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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일 지음

 

1판  1쇄 발행 | 2010. 8. 23

 

발행처|  Human & Books

발행인|  하응백

출판등록|  2002년 6월 5일 제2002-113호

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운동 88 수운회관 1009호

기획홍보부|  02-6327-3535, 편집부|  02-6327-3537, 팩시밀리|  02-6327-5353

이메일|  hbooks@empal.com

 

ISBN 978-89-6078-098-9  04810

ISBN 978-89-6078-096-5  (전3권)

 

[제작 : (주)한국이퍼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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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일

전남고흥 출생. 덕성여자대학교 국어국문과를 졸업했다.

1995년 《광주일보》 신춘문예에  <꿈꾸는 실낙원>이 당선되어 문단 활동을 시작했다.

2000년 《여성동아》 장편소설상에《아스피린두 알》이 당선되었다.

장편소설《불꽃섬》, 《소울 메이트》, 《도둑의 누이》,《한꽃살문에 관한 전설》, 《반야》(1, 2), 《사랑을 묻다》,

창작집《딸꾹질》, 《남녀실종지사》를 출간했다.

 

 

 


 

정인들  

물뫼협전투  

을유년가을밤  

실종 

영고제(迎鼓祭

모든것 중의 하나 

문안인사

여우샘 

어정칠월건들팔월(391년)

인연

접경지의젊은이들

서죽점

백제인

미운사람

지화합

첫날밤

황명

해후

매화가(梅花歌)

설요, 아사나

 

부록1_소설 《왕인》 주요 인물 가계도

부록2_소설 《왕인》 대백제 영토 지도

 

 

 


 

 

 

 

 

폐하의 환도와 영고제 준비로 온 한성이 들썩이는 와중에 신궁 영지인 너도섬에 도적떼가 들었다는 소문이 한성에 파다하다고 했다. 그 도적떼가 실상은 황실이 보낸 외척들의 사병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린다고 했다. 한수 가운데에 그런 섬이 있다는 것을 여누하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거니와 너도섬이 보석이며 귀금속 세공으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처음 들었다. 수백 년 전부터 백제 전역에서 사용되는 장신구들 거개가 그곳에서 만들어진다는 것이었다. 병이어멈 순기의 두서없는 수다가 답답해 여누하가 물었다.

“그래서 신궁 사람들이 많이 다쳤다 합디까?”

“다치다 뿐이겠습니까, 백여 명이 죽었다 하던걸요. 다친 사람은 부지기수고요.”

“아니 신궁에서는 그 많은 무사들 다 두고 그리 속절없이 당했대요?”

“아니요, 아씨. 속절없이 당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신궁이 왜 신궁이겠어요? 도적떼가 닥칠 것을 미리 알고 신궁무사들이 미리 들어가 있었더래요. 신궁무사들하고 너도섬에 있던 궁인들이 합쳐 싸웠대요. 죽고 다친 신궁 사람들이 많았지만 도적떼들도 백여 명이나 됐는데, 한 놈도 섬 밖으로 못 나가고 죽거나 잡혔다 하던걸요.”

“그렇대요?”

“예에, 아씨. 그래서 죽지 않고 잡힌 도적들이 시방 너도섬에 붙들려 있다 합니다. 신이궁이 아까 신시경에 너도섬으로 들어가셨다 하던걸요. 그들을 처결하러 간 것이겠지요? 검은 너울로 온몸을 감싼 신이궁이 섬으로 들어가는데 시꺼먼 옷을 입은 무절 백여 명이 한 배에 타서 배가 온통 시커멓더라고 하더이다.”

설요가 신이궁임을 여누하는 처음으로 실감하는 셈이었다. 그와 만난 횟수가 잦다고는 할 수 없지만 만나 어우러질 때면 정말 또래 동무 같고 자매 같았다. 그가 신이궁인 것을 잊기 쉬웠다.

“도적들은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괜한 살상만 일으키면서 저희들 무덤만 만든 셈이 된 것이네요.”

“신궁을 함부로 침범한 죄, 하누님을 부정한 죄를 그리 받는 것이겠지요. 아니 대체 하고많은 데 다 놔두고 하필이면 신궁영지를 범하려 했을까요?”

천신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특별히 숭배하지도 않는 여누하는 순기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자홍색으로 물들여 말린 무명을 두루마리로 감았다. 천 자락을 잡고 있던 순기가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그런데요, 아씨. 혹시 별실아씨가 신이궁님 아니세요?”

설요는 고작해야 세 차례 다녀갔을 뿐이고 때마다 여염규수 복색을 하고 왔으나 그가 풍기는 기색이 워낙 예사롭지 않은 탓에 순기가 눈치 챘는지도 몰랐다.

“신이궁이라니. 시커먼 무절을 백 명씩 거느리고 다니시는 신이궁 예하가 어떻게 내 동무가 되었겠소? 별실아씨는 원래 유리나 공주님 동무라 했잖아요. 대신집안의 따님이시라니까. 신궁에서 어멈이 하는 말 들으면 시꺼먼 무절들을 우리 집으로 보내겠소.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잘 좀 잡으세요.”

신궁무사들이 쳐들어오겠다는 말에 순기가 어깨를 으쓱하며 웃었다. 그는 송산집에서부터 안살림을 관장해왔다. 별실아씨가 신이궁임을 알아도 모르는 체, 속아줄 것이었다. 여누하도 어깨를 으쓱하며 주름이 생기지 않도록 천 자락을 힘써 감았다. 근래 여누하는 짐승의 가죽을 대신할 겨울 옷감을 궁리하는 중이었다. 무명 등의 직물 사이에 종이를 만드는 닥나무 수피를 넣는 것이 어떨까 모색하고 있었다. 닥나무 수피를 종이처럼 얇게 뜨는 것이 아니라 두툼하고 질기게 부풀려서 옷감 사이에 넣은 뒤 촘촘하게 누벼 바느질을 한다면 보온성 높은 옷감이 되지 않겠는가. 그리 되기 위한 관건은 닥나무나 백화 같은 나무의 수피에 달려 있었다. 이구림과 월나악 일대에는 닥나무가 무성했다. 구림 네 마을에서 종이를 생산하는 것도, 이구림이 종이 생산지로 유명한 것도 닥나무 덕분이었다.

“아씨, 전하께오서 납시셨나이다.”

후원으로 들어와 태자의 소식을 전하는 집사 유술의 목소리가 사뭇 조심스러웠다. 익숙해질 법도 한데 태자가 나타날 때마다 가솔들은 숨이 막히는 듯 굴었다. 순기가 두루마리를 안고 태자가 오는 반대방향으로 달아났다. 또 취해 왔을까. 여누하가 뇌까리는데 바깥마당에 호위들을 두고 단신으로 후원까지 들어온 그는 취해 있지 않았다. 여누하는 인사말 대신 그를 향해 허리를 짐짓 깊이 수그렸다. 심심풀이로 몇 차례 찾아오다 말려니 했더니 심심이 그치지 않는지 그는 반년이 넘도록 찾아왔다. 찾아와서는 하릴없는 말 몇 마디를 나누거나 차 한 잔 마시고 갔다.

“여누하!”

태자의 부름에 여누하는 한껏 수그렸던 몸을 펴서 그를 바라보았다.

“그대가 폐하의 대장군 사루사기의 따님이라는 것을 왜 말하지 않았지?”

둔한 태자였다. 무심하거나 세상사에 무관심한 것도 있을 것이나 그의 의욕 없음에서 비롯된 둔함이었다.

“그에 관하여 전하께서 저에게 하문하신 적이 없나이다.”

“하여도 미리 말해 주었다면 좋았잖아.”

“미리 말씀드리었다면 소인을 모른 체하실 수 있으셨겠습니까.”

“어떤 경우에 그대를 모른 체할 수 있는지 나는 몰라. 나는 그대를 모른 체할 수 없다는 것만 분명할 뿐이지.”

“그리 마시고, 길가에 핀 꽃 지나치신 듯 지나가시어요.”

“그리할 수 없다는 것을 내 처음부터 말했지 않아? 이제금 그대가 사루사기 장군의 따님이라 하여도 그대를 모른 체하기에는 늦었어. 어쨌든 미리 말해 주었더라면 좋았을 것이야.”

