 제안에 뭔가 의도가 있다는 것을 즉각 느꼈고, 결국 내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오두막 안은 말끔했지만 삭막하고 허름했다고 기억한다. 천장을 가로지르는 나무 기둥들은 낡고 허술해 보였고, 실내에는 눅눅한 냄새가 떠돌았다. 오두막 전면에 있는 장지가 활짝 열어젖혀져 마루 안으로 햇빛이 들어오는데도 집 안 대부분이 어둑했다.

마리코는 햇빛에서 가장 먼 쪽 구석에 누워 있었다. 그 애 옆으로 어둠 속에서 뭔가 꼬물거리는 것이 내 눈에 들어왔다. 가까이 다가가자 커다란 고양이 한 마리가 다다미 위에 웅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 마리코. 나 기억나니?”

아이는 고양이를 쓰다듬던 손길을 멈추고 나를 올려다보았다.

“저번 날 만났잖아. 생각 안 나? 네가 강가에 있었을 때 말이야.” 내가 말을 이었다.

어린 소녀는 나를 기억한다는 어떤 내색도 하지 않았다. 그 애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다시 고양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내 뒤, 방 한가운데에 놓인 화덕에서 사치코가 차를 준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그녀에게 가려는 순간 마리코가 갑자기 말했다. “이 고양이는 새끼를 낳을 거예요.”

“오, 정말이니? 멋진 일이구나.”

“새끼 고양이 한 마리 데려가실래요?”

“정말 친절하구나, 마리코. 글쎄, 두고 보자꾸나. 어쨌든 새끼들은 좋은 주인을 만날 수 있을 거야.”

“새끼 한 마리 기르지 그러세요? 어떤 아줌마는 한 마리 가져가기로 했어요.”

“글쎄. 두고 보자, 마리코. 그런데 어떤 아줌마 말이니?”

“그런 아줌마가 있어요. 강 건너에서 온 아줌마가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 기르겠다고 했어요.”

“하지만 거긴 아무도 살지 않는 것 같던데, 마리코. 거긴 나무랑 숲밖에 없어.”

“아줌마가 나를 자기 집으로 데려가겠다고 했어요. 그 아줌마는 강 건너에 살아요. 하지만 나는 그 아줌마를 따라가지 않았어요.”

나는 잠시 아이를 응시했다. 이윽고 아이가 하는 말을 알아듣고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 아줌마가 바로 나란다, 마리코. 날 기억 못 하겠니? 네 엄마가 시내에 가 계신 동안 내가 너에게 우리 집에 가자고 했잖아.”

마리코가 다시 나를 바라보았다. “아줌마가 아니에요. 다른 아줌마예요. 강 건너에서 온 아줌마라고요. 그 아줌마가 엊저녁에 여기 왔어요. 엄마가 없을 때요.”

“어젯밤에? 네 엄마가 나가셨을 때 말이니?”

“그 아줌마가 나를 자기 집에 데려가겠다고 했지만 나는 따라가지 않았어요. 왜냐하면 밖이 어두웠거든요. 그 아줌마는 손전등을 들고 가면 된다고 했어요.” 아이는 벽에 걸린 손전등을 가리켰다. “하지만 나는 따라가지 않았어요. 밖이 어두웠거든요.”

내 뒤에서 사치코가 일어서서 딸을 바라보았다. 마리코는 입을 다물고 몸을 돌리더니 다시 고양이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사치코가 차를 준비한 쟁반을 들고 말했다. “우리 툇마루로 나가요. 거기가 더 시원할 거예요.”

그녀의 제안대로 우리는 마리코를 구석에 내버려 둔 채 툇마루로 나왔다. 마루에서는 강이 보이지 않았지만, 지면이 낮아지기 시작하는 지점과 물가에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축축해지는 진흙땅을 볼 수 있었다. 사치코가 방석에 앉아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저기에는 길 고양이가 많아요. 저 새끼 고양이들의 운명도 그렇게 낙관할 순 없을 거예요.”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길 고양이가 무척 많지요. 정말 안타까운 일이에요. 그런데 저 고양이는 마리코가 여기 어딘가에서 데려온 건가요?”

“아니에요. 저 고양인 우리가 기르던 거예요. 두고 오고 싶었지만, 마리코가 내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어요.”

“도쿄에서부터 저 고양이를 데리고 왔다고요?”

“오, 아니에요. 우린 나가사키에 산 지 이제 거의 1년이 다 되어가요. 시내 반대편에서 살았지요.”

“오, 정말요? 몰랐어요. 당신은 그곳에서, 그러니까…… 친구들과 함께 살았나요?”

