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독자 여러분께

-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 역사

한국에서 출판된 세 번째 책

처음 뵙겠습니다. 이시카와 야스히로입니다. 일본의 고베여학원대학에서 경제학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제가 쓴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이 한국의 독자 여러분을 만나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제 책이 한국어로 번역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입니다. 첫 번째는 제 지도 학생들과 같이 쓴 《일본군 위안부 문제: 일본 여대생들은 어떻게 공부하고 느꼈는가》, 두 번째가 우치다 타츠루 선생님과 함께 쓴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였어요. 《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는 일본에서 시리즈로 출판되어, 최근의 ‘번외편番外編’까지 포함해서 벌써 세 권이 나와 있습니다.

이 《마르크스는 처음입니다만》은 왕초보를 위한 마르크스 입문서입니다. ‘마르크스에 관심이 있다’는 분들보다 오히려 ‘마르크스가 뭐예요?’ 하시는 분들을 위해 쓴 책이죠.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등장하는데, 그들도 마르크스를 읽는 게 ‘난생 처음’이예요. 그런 책이니 여러분도 소파에서 뒹굴뒹굴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보면 좋겠습니다.


보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지향하며

여기서 잠시 제 소개를 할게요. 저는 1957년생이고, 59살 남성입니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고 아시아 곳곳에 침략의 마수를 뻗친, 자칭 ‘대일본제국’이 전쟁에서 진 12년 후에 태어났습니다. 어린 시절엔 천황제의 권력에 의해 침략의 앞잡이가 되어 팔을 잃거나 다리를 잃은 어른들의 모습을 거리에서 더러 봤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는 삿포로라는 눈이 많은 동네에 살다가 1975년에 교토로 옮겨 갔는데, 리츠메이칸대학에 입학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제가 처음 마르크스를 읽은 것도 이 대학에서였죠.

당시 리츠메이칸대학에는 미국의 전쟁에 반대하는 평화 운동(1975년은 미국이 베트남 침략 전쟁에서 패배한 해로, 그때까지 일본은 오랫동안 미국을 지원했었습니다)과 재계·대기업 중심의 정치를 국민 전체를 위한 정치로 바꾸려는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학생들뿐만 아니라 교직원들까지 활발하게 참가하고 있었어요.

그런 분위기에서 저는 선배의 권유로 마르크스를 읽고, 마르크스의 학문과 삶의 방식에 이끌려 ‘보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만들어 가는 운동에도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 벌써 40년이 흘렀네요. 그간 일어난 여러 사건들에 대한 이야기야 생략하더라도, 많은 일들에 관여해 온 저는 아직도 마르크스를 읽으며 ‘보다 평화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만들기 위한 운동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나름대로 제법 집념이 강한 성격이죠.〠


마르크스에 대한 부당한 평가의 근원

그런데 마르크스는 어떤 사람일까요? 간단히 소개할게요. 마르크스는 《자본론》으로 대표되듯, 자본주의 사회를 정밀하게 분석한 학자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결함을 극복하기 위해 사회 개혁을 호소한 혁명가였습니다. 마르크스가 연구한 학문의 영역은 크게 세계관(철학), 경제 이론, 자본주의 이후 다가올 미래 사회(사회주의·공산주의)론, 자본주의 개혁·혁명론 등 4개 분야에 걸쳐 있으며, 이는 서로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조금 앞질러 말하면, 마르크스의 학문과 정치적 주장은 나중에 소련의 스탈린이 정식화한 ‘소련형 마르크스주의=스탈린주의’와는 많이 다릅니다. 스탈린은 민중에 대한 강력한 지배를 확립하기 위해 마르크스의 학문을 왜곡하고, 그렇게 왜곡된 마르크스 안에서 자신에게 권위를 부여했거든요. 이것이 오늘날 마르크스에 대한 오해나 악평의 상당 부분을 구성하는 원인이고요. 마르크스에게 완전히 폐만 끼친 거죠.

그런데 마르크스 본래의 학문이나 주장은 때때로 정치적·경제적 지배층에겐 무척 눈에 거슬리는 것이었습니다. 1848년 유럽에서 부르주아 혁명의 움직임이 일어났을 당시, 마르크스는 왕정에서 의회제로의 전환을 요구하며 앞장서 싸웠거든요. 또한 경제적으로 발전한 영국 등에서는 노동자들의 빈곤에 분노하며 약육강식의 자본주의를 협동과 연대의 새로운 사회로 전환하기 위한 투쟁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고국인 독일에서 추방당하고, 프랑스, 벨기에에서도 살 수 없게 되어 정치적 망명자에 너그럽던 영국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학문 또한 학문으로서의 정당성 문제와는 별개의 이유로 지배자들로부터 악의적인 비난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마르크스에게는 그런 정치적·경제적 이해에 따른 왜곡과 부당한 평가가 스탈린에 의해 저질러진 내용적 왜곡과 뭉뚱그려져 가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일본의 마르크스 연구, 그 시작

그런 마르크스를 해설한 입문서가 왜 지금 일본에서 출판됐을까요. 이 부분을 설명하려면 조금 복잡한 일본 사회의 마르크스 수용 역사를 설명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잠깐 살펴볼까요?