“말씀을 드렸든 아니 드렸든 똑같을 것이라 하시면서, 왜요?”

지금쯤 월나군 이구림에서 벌어졌을지도 모를 난리에 대해 여누하는 모르는 것 같다. 알았다면 벌써 이구림에 가서 그곳 사람들과 함께 침입자들에게 맞서고 있을 터였다. 부여벽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태자도 몇 시간 전에야 겨우 내두좌평의 사병들이 이구림을 치러 남하했다는 걸 알았다. 여누하가 월나군이 본향인 사루사기 장군의 딸이며 왕인의 누이라는 걸 알려준 사람은 태자비였다. 태자비는 태자가 새로운 여인을 찾아다닌다는 소문을 뒤늦게 듣고 그 연원을 캤던 것이었. 캘 만큼 캐놓고도 내색치 않고 벼르고 있다가 마침내 오늘 아주 고소하다는 듯이 진수림의 사병들이 그곳을 치러갔다는 사실을 말했다. 아니 악에 받쳐 외쳤다.

—제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으매 그 어린 계집이 전하를 퍽이나 좋다 하겠구려? 어디 한번 계속해 보시어요. 그 계집이 제 집과 혈육들을 지워버린 전하를 여전히 곱다 할지 두고 보면 알겠지요. 하여도 전하가 곱다 하면 그리 속없는 계집, 제가 직접 전하의 후비로 모셔오지요. 아이고 열일곱 살? 아사나가 열다섯 살이오. 자식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으시오?

지금까지 태자는 황후며 태자비가 하는 모든 일들을 의당 그러려니 내버려두어 왔고 관심도 없었다. 처음으로 관심이 생겼는데 관심 정도가 아니라 분노했다. 대체 무슨 명분으로 고요히 사는 호족들을 친단 말인가. 더구나 월나 사씨 일족은 소야황비의 친가가 아닌가. 우현왕 부여부의 외가이매 그들은 이미 황족이었다. 황족이면서도 황족 행세 하지 않고 살아가는 유일한 집안일 터였다. 미추홀 정씨 일족과 신궁을 친 일도 마찬가지였다. 폐하의 환도가 가까워진 즈음의 이러한 처사는 폐하를 능멸함에 다름 아니지 않는가. 모후의 전횡이 도를 넘고 있었다. 전횡은 일순간의 힘을 과시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훗날에는 반드시 자신에게로 그 칼날이 되돌아오는 법이었다.

신궁 영지에서 일어난 사태를 보자면 훗날까지 갈 것도 없었다. 온 한성에 황실이 신궁을 쳤다는 소문이 짜하니 퍼졌다고 했다. 소문을 낸 측은 물론 신궁일 터. 실상을 알려 황실의 폭력에 맞서고 있는 것이다. 황실이 신궁을 침범했다는 사실은 백성들의 마음에 생채기를 낼 것이고 황실에 대한 반감으로 드러날 것이었다. 모후께서 그렇게 하기까지 태자인 나는 무얼 하며 지냈던가. 태자가 분노하는 까닭은 그것이었다. 황제를 대신해 본국을 통치할 좌현왕의 권위를 가졌으나 태자는 허수아비였다. 태자를 허수아비로 만든 사람은 모후와 외척들이었다. 근래 들어서는 태자비도 덩달아 설쳤다. 분노가 일었고 넌더리가 났다.

와중에도 여누하를 어찌 보나 근심했다. 여누하가 아직 월나에서 일어날 일을 모르고 있으니 다행이긴 한데 영원히 모르는 채 지나갈 수 없을 터였다. 그걸 알고 나서도 여누하가 나를 보려 할 것인가.

“그대의 형제 왕인은? 한 번도 마주친 적 없는데, 예서 사는 게 아니라 딴 데서 사는 것인가?”

“바깥채에 함께 사는 식구가 있다 말씀드린 적 있지 않나이까?”

“형제라고 말하지 않았잖아? 여하튼 그는 어디 있는데?”

“영고제 때문에 태학이 쉰다 하더니 어디 갔나 보옵니다.”

“홀몸으로?”

“시위가 한 명 있지요.”

“시위 하나를 달고 어디를 가는데?”

“그는 천생 책상물림으로 집에 들면 방 안에서 책만 파고 사는데, 때로 한 번씩 바람같이 나가서 며칠씩 돌아오지 않기가 잦습니다. 이번에도 그러는가 보다 여길 뿐 어디 갔는지 저는 모르지요. 간다 온다 말하는 법이 없는 사람이라서요. 벌써 닷새째 귀가치 않는 참이랍니다.”

“원향에 갔을까?”

매를 자청하듯 떠보는 것이었다.

“원향에 갔다면 간다 말했을 것입니다. 어마님, 어머니께 문안편지라도 쓰라 했을 것이고요. 원향에 간 것이 아니라 북쪽 어디 풍광 좋은 곳을 달려 다니고 있지 않을까 싶나이다. 그저 돌아다니기를 은근히 즐기는 사람이라서요.”

“며칠 내에, 내일이라도 부친께서 환도하실지 모르는데 집을 비우고?”

“그 전에 당연히 귀가하겠지요. 그가 지아비가 아니라 형제인 걸 다행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지아비가 그리하면 얼마나 밉겠어요?”

“지아비가 그리하면 미운가?”

“밉지, 곱겠습니까? 그나저나 잠시 안으로 드시겠나이까?”

“왜?”

“바람이 차지 않습니까? 오늘 밤에라도 첫눈이 내리지 않을까 싶은걸요.”

“난 또, 내게 방 한 칸 주겠나 싶었지.”

“농담을 재미없게 하십니다.”

“농 아니야. 그대 방에 못 드니 그대 옆방이라도 들고 싶어.”

폐하의 대장군 사루사기가 돌아오면 태자는 이 가부실에 찾아오기 힘들 것이다. 태자비의 악다구니가 가슴이 맺혀 있었다. 아이고, 열일곱 살? 아사나 공주가 열다섯 살이매, 자식들 보기에 부끄럽지 않소, 했다. 자식들 앞에 부끄러운 줄은 모를지언정 대장군에게는 부끄러울 듯했다.

“농 그만 하시고, 들어가시어 따뜻한 차 한 잔 하시어요.”

“저녁때가 다 되어 가는데, 밥을 주겠다고 해야 하지 않아?”

“전하의 진지상을 차릴 만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나이다.”

“그대가 먹는 대로 나도 먹을 터이니 밥이나 한번 먹여주지 그래?”

그는 서너 걸음 저만치서 태사혜를 신은 발로 땅바닥을 긁고 있었다. 허락을 기다리며 자신도 모르게 그리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 아이 같은 그 때문에 설레는 건 아니었다. 서비구를 그리워하고 그 때문에 설레고 그에게 닿고 싶은 간절함이 태자에겐 생기지 않았다. 듬직하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가끔 태자를 기다렸다. 그가 다녀간 지 며칠 지났나 따져보고 그가 보름을 넘기지 않고 찾아오는 걸 당연하게 여겼다. 태자가 와서 찻잔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때는 재미났. 언젠가 황제가 될 서른두 살의 그가 열일곱 살짜리 계집애를 만지고 싶어 절절 매는 걸 보면 귀여웠다. 그리 만지고 싶음에도 계집이 허락지 않으니 손대지 못하는 그가 안쓰러웠다.

“전하, 재미 삼아 큰나루 저잣거리 구경이나 가시렵니까? 거기 귀부객점이 제일 좋다는데 게서 저녁을 사먹어 보면 어떻겠사와요? 백성들의 말도 들어보고요.”

“밥을 사먹는다고?”

“그리해 보신 적 없으시지요?”

상상해 본 일도 없었다. 태자가 가는 곳은 곧 황궁이었다. 바람처럼 아무 데로나 내달아 가도 그곳엔 이미 필요한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었다.

“밥을 사먹으려면 돈이 있어야 하지 않아? 나는 돈이 없는걸.”

여누하는 하하, 웃었다. 자신이 얼마나 귀여운지 태자 스스로는 모를 터였다.