사치코는 차를 따르던 손길을 멈추고 두 손으로 찻주전자를 든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녀의 눈길 속에서 얼마 전 나를 가만히 들여다보던 때 느꼈던 흥미로워하는 듯한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건 잘못 짚은 것 같은데요, 에츠코.” 그녀가 대답했다. 그러더니 그녀는 다시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우리는 삼촌 댁에서 지냈답니다.”

“나는 그저…….”

“예, 물론 그렇겠지요. 그러니 당황할 필요 없어요. 안 그래요?” 그녀는 소리 내어 웃고는 내게 찻잔을 건넸다. “미안해요, 에츠코. 당신을 놀릴 생각은 없었어요. 사실 당신에게 부탁할 게 있어요. 대단한 건 아니에요.” 사치코가 자기 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다. 그녀의 태도에 심각한 기미가 깃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찻주전자를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당신도 알겠지만, 에츠코, 일이 계획대로 되지 않았어요. 그래서 지금 돈이 좀 필요해요. 그렇게 많은 돈은 아니에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죠. 돈이 약간 필요하다고요.”

“이해하고말고요. 마리코를 데리고 살아가기는 무척 힘든 일일 거예요.” 내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에츠코, 내 부탁 좀 들어줄래요?”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따로 저축해 놓은 돈이 좀 있어요. 그게 도움이 된다면 기쁘겠어요.” 내가 거의 속삭일 듯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놀랍게도 사치코는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친절하시군요. 하지만 돈을 빌려 달라는 게 아니에요. 내가 생각한 건 다른 거예요. 지난번에 당신이 말한 거 말이에요. 당신 친구가 국숫집을 한다면서요.”

“후지와라 부인 말인가요?”

“그 부인에게 조수가 필요할지도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런 작은 일자리가 내게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이런, 당신이 원한다면 물어봐 줄 수 있어요.” 나는 애매모호하게 말했다.

“그렇게 해 준다면 정말 좋겠네요.” 사치코가 잠시 나를 응시했다. “하지만 잘될지 확실하진 않은 것 같네요, 에츠코.”

“그럴 리가요. 다음에 부인을 보러 가면 알아볼게요. 다만…….” 나는 다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렇게 되면 낮에는 누가 따님을 돌보죠?”

“마리코요? 그 애도 국숫집에 도움이 될 수 있어요. 꽤 쓸모가 있을걸요.”

“물론 그렇겠죠. 하지만 후지와라 부인이 어떻게 생각할지 잘 모르겠네요. 사실 마리코는 낮에 학교에 가야 하잖아요.”

“확신하건대, 에츠코, 마리코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거예요. 게다가 학교는 다음 주면 방학이잖아요. 그 애는 절대 방해가 되지 않을 거예요. 그 점은 안심하셔도 좋아요.”

내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번에 후지와라 부인을 보러 가면 물어볼게요.”

“그래 주면 정말 감사하겠어요.” 사치코가 잔을 들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며칠 내로 부인을 보러 갈 수 있을까요?”

“노력해 볼게요.”

“정말 고마워요.”

우리는 잠시 침묵했다. 내 관심은 사치코의 찻주전자에 가 있었다. 연한 빛깔의 도기로, 장인의 손으로 만들어진 좋은 물건이었다. 내가 손에 쥐고 있는 찻잔 또한 같은 재질의 섬세한 다기였다. 그렇게 사치코와 마주 앉아 차를 마시면서 나는 허름하기 짝이 없는 오두막, 진흙이 노출된 툇마루 바닥과 다기 세트의 대조적인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눈길을 든 나는 사치코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난 좋은 그릇을 쓰는 데 익숙해요, 에츠코. 알다시피 언제나 이렇게 살았던 건 아니거든요.” 그녀가 한 손으로 오두막 쪽을 가리켰다. “이런 데서 말이에요. 물론 조금 불편한 것 정도는 개의치 않아요. 하지만 몇 가지 것들에 대해서는 아직도 좀 까다롭답니다.”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치코 또한 자신의 찻잔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찻잔을 손에 쥔 채 조심스럽게 돌리면서 살펴보다가 갑자기 말했다. “사실 이 다기 세트는 몰래 가져온 거예요. 하지만 삼촌이 이것들을 아쉬워하실 것 같지는 않아요.”

나는 좀 놀라서 그녀를 바라보았다. 사치코는 찻잔을 앞에 내려놓고 손을 휘저어 파리를 쫓았다.