1991년 소련 붕괴(소련은 스탈린과 그 후계자들이 지배하던 민중 억압과 패권주의의 사회였습니다)를 계기로 세계에서 공산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이 차례차례 사라졌습니다.

스탈린에 의한 왜곡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를 위해 정당 활동이 필요하다는 점을 가장 먼저 이야기한 것이 마르크스였습니다. 일본에도 이런 흐름이 미쳐 1922년 공산당이 만들어졌죠. 이때 만들어진 일본공산당은 오랫동안 생명력을 지속하며 지금도 국회에 일정한 의석을 확보(2016년 선거 득표율 10.74%, 득표수는 600만이 넘습니다)하고, 아베 정권의 호전적이고 강압적인 정치와의 투쟁에서 구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연구 시작은 이 정당의 탄생과 깊은 연관을 맺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립 직후 일본공산당은 ‘침략 전쟁에서 손을 떼라’, ‘식민지를 해방시켜라’, ‘한반도를 조선 민중의 손에’, ‘천황제 타도’, ‘민중에게 주권을’ 등의 주장을 내걸었기 때문에 천황을 정점으로 한 지배층은 당연히 이를 적대시했습니다. 1925년에는 공산당을 겨냥한 치안유지법이라는 탄압법이 만들어졌고, 마르크스의 저작도 사실상 금서로 취급됐죠. 그 결과 마르크스 연구나 마르크스적 시각으로 일본 사회를 분석하는 연구는 지하로 숨어든 공산당원이나 공산당에 공감하는 연구자들이 비밀리에 진행하는 작업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일본에서의 마르크스 수용의 초기 상황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민주화 속에서

이러한 상황이 크게 바뀐 건, 침략 전쟁에 패배한 일본을 미국이 군사 점령하고 ‘전후 개혁’을 하면서부터입니다.

천황을 주권자로 하고, 주변의 관료와 군부가 함께 민중을 지배하던 태평양전쟁 이전의 국가 체제는 이 개혁을 통해 해체되었습니다. 군대를 해산한 일본은 한반도를 포함한 모든 식민지에서도 손을 떼게 됩니다. 또한 정치적 민주화의 일환으로 투옥된 정치범이 풀려나고, 탄압으로 인해 1935년 전국적인 조직 활동을 중지했던 일본공산당도 즉시 활동을 재개합니다.

일본공산당은 ‘침략 전쟁에 반대했던 유일한 정당’이라는 신뢰에 힘입어 1946년 태평양전쟁 이후 최초로 치러진 선거에서 5개의 의석을 획득하고, 국회에서 1947년 시행된 일본국 헌법(신헌법)에 ‘국민 주권’을 명기하는 결정적 역할을 했습니다. 마르크스를 읽고 연구하는 것도 자유로워지면서 대학 강의를 통해서도 다양한 형태로 마르크스를 가르칠 수 있게 되었고요(이후 1980년대까지는 ‘경제 원론’ 강의가 ‘근대 경제학’과 ‘마르크스 경제학’, 두 축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습니다). 이 시기, 전시 체제하에서 비밀경찰이 몰수했던 마르크스 관련 서적이 중고 서점에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는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냉전 속에서 다시 시작된 억압

그러나 상황은 다시 뒤바뀝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7년에 걸쳐 미국의 일본 점령이 이어지던 중, 점령 방침이 크게 전환된 겁니다.

연합국 측에는 전후 일본의 개혁 방향을 정한 ‘포츠담 선언’이라는 합의문이 있었습니다. 이 내용은 일본을 평화롭고 민주적인 나라로 다시 만들고, 전쟁 범죄자를 엄중히 추궁하는 것입니다. 1947년 시행된 일본국 헌법은 기본적으로 이 노선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1948년, 이를 일방적으로 내팽개치고 일본을 미국의 군사 기지로 재건하는 길을 걷습니다. ‘전쟁 포기’를 규정한 헌법 제9조의 변경을 처음 요구한 게 다름 아닌 미군이었던 겁니다.