“제가 돈을 벌지 않습니까? 제가 한 끼니 사 드리겠나이다. 가시렵니까?”

“음.”

“하오면 소인이 준비해 나올 터이니 전하께오선 측위들에게 한참 뒤에서 일행이 아닌 듯, 뒤를 따르라 명해 놓으시어요. 태자가 측위대를 거느리고 나타나시면 저자가 저잣거리가 아니라 쑥대밭이 될 게 뻔하지 않나이까?”

태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누하가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바깥마당으로 나온 태자는 측위대장에게 말했다.

“큰나루 저잣거리로 갈 것이로되 여누하와 함께 갈 것이니 너희들은 눈에 띄지 않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무엇이든 여누하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좌현왕이며 태자라는 신분, 사내라는 성별, 열다섯 살이나 더 먹은 나이가 쓸모가 없었다. 그런데 그리되는 게 감질나게 좋았다. 여누하는 자신이 얼마나 어여쁜지 아는 듯했다. 제 어여쁨이 발휘하는 힘을 잘 아는 것 같은 것이다. 사내를, 그 사내가 일국의 태자라 할지라도 애태우고 조정하지 않는가. 무엇이든 여누하가 고개를 저으며 안 된다고 하면 아닌 것이었다. 그걸 알기에 그가 원하지 않는 것은 할 엄두를 못 냈다. 그런데 그게 매정한 거절로 느껴지지 않고 귀여웠다. 애가 탔다. 보이느니 여누하뿐이게 되었다. 여누하가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주고 싶었다. 다 줄 수 있을 듯했다. 그런데 여누하가 원하는 것은 저잣거리에 나가 밥을 먹자는 정도뿐이었다.

“전하, 큰나루 저잣거리는 이 시각 즈음에 한성에서 가장 붐비는 곳이옵니다. 온갖 배가 들어와 있을 뿐더러 한성의 백성들이 동시에 움직일 시각입니다.”

“그래서 가보려는 것이야. 백성들이 어찌 사는지 보려고. 신궁이 침범 당한 것에 대해 백성들이 어찌 말하고 있는지 나가 들어볼 참이야. 헌데, 과인이 태자입네, 나타나면 백성들이 놀라지 않겠느냐? 무슨 말을 들을 수 있겠어? 그러니 너희들은 내가 태자임을 모르게 움직여야 할 것이다.”

여누하를 찾아다니면서 속이 뻔히 보일 변명이 늘었다.

“전하, 차라리 다목행궁으로 납심이 어떠하시올지요. 말씀하신 대로 큰나루에 전하께오서 납시게 되면 저자가 소란스러워질 것이옵니다.”

“그러니 내가 태자인 걸 백성들이 모르게 가겠다는 것 아니냐? 아, 그리고 다목행궁에도 연통을 하여 두어라. 혹여 건너갈 수도 있으리라.”

상전의 내심을 읽은 측위대장이 물러나 호위 방법을 모색하느라 부산을 떠는데 여누하가 나왔다. 머리 뒤로 감아올리고 있던 머리채를 한 줄로 땋아 늘어뜨리고 회색 바탕에 분홍빛 화장으로 배색된 외투를 걸친 매무새가 새색시인 양 어여뻤다. 태자는 여누하를 안아 자신의 말에 태웠다. 한 사람이 앉을 안장에 두 사람이 앉자니 앞자리에 앉은 여누하를 바싹 당겨 안을 수밖에 없었다. 여누하를 만난 지 일곱 달 만에 처음으로 안아보는 것이었다. 여린 향취를 풍기는 여누하의 몸은 태자의 품에 쏙 들만치 아담했다. 며칠 후면 이 몸을 끝내 안지 못하고 여누하에게서 영원히 밀려날지도 몰랐다. 그때는 어찌할 것인가. 지금은 알 수 없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오늘은 월나에서든 미추홀에서든 일어날 일들에 대해, 여태 그러했듯이 허수아비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체하는 것이다.

 

 

 


 

 

 

 

 

월나군에 이웃한 물아혜군은 마한 시절 구소국(狗素國)이었다. 선황인 태수황제 즉위 초엽에 본국 황실에 의해 무너지고 백제의 물아혜군이 되었다. 구해국보다 오래 버텼던 구소국의 왕족들은 나씨였다. 발라 불미국의 백씨들이 그러했듯 나씨 일족도 멸족을 당했다. 현재 물아혜군에는 나씨 성을 쓰는 사람이 없었다. 살아남은 나씨들이 성을 버렸기 때문이었다. 성을 버린 채 그들은 백제 백성으로 순하게 살았다. 외양은 그러하나 속내까지 모조리 백제 백성인 것은 아니었다. 사루 일족이 그렇듯 그들도 안으로는 자신들의 구소국을 품고 있었다. 구소국을 품은 그들과 이구림은 내내 상통해왔다.

물아혜군 우산곶나루에서 한성군의 배 두 척이 포착되었다는 봉화가 올랐을 때 그들을 맞을 이구림 수비대는 이미 물뫼협 쪽에 나가 있었다. 초경 초시 즈음이었다. 담로성 병사들의 움직임은 알아내지 못했다고 하였다. 아직까지 특별한 움직임 없다는 것이었다. 한성군과 담로성은 연통하지 않았거나 연통했으되 한성군이 물뫼나루에 도착한 뒤 연합을 모색할 듯했다. 만약 그들이 함께 움직이기로 했다면 왕인과 솔재와 수비대장의 예상이 들어맞는 것이었다. 연통했어도 따로 움직일 경우를 대비하여 이구림 일대의 아녀자들과 노인들 거지반은 피리산 은하곡이며 월나악 모둘곡 쪽으로 피신하였다. 이구림과 포구 일대에는 수비대와 오늘 밤 수비대가 된 이들만 남았다. 그중에는 젊고 씩씩한 부녀들이 이백여 명가량 속해 있었다. 수비군을 뒷전에서라도 돕겠다고 자원하여 남은 여인들이었다. 다님 부인은 쉰 살이 가까워 중늙은이였으나 피신치 않았다. 오늘 밤이나 내일 사이에 적을 막아내지 못한다면 어차피 이구림이 스러질 것인데 스러진 이구림과 상대포상단의 단주가 무슨 소용이 있으랴. 다 함께 막으면 백다님도 살 것이요, 다 함께 막았음에도 당해내지 못해 이구림이 스러진다면 단주도 스러질 것이었다.

다님이 피신치 않으니 버들도 피신치 않았고 영사와 월이를 비롯한 시녀 일곱 명이 남았다. 아이들은 물론 젖먹이가 달린 시녀 두리며 나이 든 가솔들은 다님이 명하여 피신시켰다. 다님이 피신치 않은 또 하나의 까닭은 보륜사가 월나악에서 편찮은 몸을 이끌고 내려온 탓이었다. 더불어 이구림 최고 어른인 사고흥도 내려왔다. 월나악 젊은이들을 먼저 내려 보낸 두 노인이 야행 나선 신선들마냥 이림으로 들어선 게 달이 훤히 떠오른 술시 중경이었다. 지품과 신야와 아직기 두 노인을 수행하고 있었다. 다님은 두 노인께 때늦은 저녁을 차려 올리게 하였다. 사고흥의 처소였다. 일흔 중반의 두 노인께서 밥보다 반주로 올린 백화주(百花酒)를 음미하며 좋아하셨다. 배석한 다님의 마음도 따뜻했다. 두 어른의 잔을 다시 채워드렸다. 술잔을 받던 보륜사가 말했다.

“수십 년 동안 다님 단주 덕에 편히 잘 살았소. 고맙소이다.”

“무슨 그런 말씀을 하시나이까. 스승님께서 이리 기동하신 걸 뵈오니 든든하고 따뜻하옵니다. 부디 강건하시어요. 숙부님께서도요.”

사고흥이 술잔을 비우고 나서 빈 잔을 다님에게 건네고는 술병을 들어 따라주었다.

“보륜의 말씀이 맞소. 나야말로 단주 덕에 말년을 유유자적 잘 보냈소. 말년뿐이겠나. 평생 그러했지. 고맙소.”