“당신은 그러니까 삼촌 댁에서 살았나요?”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다운 집이죠. 정원엔 연못이 있어요. 여기와는 딴판이에요.”

한순간 우리는 둘 다 오두막 안쪽을 힐긋 바라보았다. 마리코는 조금 전 모습 그대로 우리 쪽으로 등을 돌린 채 방 한구석에 누워 있었다. 아이는 고양이와 나직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동안의 침묵을 깨고 내가 입을 열었다. “난 강 건너편에 사람이 사는 줄 몰랐어요.”

사치코는 몸을 돌려 먼 강둑 위에 있는 나무들 쪽으로 눈길을 던졌다. “맞아요. 저도 거기서 아무도 본 적이 없어요.”

“하지만 마리코를 돌봐 준 분이 거기 살잖아요. 마리코는 그녀가 거기서 왔다고 했는데요.”

“난 보모 같은 건 고용하지 않았어요, 에츠코. 난 이곳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마리코 말로는 어떤 부인이…….”

“그런 말에 신경 쓰지 마요.”

“그렇다면 따님이 그런 얘기를 꾸며 냈다는 건가요?”

한순간 사치코는 뭔가 생각해 보는 듯했다. 이윽고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래요. 저 애가 꾸며 낸 얘기예요.”

“음, 아이들은 종종 그렇게 이야기를 꾸며 내죠.”

사치코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엄마가 되면 말이에요, 에츠코. 그런 일에 익숙해져야 한답니다.”

우리는 다른 화제로 넘어갔다. 그때는 우리의 우정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주로 가볍고 사소한 대화를 나누었다. 마리코가 내게 강 건너 아줌마가 왔다는 이야기를 다시 꺼낸 것은 그로부터 몇 주가 지난 어느 날 아침이었다.


2

그 당시 나카가와 구역으로 들어서면 나는 여전히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감정에 휩싸이곤 했다. 그곳은 언덕 위에 자리 잡고 있었는데, 집 사이로 난 가파르고 좁은 길들을 올라가다 보면 내 마음에는 어김없이 깊은 상실감이 차올랐다. 편안한 마음으로 가 보고 싶은 충동이 드는 곳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찾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그런 장소였다.

후지와라 부인을 방문하는 일 역시 마찬가지로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켰다. 왜냐하면 부인은 어머니의 가장 가까운 친구 중 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친절한 후지와라 부인은 그즈음 흰머리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녀의 국숫집은 번잡한 골목길에 있었는데, 콘크리트 앞마당에다 건물 천장에 덧댄 지붕을 만들고 그 아래 나무 탁자와 긴 의자를 놓아 손님들이 식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점심때나 귀갓길에는 그녀의 가게에서 국수를 먹는 회사원들이 많았지만, 다른 때에는 손님이 뜸한 편이었다.

그날 오후 나는 마음이 좀 불안했다. 사치코가 그곳에서 일하기 시작한 후 처음으로 찾아가 본 날이었던 것이다. 나는 양쪽 모두에게 신경이 쓰였다. 후지와라 부인이 정말로 보조를 두고 싶어 했는지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무척 더운 날이었고, 그 작은 골목길은 사람들로 붐볐다. 나는 일단 햇빛을 피할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스러웠다.

후지와라 부인은 나를 보고 반가워했다. 그녀는 나를 자리에 앉히고는 차를 가지러 갔다. 그날 오후 가게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어쩌면 아무도 없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사치코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부인이 차를 갖고 돌아오자 내가 물었다. “제 친구는 어떻게 지내나요? 일은 잘하고 있나요?”

후지와라 부인은 어깨 너머로 주방 출입구를 건너다보았다. “네 친구? 지금 새우 껍질을 벗기고 있단다. 곧 나올 거야.” 다음 순간 그녀는 마음을 고쳐먹은 듯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 출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사치코 상, 에츠코가 왔어요.” 안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후지와라 부인은 손을 뻗어 내 배를 어루만졌다. “이제 겉으로도 티가 나기 시작하는구나. 이제부터는 몸조심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별달리 하는 일이 없는걸요. 매일 아주 편하게 보내고 있어요.”

“좋은 일이야. 내가 첫애를 임신했을 때가 떠오르는구나. 지진이 일어났지. 상당히 큰 지진이 말이다. 그때 난 가즈오를 임신하고 있었어. 하지만 그 애는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지. 너무 걱정하지 마라, 에츠코.”

“그러려고 애쓰고 있어요.” 나는 주방 문 쪽으로 힐긋 눈길을 던졌다. “제 친구는 잘 지내나요?”