미군에 방침 전환을 촉구한 것은 미·소를 정점으로 한 동서 냉전의 진전이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서유럽·동유럽 갈등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에서도 1948년 한반도가 남북으로 분단되었고, 1949년에는 중국에 공산당 정권이 생겨났습니다. 이러한 상황 변화를 마주한 미국이 일본의 종속화와 재군비를 시작한 겁니다.

현대 일본에는 과거의 전쟁이 침략 전쟁이었음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정치가(아베 총리가 대표적입니다만)가 적지 않은데, 그 큰 이유 중 하나가 미국이 이렇듯 전쟁 범죄에 대한 추궁을 중단하고 심지어 전쟁 범죄 용의자를 ‘미국에 종속된 일본 만들기’를 위한 대리인으로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전환으로 일본공산당과 마르크스는, 이번에는 미국 점령군의 적으로 간주됩니다. 1950년 한국전쟁 직전, 미국은 ‘공직 추방’이라는 형태로 일본공산당에 직접적인 공격을 개시하는 동시에 ‘일본공산당은 소련의 앞잡이’, ‘마르크스는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소련의 사상’이라는 선전을 본격화합니다. 점령군의 하청 기관이었던 당시 일본 정부도 여기에 적극 동조했습니다.

이렇게 1945년까지 자칭 ‘대일본제국’에 의해 ‘천황제의 전복을 꾀하는 불경한 패거리’ 취급을 받던 공산당과 마르크스에 다시 한번 ‘독재자 스탈린의 소련과 직결된 반민주주의적 위험 사상’이라는 꼬리표가 붙었습니다.


이론과 역사를 왜곡한 스탈린

여기서 스탈린이라는 인물에 대해 살짝 소개하겠습니다. 저는 앞서 스탈린을 소련의 독재자이자 마르크스의 학문을 왜곡한 인물이라고 소개한 바 있는데, 그것은 이 점에 대한 이해가 현대의 마르크스 평가를 결정적으로 좌우하는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르크스는 1883년 작고했으며, 그의 동지였던 엥겔스도 1895년 타개했습니다. 이후 그들의 이론과 운동을 가장 분명히 계승한 것이 러시아의 레닌이었습니다(혁명론, 사회주의론 등과 관련해서는 마르크스를 계승하지 못한 부분도 있었지만).

레닌의 지도 아래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성공을 거두면서 러시아에는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 정권이 만들어집니다. 레닌은 정치 분야에서는 민주주의를 존중하고, 경제 분야에서는 다양한 모색 끝에 시장을 활용하면서 사회주의에 접근한다(국가에 의한 통제 경제가 아니라는 겁니다)는 유연한 개혁 노선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1925년 레닌이 사망하자 권력을 장악한 스탈린이 이 노선을 전환합니다. 레닌 사후, 스탈린은 많은 동료를 학살하면서 모든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키는 개인적 전제 체제專制政體를 만들었습니다(이러한 권력 집중 제도는 레닌 시대에는 없었습니다). 동시에 1930년대에는 농업을 강제로 집단화하고(레닌은 농민의 자발적 의지를 존중했습니다), 이에 저항하는 사람들은 모두 시베리아 강제 수용소로 보내는 공포 정치를 확립합니다. 이 시점에서 소련 사회는 마르크스와 레닌이 추구한 사회와 전혀 다른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스탈린의 교활함이 특히 드러난 것은 이 체제를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름으로 정당화시켜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입니다. ①사회주의는 폭력 혁명에 의해서만 태어나며, ②소련이야말로 사회주의의 모범이고, ③소련이 발전하면 자본주의는 자동적으로 붕괴한다는, 스탈린이 만든 ‘이론’은 소련 이외의 나라에서 벌어지는 독자적인 개혁 운동을 부인하고 오직 소련에 대한 복종과 충성만을 요구하는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이를 스탈린은 ‘마르크스·레닌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합니다.

아울러 역사의 진실을 아는 자들을 말살하면서 자신을 레닌과 더불어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영웅으로 묘사하는 역사의 날조 또한 저지릅니다. 이를 소련공산당의 역사 문헌에 적어 넣은 겁니다. 사실 스탈린은 러시아 혁명에서 그다지 눈에 띄는 역할을 하지 않았는데도 말이죠.

스탈린은 이처럼 제멋대로 지어낸 ‘이론’과 ‘역사’를 당시 공산주의자들의 국제 조직이던 코민테른을 통해 각국 공산당에 전함으로써, 거짓된 국제적 ‘권위’를 뒤집어썼던 겁니다.