“두 분 말씀에 오늘 밤 소란에 대한 걱정이 심히 깃드셨나이다. 몹시 소란키는 하오나 이 밤을 너끈히 넘길 것이오니 심려들 마시고 어서 젓수시어요.”

다님이 사고흥이 따라준 술을 들이키고는 그 잔을 채워 보륜사에게 건넸다. 두 노인에게 걱정들 마시라 했으나 그들의 어투에 생애 마지막 순간에 대한 예감이 서려 있음을 느꼈다. 오늘 밤이 아니라도 두 어른과 다님이 이렇듯 마주앉아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할 기회가 오기는 쉽지 않을 터였다. 다님에게도 오늘 밤이 생애 마지막 밤일 수 있는 것이다.

“하옵고, 내일이나 모레쯤 월나악으로 새로 지은 두 어르신의 의복을 보내려 하던 참이니 진지들 드시고 난 뒤 갈아입으시고 바둑돌이나 두고 계시어요.”

다님의 말에 보륜사가 흡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리하리다. 헌데 단주! 우리 두 늙은이가 느릿느릿 어칠비칠 산을 내려오다 논쟁을 벌였는데 말이오, 《효경(孝經)》 <응감장(應感章)>에 대한 것이었어요. 응감이란 문자 그대로 지성이면 반드시 천지신명에 통하여 저절로 신력이 현현하고 응감작용이 행해져 효험이 나타난다는 것이지요. 덕이 뛰어나기로 자자했던 명왕(明王)이 효란, 부모 섬김을 하늘과 땅과 선조의 영을 동시에 섬김과 같아서 반드시 응감의 복을 받게 된다고도 했어요.”

“예, 스승님.”

“서고에 가면, 맨 안쪽 가장 왼측 서가의 하단에 대나무 쪽편으로 엮인 옛 《효경》 필사본 두 책이 있을 거요. 육십여 년 전에 나와 고흥이 간고(簡古)본 《효경》을 가지고 다투다가 다투지 말고 아예 필사를 하자 담합하여 필사했던 두 책이에요. 그리해서 각기 필사한 두 책을 가지고 당시 우리들의 스승 한얼 님께 보여드리면서 누가 잘 썼는지 보아주십사 했더니 스승께서 대번에 고흥의 책이 정확하여 보기에도 읽기에도 좋다 하셨어요. 내가 그때 심히 상심하여 글공부를 걷어치우고 어중이떠중이 어설픈 칼잡이가 되고 말았지 않았겠소?”

“그러셨나이까?”

다님이 비식 솟는 웃음을 슬쩍 내비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랬소. 헌데 나는 육십여 년이 지났어도 그때 스승님의 판결에 승복이 안 된단 말이에요. 내 자부하건대 그때나 지금이나 내 필체가 고흥보다 분명히 낫거든.”

“그놈의 억지는 육갑 년이 지나도 똑같구먼. 저승까지 지고 갈 텐가?”

사고흥이 웃으며 보륜사를 약 올렸다.

“저, 저, 늙은이 웃는 것 좀 봐. 내 평생 저 인사의 저 웃음에 가슴에 멍이 들었어.”

“전혀 멍드신 것 같지 않나이다, 스승님.”

“아니야, 멍들었어요. 멍울이 가시질 않아. 해서 말이요, 단주. 서고에 수하들을 보내어 그 두 책자를 찾아오게 하시구려. 우리 앞에서 단주가 그걸 다시 판가름해 달라 이 말씀이에요.”

“아이고, 스승님, 그건 제가 못하옵니다. 그리 어려운 일은 제게 시키지 마시어요.”

“하여튼 가져오라 하세요.”

“현재 수하들 중에, 서고 내 수천 권의 간고 책자들 중에서 그걸 찾아올 사람이 없나이다. 아, 지품과 신야를 불러 찾아보게 해야겠습니다.”

“그리하시던지.”

다님은 영사에게 지품과 신야를 찾아보라 했다. 지품은 집사 자승진의 손자로 이림에서 태어났다. 아홉 살에 운무대로 올라가 스물네 살이 된 지금은 도비와 더불어 학동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영사가 그의 지어미였다. 신야는 도비 선생의 아들이었다. 스물세 살로 시녀 월이가 그의 지어미였다. 도비 선생의 손자 장자기는 네 살인데, 오늘 밤 제 어미 월이가 피신치 않았으므로 지금은 제 할머니와 함께 모둘곡으로 들어가 있었다.

“단주님, 지품이 아니 보입니다. 신야도 아니 보이구요. 포구로 나간 듯하옵니다.”

영사가 문밖에서 아뢰었다. 다님은 두 어른의 잔에 술을 따랐다.

“지품이나 신야가 있어도 그 책을 대번에 찾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내일이나 모레까지 기다려 주십시오. 누왕인이 서고 안의 모든 것에 빠삭하니 그 아이에게 시키지요.”

“우리는 그걸 해결해야 오늘 밤 잠이 편할 듯하단 말이에요. 수하들이 아니 된다면 단주가 잠시 다녀오시면 되지 않겠소?”

망령이 들 노인들도 아니신데 왜들 이러실까. 지금 당신들께서 어린 시절에 장난하듯 만든 대쪽 책을 거론하실 때인가, 하면서도 노인들의 어린애 같은 유유함이 긴박한 상황을 누그러뜨려 주는 것 같아 다님은 맘이 따스하였다. 두 어른의 한가하심은 오늘 밤의 사태가 무난히 넘어가리라는 것에 대한 예시가 아니겠는가.

“하오면 천천히들 드시고 계시어요. 금세 찾아오겠나이다. 찾아오긴 하겠사오나 저에게 그 두 책의 품격의 고하를 판결하라 하지는 마시어요.”

“단주가 그런 것도 하셔야지.”

“단주는 장사나 배웠지 그런 것은 배우지 못한 탓에 행하여 본 적도 없습니다. 내일 누왕인에게 시키도록 하지요.”

“아무튼지 찾아와 보시구려. 그담에 그걸 보면서 다시 의논해 봅시다.”

다님이 하는 수 없이 사고흥의 처소를 나왔다. 영사에게 등불을 들려 서고로 향했다. 달이 둥그렇게 솟긴 했으나 밤공기가 몹시 찼다. 이렇게 추운데 바닷물 속에 어찌들 들어갈꼬. 다님은 옷깃을 여미며 오늘 밤 바닷물 속으로 잠수해 적들을 맞이할 젊은이들을 걱정했다.

“서두르자.”

다님은 영사를 채근해 서고로 급히 걸었다. 서고는 이림학당 후원 언덕바지에 있었다. 이림 내의 전각들에는 편액을 달지 않았다. 역시 편액이 없어 앞에서 보면 낮은 지붕의 평범한 와각으로 보이는 서고는 뒤편에서 보면 이층 와옥으로 월나악 자락에 면한 정원을 따로 거느리고 있었다. 돌아가신 사루한소의 처소 허허당(虛墟堂) 이웃 건물이기도 했다. 밖에서 어지간한 소란이 일어나도 들리지 않을 만큼 아늑한 곳인 이림서고는 혹시 일어날 수도 있을 사태에 대비한 사루들의 피난처이기도 했다. 허허당은 사루한소가 돌아간 뒤 이 년여 동안 빈 채였다. 루사기는 부친의 서거에 즈음하여 잠시 다녀갔을 뿐이고, 왕인은 제 어린 날부터의 처소를 그냥 썼다. 다님은 이림학당 뜰에 연결된 서고 앞문을 두고 후원 쪽으로 돌아가 후문을 열었다. 앞문에 완강한 덧문이 닫힌 탓에 여닫기 손쉬운 뒷문을 택한 것이었다.

“단주님, 내일은 학당이며 서고가 평시대로 열리겠지요?”

영사의 질문에 다님이 아무렴,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영사가 그렇듯 스스로 수긍함으로써 믿는 것이었다. 등불 한 점 들고 서고에 들어서니 책자를 빼곡히 품은 서가들이 어둠 속에서 불빛이 닿은 만큼의 모습을 드러냈다. 이림학당의 선생들이며 학동들도 수시로 드나들지만 왕인은 어린 날 노상 이곳에서 살았다. 근자에도 이림에 돌아오면 절반의 시간은 서고에 들어와 지냈다. 책자들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고 읽지 못했던 책을 읽거나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며 그 책들 묻혀 있었다.