후지와라 부인은 내 눈길을 좇아 주방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다시 내 쪽을 보고 말했다. “그러기를 바란단다. 두 사람은 친한 모양이지?”

“예, 지금 사는 곳에서는 친구를 별로 사귀지 못했어요. 사치코를 알게 되어서 무척 기뻐요.”

“그래, 그것 참 다행이다.” 그녀는 거기 앉아서 한동안 나를 뜯어보았다. “그런데 에츠코, 오늘 좀 피곤해 보이는구나.”

“좀 그런 것 같아요. 무리도 아니잖아요.” 나는 조그맣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물론 그렇지. 내 말은 네가 좀 우울해 보인다는 거야.” 후지와라 부인은 내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우울해 보인다고요? 전혀 그렇지 않아요. 그저 좀 피곤한 것뿐이에요. 그거 말고는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걸요.”

“그거 반가운 말이다. 지금 너는 행복한 생각만 해야 한다. 네 아이나 미래 같은 것들 말이다.”

“예, 그럴게요. 태어날 아기에 대해 생각하면 기분이 좋아져요.”

그녀는 줄곧 나를 응시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야. 어떤 태도를 갖느냐에 따라 큰 차이가 난단다. 아이를 가진 여자는 최대한 몸을 조심해야 해. 아이를 키우려면 긍정적인 태도를 가져야 한단다.”

“음, 저는 정말이지 아이가 태어나기를 고대하고 있어요.” 내가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주방에서 요란한 소리가 들려와 다시 주방 쪽을 바라보았지만, 사치코의 모습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

후지와라 부인이 말을 이었다. “내가 매주 마주치는 젊은 여자가 있어. 지금 임신 6~7개월 정도 된 것 같아. 묘지에 갈 때마다 그 여자를 본단다. 말을 걸어 본 적은 없지만, 묘지에 남편과 같이 서 있는 모습이 무척 슬퍼 보이더구나. 아기를 가진 여자가 남편과 함께 매주 일요일을 죽은 사람을 생각하며 보내다니, 안된 일이야. 그들이 망자를 존중한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그래도 그건 좋은 일이 아니야. 그들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 해.”

“과거를 잊기가 어려워서 그러는 걸 거예요.”

“그렇겠지. 그 여자 처지가 딱해. 하지만 그들은 이제 과거가 아니라 앞날을 생각해야 해. 매주 묘지를 방문하면서 배 속에 아이를 기를 순 없다고.”

“그렇겠지요.”

“묘지는 젊은 사람들을 위한 곳이 아니야. 내가 묘지에 갈 때 가즈오가 때때로 따라 나서긴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같이 가자고 한 적이 없다. 가즈오 역시 앞날을 생각할 때가 되었어.”

“가즈오는 어떻게 지내나요? 일은 잘되어 가나요?”

“일은 잘되어 가는 모양이더라. 다음 달에 승진을 할 거라더구나. 하지만 그 애는 다른 것도 좀 생각해야 해. 영원히 젊은 채로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바로 그때 지나가는 행인들 한가운데에서 햇빛을 받으며 서 있는 아이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런, 저기 마리코 아닌가요?”

후지와라 부인이 의자에 앉은 채 몸을 돌리고는 불렀다. “마리코 상, 어디 갔다 왔니?”

마리코는 잠시 길 한가운데에 그대로 서 있었다. 이윽고 그늘이 드리워진 앞마당으로 들어오더니 우리 옆을 지나 근처의 빈 탁자 앞에 앉았다.

후지와라 부인은 아이를 자세히 살펴본 다음 불편한 기색으로 내게 눈길을 돌렸다. 그녀는 무어라 말을 하려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아이에게 다가갔다.

“마리코 상, 지금까지 어디 있었니?” 후지와라 부인은 목소리를 낮추었지만 나는 여전히 그녀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렇게 줄곧 쏘다니기만 해선 안 돼. 네 엄마가 몹시 화가 나셨단다.”

마리코는 자기 손톱만 들여다볼 뿐 눈을 들어 후지와라 부인을 쳐다보지 않았다.

“마리코 상, 제발 손님들에게 그런 식으로 말을 걸지 말아 주렴. 아주 무례한 일이란 거 모르니? 네 엄마가 몹시 화가 나셨단다.”

마리코는 줄곧 자기 손톱을 들여다보았다. 그 뒤로 사치코가 주방 문간에 모습을 나타냈다. 그날 아침 사치코를 바라보면서 전에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나이 들어 보이는 그녀의 모습에 새삼스럽게 충격을 받았던 걸로 기억한다. 긴 머리를 머릿수건으로 감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