동유럽 지배를 위한 한국전쟁

스탈린 독재 치하의 소련 정치는 모략적인 한국전쟁의 개시와 지속, 일본공산당에 대한 개입 등의 형태로 한·일 두 나라의 민중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치기도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과의 전쟁을 통해 동유럽 국가에 소련군을 주둔시킨 스탈린은 이들을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각국의 저항이나 국제 여론의 비판 때문에 생각처럼 수월하게 진행되진 않았죠. 그 와중에 미국이 유럽 부흥에 본격적으로 나서기까지 했고요. 이러한 상황에 초조함을 느낀 스탈린은 아시아에 ‘제2전선’을 열기로 계획합니다. 미국의 힘을 아시아로 돌려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동유럽의 ‘위성국’화를 끝내려 한 겁니다. 한국전쟁은 1950년부터 이러한 계획하에 스탈린 주도로 시작됐습니다.

1949년 한국에서 미군 주력 부대가 철수하는 걸 보고, 우선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진南進’ 허가를 요구합니다. 스탈린은 당초 미국을 도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지만, 점차 이 방침을 전환해 1950년 3월부터 4월 사이 김일성 등과 가진 세 차례 회의를 통해 ‘남진’ 작전을 함께 수립합니다.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 두는 한편, 자신들의 운신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 스탈린은 북한에 대한 군사 지원을 1949년 막 공산당 정권이 들어선 중국에 맡깁니다. 이를 마오쩌둥에게 지시한 건 정확히 개전 직전인 5월의 일이었습니다.

결국 미국은 UN군을 중심으로(이런 흐름을 원했던 소련은 의도적으로 UN의 관련 회의에 불참합니다) 한국전쟁에 많은 에너지를 쏟아부었고, 그 사이 스탈린은 부족하게나마 동유럽 ‘위성국’화에 성공합니다.

이렇게 한반도의 민중을 분단에서 상호 간의 살육에까지 이르게 한 한국전쟁은 스탈린의 영토·세력권 확장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었던 겁니다.


일본공산당에 무장 투쟁을 요구

스탈린이 주도한 한국전쟁은 일본의 정치와 사회에도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첫째, 이 전쟁을 계기로 미국은 일본의 재군비를 진행합니다. 전후 일본은 ‘군대 없는 나라’가 되었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 경찰예비대가 창설되었고(군대의 부활입니다), 이것이 1952년 보안대가 되었다가 1954년 자위대로 격상되어 오늘에 이릅니다. 1952년에는 구 미·일 안보조약도 발효됐습니다. 점령 초기의 평화롭고 민주적인 일본을 만들겠다는 개혁 노선이 역전됐다는 점에서 이는 일본에서 ‘역코스’라 불립니다.

둘째, 본래대로라면 이러한 움직임과 정면으로 맞서지 않으면 안 될 일본공산당에 대해 스탈린이 난폭하게 개입하면서 일본 민중의 운동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개입 목적은 한반도에서 이루어지던 미군의 활동을 ‘후방’에서 교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1949년 이미 일본공산당의 내부 사정을 조사한 스탈린은 1950년 점령군과의 ‘무장 투쟁’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일본공산당에 스탈린파의 분파를 만들어 미국 점령군의 ‘공직 추방’을 계기로 분파에 의한 당의 장악을 꾀했습니다. 그 후 이 분파의 본부를 중국 베이징에 둔다고 한 데서 알 수 있듯(그래서 ‘베이징 기관’이라 불렸습니다), 개입은 소련공산당과 중국공산당의 제휴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무장 투쟁’ 운운하지만 미군의 점령하에서 일본공산당이 무기 같은 걸 가지고 있을 리 없었습니다. 만에 하나 요구를 수용한다 치더라도 이를 어떻게 조달할 생각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스탈린 분파는 용감하게도 공수표를 남발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 일을 빌미로 점령군과 일본 정부가 ‘소련의 앞잡이’, ‘폭력 혁명의 당’이라며 크게 선전해 대는 바람에 공산당은 국민의 신뢰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 결과 1949년 선거에서 35석(298만 표)이나 확보했던 공산당 의석은 1951년 선거에서 ‘0석(89만 7000표)’을 기록했습니다.

사태는 1952년 미군이 일본에 대한 군사 점령을 끝내고 1953년 스탈린 분파의 유력 간부가 사망하면서 수습됐습니다. 이를 계기로 한반도에서는 정전 협정이 체결되고, 일본공산당 내 분파 활동도 정체되기에 이릅니다.

일본공산당의 통일성 회복은 1957년 정식으로 이뤄졌는데, 이때 진행된 제7회 당 대회에서 당은 중요한 결정을 내립니다. 앞으로 어떤 해외의 ‘권위’에도 종속하지 않고, 일본의 문제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과에 대한 책임도 스스로 진다는 ‘자주 독립’의 노선을 확인한 겁니다. 이는 ‘...