왕인이 태어나기 전, 젊은 날부터 다님은 상대포를 드나드는 선주들에게 흔히 부탁했다. 새로운 책, 귀한 책을 만나거든 사다 주시오. 다님뿐만 아니라 선대로부터 그렇게 해왔다. 루사기도 이림에 돌아올 때마다 책권들을 구해오곤 했다. 그렇게 모인 책자들이 이만여 점이었다. 이만여 권의 책자들 중에서 간고한 책이 삼분지 일이었다. 그중에서 보륜사와 사고흥이 필사한 책자 두 본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다님은 서고 안쪽으로 깊이 들어가 영사가 비춰주는 등불에 의지해 두 사람이 쓴 책을 어렵사리 찾아냈다. 이백여 조각씩은 될 법한 서죽들이 둘둘 말린 채 가죽끈에 묶여 있었다. 여린 빛 속에서도 먼지가 풀썩였다. 부피가 제법 되었으므로 다님은 두 책을 영사에게 안게 하고 스스로 등을 들었다.

“어서 가자.”

바삐 후원쪽 문 앞으로 다가섰더니 웬일인지 문이 닫혀 있었다. 밀어보니 바깥에서 잠긴 상태였다. 안문, 덧문이 모두 잠긴 것이다. 갇혔다는 사실을 깨닫자 다님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월나악 쪽으로 난 출구를 지니고 있는 지하서고가 떠올라 다가들어 보니 언제나 열려 있는 바닥문이 밑에서 잠긴 듯 완강했다. 둘이서 함께 들어 올리려 기를 써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다님은 지하서고를 포기하고 앞문으로 갔다. 앞문은 원래 거의 잠겨 있기 마련이었다. 다가가 열어보니 역시 앞문은 굳건히 잠겨 있었다. 다님이 탕탕탕, 문을 두드렸다. 영사가 책들을 내려놓고 함께 문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바깥에 그 소리를 들을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후원쪽 문으로 돌아와 다시 문을 두드렸다. 완강히 닫힌 문은 다님의 손만 아프게 하였다. 수십 차례 문을 두드리느라 손이 부었을 때 문득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주님, 저 지품입니다. 보륜사께서 서고의 문을 잠그라 명하시어, 불가피하게 단주님을 서고 안에 모시었습니다. 오늘 밤은 불편하시더라도 그 안에 계시옵소서. 내일 아침 즈음, 새벽에라도 모시러 오겠나이다. 밤새 무탈하소서. 그리고 영사, 단주님을 잘 모시도록 해요.”

“이봐라, 지품. 문을 열어라. 내가 시방 이 안에 있을 한가한 계제가 아니다.”

다님의 외침에 또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기였다.

“어마니, 추우시면요, 종이책을 전부 내려서 바닥에다 까세요. 지하서고 문이랑 다 잠겨 있으니 괜히 헛손질하시지 마시고요. 이따 모시러 올게요, 어마니.”

“안 된다, 아가. 직기야! 문 열어라. 영사야, 저 사람들을 좀 불러라.”

다님과 영사가 동시에 소리쳤지만 밖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출입구는 앞뒤의 두 곳뿐이었다. 벽면 아랫부분에 손바닥만 한 통풍구들이 있고, 윗부분에 책자 크기만 한 조광창들이 일정하게 나 있으나 이 밤에는 문이란 문들은 모조리 꼭꼭 잠긴 상태였다. 손에 든 등불이 몹시도 밝다 싶은 순간 등불이 비지직 꺼졌다. 눈앞이 캄캄했다. 노인들의 모의에 의해 서고에 갇힌 것이었다. 숨이 막힐 듯했다. 직기는 겨우 열두 살이었다. 열다섯 살 아래의 아이들은 모 대피시킨 참이었다. 다님은 어둠 속에서 숨을 골랐다. 소리쳐 나갈 수 없다면 생각을 해야 했다. 방법을 따로 강구해야 하는 것이다.

 

바람이 잔잔함에도 시월 열나흘의 밤공기가 싸늘했다. 보름을 앞둔 달빛이 해수면 위에서 희게 흔들렸다. 왕인의 마음이 떨렸다. 추위 때문이 아니었다. 오늘 밤 죽지 않고 살아난다면 저들 육백여 명을 죽인 결과였다. 저들을 죽이기 위해 이구림 사람이 얼마나 죽을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그걸 결정한 사람은 왕인이었다. 몇 명이 스러지든 살인을 시작하였으므로 이전과 같은 사람일 수는 없을 것이었다. 옳다고 믿고, 부득이하다 믿고 하는 일이매 앞으로의 살인에는 매번 그와 같은 믿음이 작용케 될 터였다. 그 사실이 수면의 물결처럼 느껴져 떨리는 것이다.

“저들이 물뫼협으로 들어섰습니다.”

곁에 선 서비구의 낮은 말소리도 떨리는 듯했다. 선두(船頭) 왼켠에 선 왕인에게도 보였다. 달빛 아래 상선인 양 돛을 내린 채 유유히 들어서는 두 척의 큰 배. 노잡이가 오십여 인씩은 될 배였다. 한 척에 탄 사람이 사병 삼백여 명씩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배의 맨 아래 칸에서 명에 따라 노만 젓는, 선노 오십여 명씩도 있었다. 육백이 아니라 칠백이었다. 그걸 이제야 깨닫다니.

“서비구!”

“예.”

“육백이 아니라 칠백이었어.”

“선노들을 말씀하시는 것이로군요.”

“그걸 미리 생각했었어?”

“아니오, 소군. 말씀 듣기 전까지 저도 생각해 본 적 없습니다. 모든 배에 승선인원을 셀 때 선노들은 포함되지 않지요.”

이구림의 모든 배들에는 선노들이 없었다. 선부들이 곧 노잡이들이었고 수비대였다. 해서 선노들의 존재를 떠올리지 못한 것이다.

“그들도 사람이잖아.”

“그렇지요.”

칠백여 명. 그들과 싸울 이구림 사람은 육백여 명이었다. 선노들을 미리 떠올렸다면 백여 명을 더 뽑았을까. 모를 일이었. 같은 바다에서 맞닥뜨렸으므로 이 순간 그들과 왕인의 운명은 외줄로 연결되어 있었다. 운명의 줄이 어느 쪽으로 당겨질지는 왕인도 알지 못했다. 모르는 채 바라보기만 할 수는 없어서 상대포구에서 나가는 상선을 가장한 이림호(爾林號)에 올랐다. 저들 뒤쪽으로도 상선을 가장한 구림호(鳩林號)가 따를 터였다. 구림호는 피리산에 바싹 붙어 숨어 있다가 저들이 물뫼협에 들어선 순간 따르기로 했다. 수비대장이 구림호를 지휘하고 있었다. 저들이 물뫼 여울목에 이르면 물살을 당하지 못하여 피리산 해안 쪽으로 붙어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물뫼여울목을 미리 알고 피하든 물살을 당하지 못하여 어쩔 수 없이 비켜서든 해안 쪽으로 다가들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공격 신호는 수비대장 대만이 구림호에서 내릴 것이었다. 그에 앞서 솔재가 잠수부들을 바다로 들어가게 할 터였다. 이림호는 운무대에서 내려온 도비 선생이 지휘했다. 보륜사를 대신하여 운무대를 이끌고 있는 도비는 열다섯 살 미만의 학동들을 제외한 오십여 명의 수련생들을 이끌고 해질녘에 이림에 당도했다. 수련생 삼십 명을 수비대 일백, 임시 수비대 이백 명과 함께 이림과 포구에 두고 나왔다.

“구림호가 나왔습니다.”

구림호가 해협으로 들어섰을 뿐만 아니라 빠르게 움직여 적선으로 다가드는 참이었다. 그걸 알아본 도비가 이림호의 노잡이들에게 노를 빠르게 저으라 명했다. 전투를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았기에 이구림과 포구에 내재되어 있던 물자들이 필요한 대로 모두 끌려 나왔다. 삼백 개의 유황탄과 천여 발의 불화살이 만들어졌다. 적선이 해안 쪽으로 접근하면 바다 속으로 들어가 적선의 노들을 얽어맬 닻줄들이 준비되었고 잠수해 들어갈 장정들이 선발되었다. 그들이 피리산 단구(斷丘) 쪽에서 당주 솔재의 지휘 아래 대기 중이었다.

여울목에 이르러 부표처럼 기우뚱대던 적선들이 물살에 밀려 피리산 단구쪽으로 뱃머리를 트는 게 보였다. 아울러 두 척의 배의 불이 밝아졌다. 어둠 속에서 불을 밝히매 자신의 위치를 보기 힘들므로 서로에게 불빛을 밝혀주고 있었다. 강채라는 사병대장이 몹시 치밀한 성격이고 적산이라는 부대장이 책사 노릇을 할 만한 인물이라더니 서비구의 파악이 정확했다. 그런 대장들이 지휘하는 저들의 배에 어떤 무기들이 준비되어 있을지는 알지 못했다. 중거선에 삼백여 명이 타 닷 만에 도착했으니, 석탄차나 화탄차 등 무거운 무기들이 대거 실려 있지 않을 것이라 짐작할 뿐이었다. 우선 강채와 적산부터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이 난 것도 저들의 무장이 어느 만큼인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저들의 배가 밝아진 것은 아군에 득이 되었다. 적들의 형상이 드러나기 시작하지 않은가. 밝은 불빛 속의 저들은 아직 전후방에서 자신들 쪽으로 다가드는 이림호와 구림호를 발견하지 못한 듯했다. 발견했어도 자신들과 같이 해안 쪽으로 붙어 움직이려는 상선들이라 여길지도 몰랐다. 두 적선이 줄을 서듯 전후로 서면서 피리산 단구쪽에 가까워졌다. 단구는 서너 층의 바위벽으로 이루어졌고 틈새마다 소나무나 전나무를 키우고 있었다. 이구림 사람들은 그 벽 위 숲에 숨어 신호를 기다리는 참이고 잠수부들은 이미 물속으로 들어갔을 터였다. 시월 열나흘의 바닷물이 뼈를 에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체온이 식어 몸이 굳어버리거나 힘이 빠져 물살에 휩쓸리기 전에 맡은 일을 끝내고 나와야 했다. 그 시간이 반 식경이었다. 적선들이 움직이지 못해 당황하며 연유를 찾기 시작할 즈음이 그때였다.

때가 되었다. 저들 두 척이 벽에 막힌 듯 정지했다. 저들의 노가 이구림 잠수부들의 닻줄에 묶여 무용지물이 된 채 여울물의 힘에 단구 쪽으로 연해 밀렸다. 선상에 몸을 드러낸 적병의 수가 갑자기 늘어났다. 선체 아래를 더듬는 횃불의 숫자가 수십 점이었다. 구림호가 뒤편 적선에 바싹 다가들었다. 앞쪽 적선과 이림호도 가까워졌다.

“소군, 저편에 남색 상의에 남색 모자를 쓴 몸피 큰 자 보이십니까. 모자에 흰 테가 둘렸고 손에 번쩍이는 단검집을 쥐고 있습니다. 그자가 강채입니다.”

서비구의 말을 좇아 보니, 강채가 보였다. 남색인지 검은색인지 불확실했으나 모자에 흰 테가 둘린 이는 번쩍이는 단검집을 쥐고 있는 그뿐이었다. 왕인은 강채를 향해 시위를 겨누었다. 그가 움직이므로 왕인의 과녁도 움직였다. 전투를 모르므로 지휘할 수 없고, 무술을 못하니 앞에 나설 수 없고 기술이 없으니 할 일도 없는 왕인이 오늘 전투에서 맡은 일은 한 가지뿐이었다. 강채를 향해 독이 묻은 화살을 날리기. 그리하여 적병을 장수 없는 무리로 만들기. 왕인이 쏘아 맞추지 못하면 서비구가 뒤따라 쏠 것이었다. 왕인의 독화살이 강채에 박히면 서비구가 쏠 필요가 없었다. 왕인은 자신의 활 솜씨가 어느 만큼인지 알지 못했다. 처음 활을 잡았을 때 한 번도 과녁을 맞히지 못하였다. 그게 부끄러워 활을 잡을 때는 과녁만 생각하는 습관을 들였다. 활을 잡아 시위를 늘이면 바람의 세기와 흐름을 느끼고 과녁이 움직이매 시위를 언제 당겨야 하는지 그 점만 생각하며 화살을 날려왔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던 강채가 일순간 뚝 멈췄다. 비로소 매복에 들었음을 깨달은 것일 터였다. 강채가 다시 움직이기까지의 찰나 간에 그의 심장을 겨냥하고 있던 왕인이 화살을 쏘았다. 화살이 그에게 박혔다. 화살을 맞은 강채가 움직였다. 제 왼쪽 가슴에 박힌 화살에 어처구니없는지 제 가슴을 내려다보다가 화살을 뽑아 내던지며 소리쳤다.

“전후방에 매복이다! 공격에 대비하라!”

그의 외침이 이림호까지 들렸다. 그때 구림호에서 챙, 챙, 챙. 공격 신호가 내려졌다. 구림호에서도 적병대의 부대장 적산을 향해 독화살을 날렸을 것이었다. 그런데 화살 끝에 묻힌 독이 언제 효력을 나타내는 것일까. 독이 맞기는 하는가. 이구림의 잠부수들에 의해 노가 묶인 적선은 수장들이 독화살을 맞았음에도 공격에 대비할 뿐만 아니라 숨겨놓았던 화차를 준비하고 있었다. 피리산에서 두 적선을 향해 불화살을 날렸다. 그에 맞춰 적선들에 바싹 다가든 이림호와 구림호에서 적선들을 향해 유황탄을 던져 넣었다. 불화살과 유황탄이 만나거나 못 만나거나 했다. 불화살은 불화살대로 유황탄은 유황탄대로 꽂히고 터졌다. 피리산 단구에서 던진 기름단지들이 적선을 향해 날아가 터지고 불화살이 날아가 불을 붙였다. 그것들의 절반은 적선에 닿지 못하고 바다로 떨어졌다. 적병들이 날아든 불덩이들을 짓밟아 끄거나 불화살을 집어 이림호를 향해 던졌다. 그것들은 바다에 떨어지거나 이림호에 떨어졌다. 이림호에서는 그걸 끄거나 되살려 적선으로 되던졌다.

적선에서 이림호로 닻을 던지기 시작했다. 닻줄을 걸어 이림호를 끌어당긴 뒤 뛰어넘어 오겠다는 뜻이었다. 닻줄을 엄호하는 화살이 날아들었다. 이림호의 병사들이 방패를 뒤집어 쓴 채로 적선이 던져온 닻들을 바다로 내던졌다. 왕인은 그냥 선 채로 과녁을 정해 화살만 쏘았다. 느리지만 정확하게 하나씩 쏘아 맞췄다. 독화살이 아니라 그냥 화살이었다. 독화살은 네 개만 만들었다. 신중하게 사용하라. 신궁성하께서 그리 말씀하시었다고 하지 않았던가. 모든 화살에 독을 묻힘은 신중치 못했다. 아군이 쏜 화살은 금세 아군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다. 왕인이 쏘는 화살들은 어김없이 적병에 꽂혔다. 그런데 왕인의 화살에 맞은 적병들은 잠깐 움칠하다가 자지러들거나 다시 움직였다. 자지러들었던 적병은 금세 다시 일어나는 것 같았다. 대체 내 화살이 어떻기에 저들을 단번에 쓰러뜨리지 못하는가. 뒤늦게 왕인이 탄식하며 활을 내리고 몸을 내밀어 적선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왼쪽 어깨가 푹 꺼졌다. 어깨가 꺼지니 몸이 꺾였다. 활을 놓쳤다. 뒤늦게 느낀 충격에 왕인이 주저앉았다.

“소군!”

곁에서 함께 화살을 쏘아대던 서비구가 활을 내던지고 달려들었다. 난생처음 당하는 충격에 왕인은 아프기보다 어지러웠다. 화살은 어깨가 아니라 왼쪽 가슴 가까이에 박혔다. 화살이 박힌 곳에서 피가 뭉클뭉클 솟았다.

“저들도 화살에 독을 묻혔을까?”

왕인의 말에 서비구가 웃었다.

“그대의 주군이 죽을지도 모르는데 웃음이 나?”

“보통 화살 한 대 맞는다고 죽지 않습니다. 엄살 부리지 마세요.”

“엄살 아냐. 정말 무지하게 아파. 가슴에 맞았는데 왜 어깨가 아프지?”

“그러게 가부실에 계시라 하지 않았습니까? 자초하신 겁니다. 암튼, 눈 감으세요. 엉겅퀴 님이나 생각하시든가.”

“왜?”

“눈 감으세요. 강채는 보이지 않습니다. 적산도 움직이지 않는 듯하구요. 독 기운에 쓰러진 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드디어 내가 살인을 했네. 헌데, 그들도 누군가를 죽여본 적 있을까?”

“화살 박힌 자리에서 연해 피가 나니 뽑고 지혈을 해야겠습니다. 눈 감으시래도요.”

서비구의 강압이 아니라도 통증 때문에 저절로 눈이 감겼다. 서비구가 왼쪽 소매를 잘라내는 것 같았다. 왕인은 설요를 떠올렸다. 흰여우 같은 사람. 그와 처음 교접할 때 둘 다 너무나 서툴렀다. 교접함에 여인에게 통증이 생길 수 있음을 왕인은 몰랐다. 설요가 삼키는 비명을 몸으로 느꼈다. 날카로운 통증이었다. 놀라 몸을 물리고자 했으나 그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점에 닿고 싶은 스스로의 욕구가 너무나 날카로워 자신을 조절할 수 없었다.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설요의 아픔을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다. 하여 스스로의 욕구를, 온몸이 욕구로만 채워진 것 같은 몸을 물렸다. 스스로는 물렸는데 자신 몸은 설요의 두 팔에 갇혀 있었다. 괜찮아. 계속해. 설요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그때 무엇인가가 터졌다. 그건 쾌락이라기보다 고통이었다. 희열은 고통처럼 생기는 것이었다. 아니 고통을 딛고 오는 것이었다. 그때 인의 희열이 디딘 것은 설요의 고통이었다.

! 설요의 고통을 생각하던 왕인이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떴다. 서비구가 화살을 뽑아낸 것이다. 화살 뽑아낸 자리에서 피가 뭉클뭉클 흘렀다. 서비구가 화살 뽑은 자리에다 무엇인가를 붙여 틀어막고는 붕대를 꾹꾹 눌러 감아 묶었다. 가슴에 바위를 단 것 같았다. 그 무게에 숨이 먼저 막힐 것 같았다.

“응급처치를 했습니다. 전투가 금세 끝날 거예요. 이림에 돌아가 치료받기로 하고, 우선은 거기 꼼짝 말고 계십시오. 한잠 주무시라고요.”

서비구가 꼼짝 말라 했거니와 통증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으나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연뿌리와 치자와 익모초 가루로 만든 지혈제에서 익모초의 쓴 내가 짙게 풍겼다. 전황이 눈에 들어왔다. 온통 불길에 휩싸인 적선과 이림호가 거의 맞붙어 있었다. 적들은 불길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이림호로 넘어올 수밖에 없었다. 이림호에 있던 수비대들과 운무대 수련생들이 넘어오는 그들과 맞붙고 있었다. 왕인에게는 서비구만 보였다. 서비구는 장검을 휘두르며 날아다녔다. 날다 낙하하며 적병을 찌르고 찌른 적병을 돌려치기 하여 바다로 날려 보냈다. 신기하였다. 아아, 무술이란 저런 것이구나. 저게 무예였어. 멋지다. 나도 무술을 배울 걸 그랬어. 왕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탄하다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서비구는 왕인이 기절했음을 알았다. 소염약재를 붙여 지혈을 시켜놨으나 지혈이 되지 않은 듯 붕대가 온통 붉어졌다. 화살이 심장에 맞지는 않은 것 같은데, 혹시 건드렸는지도 몰랐다. 시간이 지체되면 왕인을 잃을 수도 있을 터였다. 적선은 수장을 잃은 상태였다. 장수를 잃은 적병들은 우왕좌왕 분별이 없어졌다. 분별이 없어져 오히려 극악스러웠다. 이 좁은 해협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것을 느낀 저들의 움직임이 단말마의 외침과 같았다. 넘어온 적병들을 바다로 집어넣으면서도 서비구의 머릿속이 바빴다. 일각이라도 빨리 이 전투를 끝내야만 왕인을 살릴 수가 있을 것이었다. 왕인의 목숨이 경각일 수도 있으매, 눈에 뵈는 것이 없어졌다.

유황탄도 기름단지도 불화살도 이미 다 쓴 상황이었다. 적선도 다를 것이 없었다. 더구나 적선은 이미 수장을 잃고 걷잡을 수 없는 불길에 휩싸였다. 선노들까지 모조리 선상 위로 나와 아수라장이었다. 적병들은 타죽지 않으려면 이림호나 구림호로 올라야 했다. 혹은 바다로 뛰어들어 피리산 단구로 헤엄쳐 가야 했다. 적병들에게 이림호나 구림호나 단구는 너무 멀었다. 그 먼 곳에 도착해봐야 그들을 기다리는 것은 어차피 황천길이었다. 그렇게 계획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계획은 왕인의 것이었다. 그의 계획이 곧 명이었다. 명을 내리는 한 명이 있고 그걸 따르는 다수가 있었다. 그게 세상의 움직임이었다. 진수림이 칠백여 명을 죽음의 바다로 나가라 명했고, 왕인이 바다를 그들의 무덤으로 삼으라, 이구림 사람들에게 명했다. 진수림의 사병들이 물뫼협을 자신들의 수장지로 삼을 것은 분명해졌다. 전황이 이미 기울어 있었다. 이미 바다로 뛰어든 자들은 파도를 타고 흘러가 물고기 밥이 될 터였다.

구림호에서 챙챙챙, 징소리가 길게 울리다가 뚝 그치자 피아간의 움직임이 정지되면서 일순 적막이 감돌았다. 수비대장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직 살아 있는 진수림의 사병들은 들으라. 너희들의 수장 강채와 적산이 이미 죽었다. 너희들 중 절반도 바다 속으로 들어갔다. 남은 너희들의 갈 길도 바다 속밖에 없음을 알 것이다. 너희들의 배가 금세 무너져 침몰하게 될 것도 알 터. 지금 무기를 바다에 버리고 투항하면 너희들을 살려줄 것이다. 살고 싶은 자 당장 무기를 버리고 엎드려라.”

대만의 말이 끝나기 전에 무기를 바다에 내던지고 두 손을 들며 엎드리는 자가 있었다. 누가 시작하냐의 문제일 뿐 물꼬 트인 봇물처럼 적선의 사방에서 무기들이 내던져졌다. 선상전이 끝나가는 것이다. 문제는 기절을 하고도 피를 흘리고 있는 왕인이었다. 서비구는 도비에게 갔다.

“스승님, 부상 입고 기절한 소군의 혈루가 멈추지 않나이다.”

“뭐?”

서비구는 스승 도비가 소군의 부상이며 혼절을 알고 있는 줄 알았다. 알면서도 심한 부상이 아니라서, 전황이 급박하니 우선 전투부터 끝내려 한 것으로 여겼다. 사루의 부상을 혼자 응급처치 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스승은 사루의 부상을 모르셨던 모양이다. 재게 다가와 사루의 부상을 살피고 눈꺼풀을 뒤집어보고 코에 입맞춤을 해보시던 스승께서 대번에 외투를 벗어 왕인의 상체를 덮었다. 그리고 단검을 꺼내더니 자신의 왼쪽 엄지를 쓱 그었다. 오른손으로 왕인 입술을 벌리더니 피가 흐르는 자신의 왼쪽 엄지를 왕인의 입 속에다 넣고는 소리쳤다.

“서비구, 부상자들이 있는 선실에 자리를 마련하고 불을 피워라. 소군을 안으로 옮겨 체온을 올려야 한다. 치수!”

치수가 달려왔다. 그는 서비구의 동학(同學)이었다. 자그만 체구를 가진 그는 몸이 아주 날랬다.

“소군의 부상이 심각하시다. 당장 포구로 돌아가야 한다. 넌, 구림호로 넘어가 이 사실을 알리고 포로들을 구림호와 단구에서 받으라 하여라. 이림호는 지금 포구로 갈 것이라 하고.”

, 대답한 치수가 이웃에 있는 적선을 향해 몸을 날렸다. 무기를 내던지고 배를 옮겨 탈 차비를 하던 포로들이 자기들 앞에 착지한 치수에게 놀라 물러섰다. 그 배의 후미로 간 치수가 또 몸을 솟구쳐 이웃 배로 옮겨 타더니 곧장 구림호로 날았다.

사이 왕인을 선실로 옮긴 이림호는 뱃머리를 상대포로 돌렸다. 돛을 올림과 동시에 싸우던 사람들이 일시에 노잡이로 변해 노를 젓기 시작했다. 이림호 선실에는 왕인을 아울러 오십여 명의 부상자가 있었다. 이백 여인이 승선했던 이림호에서 죽은 자는 네댓 명 정도인 듯했다. 한 시진쯤 걸렸는가. 한 시진 만에 적의 절반을 수장시키고 나머지 적들이 항복을 했으니 전과는 대단했다. 왕인이 다치지만 않았다면, 사경을 헤매는 지경만 아니라면 승전고를 울려도 무방할 대승이었다. 서비구는 도비가 그랬듯이 자신의 엄지를 베어 흐르는 피를 왕인의 입을 벌리고 흘려 넣었다.

“소군, 정신 좀 차려보세요. 사루!”

서비구가 불러보지만 창백한 얼굴의 왕인은 반응이 없었다. 몸이 찼다. 피도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지혈이 된 것이 아니라 심장의 움직임이 둔해진 것이었다. 서비구는 왕인의 코에 자신의 코를 대보다 몸을 일으켜 곁에 있는 운무대 수련생 거치에게 스승을 불러오라 소리치고 스스로는 왕인의 가슴팍을 퍽퍽 눌렀다. 퍽퍽 누르고 나서 왕인의 입술에 피 대신 숨결을 불어넣었다. 같은 행위를 거듭 반복했다. 서비구의 손가락에서 흐른 피로 왕인의 가슴팍이며 얼굴이 온통 칠갑이 되었다.

 

 

 


 

 

 

 

 

을유년(385년) 구월 열나흘은 아이태후의 탄신일이었다. 작년 사월, 부황의 승하와 함께 즉위한 황제 부여벽은 모후께서 태후에 오르신 뒤 두 번째 맞이하는 탄신일을 대대적으로 기념하였다. 도성은 물론 전국 담로군 옥사에 갇힌 죄인들 중 그 죄과가 가벼운 자들을 방면케 하였고 각처에서 잔치를 벌이게 하였다. 또 태후의 청을 받아들여 부처신을 받드는 고천사(高天寺)를 고천원 서북쪽 한수변에 건립하였으며 십 인의 불승들에게 도첩을 내렸다. 그로써 부처신의 교리 불교와 그 승려들이 대백제국에서 공식승인을 받고 그 교세를 키워나갈 수 있게 되었다. 한성 안이면서도 인적이 드문 배산임수의 절경에 고천사가 들어섰는 바 황실 사람들이며 백성들이 놀이 삼아라도 흔히 찾아들 것이었다.

작년 사월에 승하한 휘수황제를 휘수(輝首) 근귀수대왕릉(近貴首大王陵)이라 이름 붙인 능원에 안장하고 봉인제를 치른 게 작년 가을이었다. 지난 갑신년이 정신없이 지났듯 올 을유년 또한 어지럽게 왔다가 가는 중이었다. 시절은 가을이나 루사기의 삶은 겨울에 접어들었다. 쉰두 살. 다 놓아버리고 이구림으로 돌아가도 무방할 터인데 그리하지 못했다. 너무 오래 전쟁터를 떠돌았던 탓이다. 모든 걸 놓고 무방비로 있는 순간 적이 달려듦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도 언제나 무방비한 적을 겨누며 살았던 때문이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핑계가 있기는 했다. 재작년 겨울 환도하였을 때 휘수황제가 맡겨온 직책이 도성수비군 상장군이었다. 대방에서 데리고 온 삼천의 황제친위군을 도성수비군으로 편제했을 때 휘수황제는 임시라 하였다. 그러나 루사기는 그가 다시 대륙으로 가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듯 신궁의 예언이 맞아가고 있으니 새 황상은 올해를 넘기지 못할 터. 효혜가 그 시기를 동짓달 즈음으로 보았으니 두어 남짓이면 다시 황제가 바뀌는 것이다.

그걸 아는 사람은 효혜와 루사기를 비롯한 몇 명뿐인지라 태후궁 큰마당에서 열린 태후의 생신잔치는 한껏 흥겨웠다. 열나흘 달이 뜨는 오늘 밤에는 한수에 거선을 띄워 달맞이 뱃놀이를 한다 하였다. 온통 비단으로 휘감긴 배가 황성 앞 강변에 띄워져 달이 뜨기를, 선유객들이 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야흐로 태후의 세상이었다. 모든 대신들과 황족과 귀족들이 참석하였고 참석한 이들마다 태후께 선물을 올렸다. 휘수황제 승하 후 눈에 띄게 기운을 잃은 소야비는 편찮 몸으로 참석해 태후의 초상화를 드렸고 루사기도 아니할 수 없는지라 재작년 환도 당시 대방에서 지니고 온 호피를 태후에게 바쳤다.

“폐하, 도성수비군 상장군 사루사기 들었나이다.”

내관이 아뢰자 문이 열렸다. 황상이 즉위하고 난 뒤 처음으로 독대를 청해온 참이었다. 황상은 대륙의 부여부에 비하면 사뭇 유약해 보였다. 그가 한성에서만 살아온 탓이거나 모후의 손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선입감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상께서는 넓디넓은 대황전의 침소에서 홀로 술을 들고 계셨다.

“소신 사루사기, 폐하의 부르심 받잡고 들었나이다.”

“어서 오세요 장군. 너무 늦은 시각에 오시라 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황공하나이다.”

“앉으세요. 긴긴 하루 끝에 술 생각이 나니 술동무가 그리웠어요. 헌데 생각나는 이가 경밖에 없더이다. 한 잔 드세요.”

대전 시종장 부차가 다가들어 루사기 앞의 잔에 술을 따라주었다. 휘수황제가 큰아들인 벽과 함께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상이 부여부의 형이시니 친근감이 생길 법도 하건만 낯설게만 느껴지는 건 그 때문일 터였다. 루사기에게 휘수황제의 자식은 부여부이고 부여벽은 아이태후만의 자식인 듯했다.

“여누하가 본향에 내려갔다지요?”

여누하는 열흘 전에 이구림으로 내려갔다. 루사기가 쫓아 보냈다. 아비가 부르기 전까지는 한성에 얼씬도 말라 명했고 여누하에 딸려 보낸 집사 유술을 시켜 다님에게 아이를 붙잡아두라 전했다. 필요하다면 독방에 감금을 시켜서라도 이구림에 묶어두라.

—아버님, 그는 아이 같사와요. 그가 서비구 같은 사내로 느껴지지는 않으오나 그의 아이 같은 순정을 외면하기도 어렵습니다.

왕인과 여누하가 열다섯 살이었을 때 루사기와 다님이 송산의 집을 없애고 가부실로 옮겼던 건 태후의 척족들에게 한성에 사씨 집안의 근거가 없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자신이 본국에 있지 못하여 지켜줄 수 없으므로 아이들과 이구림과 소야비가 아예 저들의 눈에 띄지 않게 하고자 했다. 하물며 태자의 눈에 띌 줄 상상이나 했으랴. 여누하가 태자와 사통하고 있음을 루사기는 태자가 즉위한 뒤에야 알았다. 왕인이 신이궁과 사통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